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104화
22. 으쌰으쌰(5)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백승용차 도시락 매장에서 아저씨 넷이 고사리를 다듬고 있었다.
“오늘하고 내일 진짜 바쁠 거야. 정신 바짝 차리자. 아무리 바빠도 위생 철저히 신경 쓰고, 웃는 얼굴 지키고.”
“오케이.”
“응.”
주지승, 차지찬, 백우진이 마음을 다졌다.
뉴스 보도 이후 큰 관심을 받았던 백승용차는 여러 구독자로부터 꾸준히 후원을 받았다.
최근에는 반찬용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면서 백승용차를 도와주는 사람이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이에 백승용차는 이틀간 총 1,000개의 도시락을 준비하고 기존 가격보다 1,000원 할인하여 판매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광고 수익을 통해 이미 큰 수익을 올린 만큼 팬들이 보내준 마음을 조금이나마 돌려주고 싶었다.
“야.”
“형.”
모두가 각오를 다지는데 반찬용만은 초점 없는 눈으로 입을 벌린 채 고사리를 다듬고 있었다.
“어?”
반찬용이 차지찬과 백우진을 번갈아 봤다.
“정신 차려. 오늘 500개 해야 해.”
“잠 덜 깼어?”
차지찬과 백우진의 구박에도 반찬용은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빨리 다듬어. 한참 삶아야 해.”
“부주방장이 왜 이렇게 굼떠.”
주지승, 차지찬, 백우진이 서둘러 고사리를 다듬었다.
평소보다 많은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기에 다른 직원보다 먼저 출근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
“나 PD님 좋아하나 봐.”
반찬용이 넉놓고 고사리를 다듬다가 입을 열자 고사리를 다듬던 주지승, 차지찬, 백우진이 고개를 휙 돌렸다.
“뭐?”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주지승이 물었다.
그러지 않아도 어제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기에 오늘 장사 끝내고 차분히 얘기해 보려던 차였다.
“어제 공원에서 걷는데. 나무가 양옆으로 있고 주변에 아무도 없었거든? PD님이 그 길을 쭉 걸어가는데 너무 예쁜 거야.”
“웬일이야. 세상에. 형이 지금까지 한 말 중에 제일 재밌다.”
백우진이 반찬용의 팔뚝을 때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서?”
차지찬이 다급히 물었다.
“그래서?”
반찬용이 되물었지만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빨리 뒷이야기나 하라고 재촉하듯 바라볼 뿐이었다.
“뒤돌아서 안 오냐고 하길래 따라갔어.”
“따라가서?”
“가만있어 봐. 얘기 좀 끝까지 들어보게.”
“그냥 산책했어.”
“…….”
주지승, 차지찬, 백우진이 잠시 멈춰버렸다.
“그게 끝이야?”
“무슨 얘기를 하긴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 기억이 안 나.”
“아무튼. 산책하고 또.”
“맞아. 영화 본다고 했잖아.”
“영화.”
반찬용은 여전히 멍하니 답했다.
“무슨 영화 봤어?”
“슈퍼 마리오.”
“어. 나도 보고 싶었는데. 재밌었어?”
차지찬이 쓸데없는 이야기로 새려는 백우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보긴 했는데 못 봤어.”
“뭔 소리야?”
“PD님 보느라 못 봤어.”
“와!”
세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주지승은 반찬용의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차지찬은 주먹으로 가슴을 때렸으며 백우진은 옷을 붙잡고 흔들어 댔다.
“악. 악!”
반찬용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친구의 고통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영화 봤으면 저녁 먹을 시간 됐을 거 아니야.”
“아. 저녁.”
“뭐 먹었어? 떡볶이?”
백우진이 차지찬의 손을 뿌리치고 물었지만 차지찬에게 또다시 저지당했다.
“제육볶음 먹었다고만 해봐. 어?”
차지찬이 백우진의 입을 막은 채 위협했다.
“점심에 디저트를 먹어서 저녁도 일반식 먹으면 안 될 것 같았어.”
“그래서?”
