치팅데이 103화
22. 으쌰으쌰(4)
행복에 젖은 채 디저트를 먹고 있으니 곧 다음 음식이 준비되었다.
“버터넛 스쿼시 아이스크림과 옥수수 무스입니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드셔도 좋고 함께 드셔도 맛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완두콩으로 만든 노란색 앙글레이즈 위에 하얀 옥수수 무스를 놓은 모습이 꼭 계란 후라이 같다.1)
새집처럼 생긴 구운 카다이프와 그 안에 놓인 버터넛 스쿼시 아이스크림은 알처럼 놓였다.2)
같은 음식이라도 이렇게 예쁘게 담으니 사진으로 안 남길 수가 없다.
우선 알 모양의 버터넛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아이스크림이 이렇게 진할 수도 있나?
혀와 입 천장으로 지그시 누르니 극도로 응축되었던 고소함이 냉기를 뚫고 나왔다.
묵직한 식감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어디.”
이번에는 새집처럼 생긴 구운 카다이프와 곁들어 먹었다.
“와.”
바삭함이 이루 비할 데가 없다.
고소한 아이스크림 사이로 바삭한 식감을 느끼는 호사.
따로 먹어도 맛있지만 역시 이곳 디저트는 함께 먹었을 때의 상승작용이 대단하다.
완두콩 앙글레이즈와 옥수수 무스도 함께 떠 입에 넣으니 눈이 띄이는 듯했다.
진득한 옥수수 무스 향이 비강을 채우고 완두콩 앙글레이즈의 짭쪼름한 맛이 풍미를 더하여.
버터넛 아이스크림의 고소함이 더욱 증폭된다.
시중에 판매되는 옥수수 아이스크림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여 가장 완벽한 형태가 된다면 바로 이런 맛을 주지 않을까?
가급적 길게 음미하고 싶건만 숟가락을 멈출 수 없다.
순식간에 그릇을 비우고 옆을 보니 묵은지도 열심히 먹고 있다.
수저를 든 손은 조심스럽고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비치며 입에는 행복을 머금고 있다.
“진짜 대박이죠.”
“네. 이렇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은 처음입니다. 이것.”
“카다이프요?”
“예. 카다이프의 바삭한 식감이 절묘합니다. 옥수수 향도 너무 좋고.”
“어서 드세요.”
말을 하느라 못 먹는 것 같아서 식사를 권하니 묵은지가 기꺼이 한 입 더 먹었다.
생각지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접했을 때는 행복한 표정보다 저렇게 놀란 얼굴이 나오기 마련이다.
다음은 추가로 주문한 차이브 스낵이다.
“먹물을 넣어서 만든 튀일 안에 차이브 나메라카, 소고기 크럼블, 와사마요 크림을 넣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잘 먹겠습니다.”
“너무 예쁩니다.”
공감한다.
우선 김말이 위에 놓인 튀각을 맛 보았다.
설명을 듣긴 했는데 생김새에 정신이 팔려 이름을 제대로 못 들었다.
“음.”
바삭하지만 특별한 감흥은 없다.
메인은 역시 김말이.
소고기 크럼블과 와사마요 조합은 생전 처음 보지만,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이다.
김말이를 집어 크게 한 입 물자 시원하고 달달한 와사마요 크림이 터져 나왔다.
꽉 찬 소고기 크럼블의 바삭한 식감과 미세한 육향이 입 안을 종횡무진한다.
대학 축제에 모르는 가수만 나와서 흥이 식었는데 마지막 초대 가수로 김연자 선생님이 나타났다면 이런 기분일까?
다소 밋밋했던 튀각은 벌써 까맣게 잊었다.
입 안에서 시작된 아모르파티에 어깨춤을 출 뿐이다.
바삭한 소고기 크럼블이 씹힐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손을 흔드는데 묵은지도 몸을 들썩였다.
서로의 반응을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워크림 아이스크림과 머랭, 라즈베리 시나몬 소스.
번트바닐라 마카롱, 진저패션 마카롱.
* * *
“후아.”
식사를 마치고 건물에서 나왔다.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는 충족감이 전신에 퍼진다.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PD님 덕분에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었어요.”
양재천 근처 공영 주차장을 찾아 목적지로 설정하고 차를 몰았다.
“세 번째로 나온 건 어땠어요?”
“머랭이 맛있었지만 너무 많았습니다. 라즈베리 소스와 아이스크림은 맛있었습니다.”
“그쵸? 저도 아이스크림이 진짜 맛있더라고요. 두 번째 먹었던 버터넛 아이스크림도.”
“그게 최고였습니다.”
“저도요. 마카롱은 어땠어요?”
“정말 오랜만에 먹었는데 다른 곳에서 먹던 것과 달랐습니다. 대단히 부드럽고 단맛도 과하지 않아 좋았습니다.”
묵은지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단 말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니요. 왜요?”
“웃으셔서.”
“아. 좋아서요.”
묵은지가 고개를 돌렸다.
의아해서 눈치를 보니 안절부절못한다.
평소에는 항상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데, 괜히 주변을 둘러본다거나 손을 꼼지락거린다.
“그러고 보니 다음 주에 강원도 내려가려고요.”