“샐러드 샀는데 테이크아웃 전문점이라 어디서 먹을까 고민하다가.”
“집에 갔어?”
세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아니. 사무실 갔어.”
“아! 쫌! 끊지 말고 쭉 이어서 말해!”
참다 못한 차지찬이 버럭 소리치자 반찬용이 눈을 깜빡이다가 고사리를 집었다.
“내가 좀 이상했나 봐.”
“평소에도 이상해.”
백우진이 딴지를 걸자 차지찬이 백우진의 등을 때렸다.
“PD님이 어디 안 좋냐고 물었어. 뭔가 좀 이상하다고 말하니까 빨리 들어가서 쉬라고 해서 데려다 준다고 했는데.”
“했는데.”
“아픈 사람이 그럴 순 없다고 해서 헤어졌어.”
“아.”
주지승과 차지찬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뭐 다른 말은 안 했고?”
“잘 좀 생각해 봐.”
반찬용이 어제 나눈 대화를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이번 주에 강원도 내려가거든. PD님이 준비한다고 해서 하루 자고 오는 일정이라 안 가도 된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했어.”
주지승과 차지찬이 입을 쩍 벌렸다.
“그럼 어머니께 소개시켜 드린다고 했어.”
“뭐?”
“미친놈아 진도가 왜 그따위야!”
“어?”
반찬용이 어리둥절하다가 상황을 설명했다.
“아니. 내가 평소에 어머니한테 PD님 자랑 많이 했어. PD님한테도 그렇게 얘기했고. 오해할 일 없었어.”
“그래서. 묵 PD가 뭐랬는데?”
“아직은 부담스럽다고. 당연하잖아. 그래서 혼자 가기로 했어.”
“와. 얘 미치겠네, 진짜?”
“내가 볼 땐 이 형 쓰레기야.”
“이 화상아. 마음이 있으면 진솔한 대화도 나누고. 데이트도 해보고. 그러고 서로 마음 확인하면 사귀고. 그러고 여행이든 인사든 해야지!”
답답한 나머지 혈압이 오른 주지승이 한숨을 내쉬며 목에 걸고 있던 염주를 한 알씩 쥐었다.
“잠깐 정리해 보자.”
차지찬이 나섰다.
“네가 은지 PD 헷갈리게 얘기를 했어.”
“뭘 자꾸 헷갈리게 얘기를 했대? 제대로 다 얘기했어.”
“그게 문제라고. 그게!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은지 PD가 그걸 어떻게 들었는지 지금 하나도 모르잖아!”
“내가 왜 몰라! 형이 PD님이랑 얘기했어? 내가 더 잘 알지!”
차지찬도 뒷목을 잡았다.
치솟는 혈압과 분통을 이겨내고자 야채 박스를 들었다가 내리길 반복했다.
“근데 요즘 은지 씨 얼굴 좋아지긴 했더라.”
백우진이 반찬용에게 말을 붙였다.
“그치?”
“어. 아직 너무 마르긴 했는데 밝아진 느낌이야.”
“공원에서 고개 들고 나무 올려다보는데 햇살이 딱 내려왔단 말이야. 원래 PD님이 다크서클도 있고 광대도 도드라져서 그늘이 있는데 그거 없어지니까.”
“없어지니까?”
“…….”
반찬용이 머뭇거리다가 피식 웃으며 고사리를 다듬었다.
“형 진짜 좋아하나 보다.”
“네가 봐도 그래?”
“어. 지금 되게 바보 같아.”
“이게.”
반찬용이 백우진의 입에 다듬은 고사리를 쑤셔넣었다.
백우진이 삶지도 않은 고사리를 우적우적 씹으며 물었다.
“고백할 거야?”
백우진의 질문에 염을 외던 주지승과 밀리터리 프레스를 하던 차지찬이 고개를 돌렸다.
반찬용은 고사리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어.”
“왜!”
주지승과 차지찬이 버럭 소리쳤다.
깜짝 놀란 반찬용과 백우진이 두 주먹을 가슴팍에 모으고 오돌오돌 떨었다.