“고향에 가십니까?”
“도계에 물닭갈비 맛집이 있대요. 맛집탐방 겸 동해도 들르려고요.”
“준비하겠습니다.”
“괜찮겠어요? 굳이 안 가셔도 돼요. 하루 자고 올 거라서.”
대화가 끊겼다.
“정말 괜찮아요.”
“치사합니다.”
“네?”
“그렇게 말씀하시면 치사합니다. 차라리 같이 가자고 말씀하시는 편이 마음이 편합니다.”
잠시 착각한 모양이다.
내 딴에는 아무래도 지방으로 가는데다 1박 2일 일정이니 배려했던 것인데 묵은지는 업무에서 배제된다고 받아들인 것 같다.
책임감과 상승욕이 강한 묵은지로서는 서운할 수 있겠다.
“불편하실까 봐 그랬어요. 다른 것도 아니고 하루 묵고 오는 거니까. PD님 무시하고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로요.”
“……성인이고.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방으로 많이 다니다 보니 입사할 때부터 이런 일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정말요?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고마워요.”
“고마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번 기회에 어머니께도 소개 드릴게요.”
“네?”
묵은지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서 깜짝 놀랐다.
“네? 왜요?”
“방금 어머님께…….”
“아. 제가 PD님 얘기 많이 했거든요. PD님 없었으면 아들 죽었다고 자랑 좀 했죠.”
아들이 항상 무리해서 걱정 중이신 어머니께 묵은지 이야기를 했었다.
실제로 묵은지가 함께해 주면서 내 부담이 확실히 줄었고, 이제는 내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일도 생겼다.
“아…….”
“업무도 그렇고. 사실 밥 먹고 운동하는 것도 혼자 하면 너무 재미없잖아요.”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부담 안 가져도 돼요.”
순간 백우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아무리 부담 갖지 말라고 해도 묵은지 입장에서는 달리 들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아까 백승용차 모였거든요.”
“네.”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약속 시간 돼서 PD님 보러 간다니까 우진이가 그만 좀 괴롭히라고 하더라고요.”
“백우진 씨가 왜 그런 말을.”
“주말에 직장 상사가 부르면 불편하다고요. 전 되게 즐거운데 혹시나 싶어서 여쭤보고 싶었어요.”
묵은지가 날 빤히 본다.
“말씀 아직 안 하셨습니까?”
“뭘요?”
묵은지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다. 운전하느라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화가 났다기보다는 뭔가를 걱정하는 눈치다.
“아, 말했죠.”
백우진에게도 분명 묵은지와 어쩌다 친해지고 같이 밥도 먹고 산책도 하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그럼 왜…….”
“안 믿더라고요.”
“그런 문제였습니까.”
묵은지가 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부담스러우면 꼭 말씀해 주세요. 저 PD님이 불편해하는 거 싫어요.”
“알겠습니다.”
묵은지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다가 말했다.
“아직 어머님 뵙기는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요. 그럴 수밖에 없죠. 이번에는 혼자 내려갔다 올게요.”
“알겠습니다.”
잠시 뒤 서초문화예술공원에 도착했다.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서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숲이 나타났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저도요. 근처에 산책할 만한 곳 없나 찾아봤더니 있더라고요.”
상경한 지 꽤 되었는데 처음이다.
“산책 좋아하십니까?”
“네. 처음엔 귀찮았는데 운동 삼아 계속하다 보니 재미가 붙더라고요.”
“저도 좋아합니다. 이런 곳은 처음이지만 출퇴근길에 보이는 가로수 보며 걷는 걸 좋아합니다.”
“정말요?”
“네. 운동을 해야 살이 빠진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몇 정거장 남기고 미리 내려 걷곤 했습니다.”
식사량을 최소한으로 가졌음에도 운동에도 집착했다니.
섭식 장애를 앓는 사람 중에 상당히 많은 케이스로 알고 있긴 했지만 정말 대단하다.
“잘 됐네요. 이제 식사도 하시니까 좀 더 걸을 수 있겠어요. 근육 발달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네.”
묵은지가 흔쾌히 대답했다.
“우와.”
서울 사색의 길이라는 팻말 뒤로 높이 자란 메타세콰이어 나무가 길게 이어져 있다.
“이쪽으로 가면 양재천 나오나 봐요.”
고개를 돌렸다.
묵은지는 메타세콰이어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햇빛을 받아서 얼굴에 그늘이 없었다.
2주 동안 식사를 시작한 덕분인지 안색이 정말 좋아졌다.
눈이 부신지 잠시 눈을 감더니 호흡을 크게 한다.
바람이 살랑 불어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자 눈을 뜨고 머리를 정돈하는데 눈이 마주쳤다.
햇살을 담은 탓인지.
보드랍고 따사로운 눈동자를 마주친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냄새가 좋습니다.”
묵은지는 작게 웃고는 나를 지나쳐 메타세콰이어 길로 들어섰다.
그 모습이 예뻐서 산책도 잊은 채 한동안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햇빛과 바람. 메타세콰이어. 봄꽃.
사락사락. 뚜벅뚜벅. 사락사락.
그 사이에서 묵은지가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