“누가 봐도 둘 다 마음 있는데 그걸 왜 모르겠어!”
“너 오늘 여기 붙어 있을 생각 말고 은지 PD 들어오면 데리고 나가. 나가서 결판 짓고 오든 말든 해. 알았어?”
두 형들의 윽박에 백우진이 나섰다.
“그렇게 몰아붙일 일이 아니야. 지금 반찬가게 은지 씨 없으면 돌아갈 것 같아?”
“…….”
“은지 씨가 거절하면? 그땐 어떡하게.”
“야. 무조건이야.”
“그래. 진짜 만에 하나 은지 씨가 찬용이 형 마음 받아줬어. 근데 그러다 헤어지면?”
주지승과 차지찬이 멈칫했다.
“되게 특별한 관계처럼 그려지는데 사실 사귀면 헤어지는 일이 훨씬 더 많아. 그 중에 결혼하고 나서도 이혼하는 사람도 많은데 어떻게 끝까지 잘될 거라 생각해.”
백우진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순 없었다.
주지승과 차지찬이 머쓱하여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다시 고사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렇게 말 없이 시간을 보내기를 얼마간.
반찬용이 입을 열었다.
“나 PD님이 좋아.”
목소리가 분명해 뭔가 마음을 정리한 느낌이었다.
“일도 잘하고 성실하고 내가 뭘 바라는지도 센스 있게 알아주고. 그만한 PD 어디서도 못 구해.”
주지승과 차지찬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도 한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인지라 마음 맞는 파트너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백우진은 반찬용이 얼마나 마음 아파할지 알기에 등을 쓸며 위로했다.
반찬용이 고개를 들었다.
“기획 잘하고. 리서치 잘하고. 맞춤법 잘 알고. 시장 분석 잘하고. 계약 잘하고. 그거 다 PD로서 좋은 거더라고.”
세 사람은 반찬용이 무얼 말하고 싶은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친구가 드물게 진솔한 태도를 보였기에 잠자코 들어주기로 했다.
“어제 밤부터 쭉 고민해 봤는데 내가 묵은지 씨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게 아니었어.”
반찬용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사실 잘 모르겠더라고. 난 내가 통통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르잖아.”
묵은지를 좋아한다고 자각한 뒤로 반찬용은 끝없이 질문을 던졌다.
‘정말 좋아해?’로 시작된 질문은 ‘그래도 괜찮겠어?’를 지나 ‘왜 좋아해?’로 이어졌다.
그 답을 찾고 싶었지만 결국에는 찾을 수 없었다.
성실함, 꼼꼼함 같은 성격과 업무 능력은 묵은지 PD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였다.
평소 통통하고 귀여운 여성이 이상형이었는데 묵은지를 좋아하게 되다니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답을 못 찾았는데 이제 좀 알 것 같아.”
주지승과 차지찬, 백우진이 침을 삼켰다.
“나 그냥 그분이 좋더라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얘기해도 좋고. 말 없이 같이 있어도 좋고. 산책해도 좋고. 앉아 있어도 좋고. 죽을 먹어도 좋고. 디저트를 먹어도 좋고. 슈퍼 마리오를 보든 식당에 켜져 있는 뉴스를 보든. 그냥 좋더라고.”
주지승, 차지찬, 백우진이 슬며시 시선을 옮겼다.
“나 묵은지 씨 좋아해.”
반찬용이 마음 깊은 곳에서 꺼내온 말을 내뱉자 세 사람이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찬용이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주지승은 매장 뒤편으로 향했고 차지찬은 백우진의 뒷목을 잡아 끌고 있었다.
그리고 문앞에 묵은지가 서 있었다.
“어…….”
“…….”
“왜 벌써…….”
“어제 몸이 안 좋아 보이셔서 도우러 나왔습니다.”
묵은지의 시선이 갈곳을 잃고 방황했다.
그녀는 대충 가방을 내려놓고 세면대로 향해 손을 씻었고 반찬용은 친구들이 사라진 문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