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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팅데이-106화 (106/120)

치팅데이 106화

22. 으쌰으쌰(7)

백승용차 마지막 영업일.

오픈은커녕 웨이팅 시작 시간까지 아직 2시간이나 남았건만 주변이 벌써 북적인다.

준비했던 대기줄 유도선이 무색하게 블록을 넘어서도 많은 사람이 차례를 기다리는데, 줄을 잘 서 주시고 새치기하는 사람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다.

“오늘 마지막까지 힘내자. 위생. 안전. 인사.”

모두 대답을 안 했다.

주지승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장들은 들으라. 통일의 대업이 머지 않았다.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불심을 지켜야 할 것이니라.”

“예, 폐하.”

“아멘.”

최미카엘의 기도에 작게 웃음 터졌다.

덕분에 긴장이 풀렸는데, 정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처음에는 대체 우리 도시락이 뭐라고 저렇게들 기다리나, 기대에 못 미치면 어떡하나 이런저런 걱정이 들었는데 백승용차를 운영하면서 점차 내려놓을 수 있다.

최선을 다해 만든 우리 도시락이 분명 도움이 된다는 걸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알려준 덕이다.

그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마지막까지 온힘을 다할 거다.

“지찬아, 브로콜리랑 당근 좀 썰어 줘.”

“오케이.”

“우진아, 열무김치 연락 왔어?”

“응. 지금 나갔다 오려고. 더 필요한 거 있어?”

“없어. 찬용이는?”

“없어. 갔다 와.”

백우진이 직원들과 함께 근처 반찬가게로 향했다.

나도 내 할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오늘 맡은 반찬은 비름나물 된장무침이다.

비름은 칼슘과 비타민이 풍부해서 심혈관계 질환에 좋다고 하는데 직접 다루기는 처음이다.

잘할 수 있을지 모르나 주지승이 준 레시피대로 된장 양념으로 무치면 기본은 되지 않을까 싶다.

“들기름 350㎖, 된장 700g, 고추장 250g, 다진 마늘 150g, 다진 대파 150g, 생강즙 3큰술, 들깨가루 50g.”

재료를 섞어 보니 양이 상당하다.

조금 숙성할 필요가 있다고 적혀 있어 냉장고에 넣었다.

나물은 개장 1시간 전에 무칠 거라 지금은 동시에 3가지 요리를 하는 주지승을 돕는 게 우선이다.

“형, 이거 내가 할게.”

계란말이용 프라이팬 앞에 섰다.

“괜찮아?”

“어. 찌개 지찬이 형이 보고 있고 밥도 앉혀 놨어.”

주지승이 씩 웃더니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오늘 백승용차 도시락은 가라아게, 중화풍 버섯볶음, 열무김치, 비름나물 된장무침과 김치찌개다.

튀김과 버섯볶음 모두 손이 많이 가는 터라, 계란말이라도 가져와야 주지승이 제 실력을 뽐낼 수 있을 거다.

“반찬, 김치찌개에 참치 안 넣냐?”

차지찬이 불렀다.

“단가 올라가!”

“야, 암만 그래도 그렇지. 참치 없으면 그게 김치국이지 김치찌개야?”

“찌개 글자 지우고 국이라고 써놓든가.”

“아니야. 아니야. 고기 넣으면 되지. 뭐 없나?”

차지찬이 냉장고를 열었다.

나도 계란을 마느라 정신이 없어 신경을 껐는데 잠시 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상규야, 위에 닭가슴살 얼마나 있지?”

“많죠? 200팩 정도 있어요.”

“다 가져 오자.”

“잠깐!”

심상치 않은 대화에 놀라 다급히 외쳤다.

“그거 가져 와서 뭐 하려고?”

“찌개에 넣어야지.”

“누가 김치찌개에 닭가슴살을 넣어?”

“그럼 김치랑 콩나물만 넣은 걸 주라고? 의리 없게?”

그놈의 의리는 대체 뭔지 이해할 수 없다.

“지승이 형, 지찬이 형 좀 말려 봐.”

“뭐? 왜?”

“김치찌개에 닭가슴살 넣는다잖아.”

“찢어서 넣어.”

기대와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닭가슴살 넣을 거면 얇게 찢어서 넣어. 그래야 퍽퍽한 게 조금이라도 없어져.”

“오케이~”

말릴 틈도 없이 차지찬이 직원들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닭가슴살 넣어도 돼?”

“안 해봤어. 다리살은 괜찮은데 쓰읍. 가슴살은 좀 퍽퍽할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주지승이 역시나 부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내 말이.”

“지찬이가 알아서 하겠지.”

말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당장 눈앞에 놓인 일이 너무 많다.

포기하고 계란을 말고 있으니 백우진이 직원들과 양손 가득 김치통을 가지고 들어 왔다.

“끄으응!”

“수고했다.”

“수고.”

백우진이 냉장고에 열무김치를 넣고 앓는 소리를 냈다.

“와. 김치 진짜 너무 무거워.”

“나물 좀 데쳐 주라.”

“힘들다고 하는데 말 한마디 받아주고 시키면 어디 덧나냐?”

“오구오구. 우리 우진이 잘했어요. 우쭈쭈주.”

“응.”

백우진이 큰 냄비에 물을 받았다.

“우리 마지막 날인데 인사는 좀 나가야 하지 않나? 밖에 사람 진짜 많아.”

“더 늘었어?”

“어.”

“그러게. 오늘은 얼굴이라도 좀 비춰야 할 것 같은데. 찬용아, 이거 내가 하고 있을 테니 너 잠깐 나갔다 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가.”

“악! 무슨 짓이야!”

주지승과 얘기를 나누던 중 백우진이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내밀어 보니 차지찬이 김치찌개 냄비에 닭가슴살을 넣고 있다.

“너도 붙어서 뜯어.”

“이걸 왜 넣어! 어? 에? 넣지 마! 그만! 그만! 형! 얘 좀 봐!”

백우진이 주지승에게 차지찬의 만행을 일렀다.

“이 자식이 형한테.”

“김치찌개에 닭가슴살 넣는 형따위 둔 적 없어!”

“닭가슴살 김치찌개 먹어 봤어?”

“안 먹어도 알아. 무조건 맛없어.”

“난 이거 10년 동안 먹었어. 알지도 못하면서 호들갑이야.”

“아니, 대체 몇 개를 넣으려고?”

“오늘 500개잖아. 이건 다 넣어야지.”

나도 주지승도 백우진을 따라 자리를 옮겨 차지찬이 가져온 박스를 확인했다.

개별 포장된 냉동 생닭가슴살 팩이 족히 200개는 되어 보인다.

“지찬아.”

“어?”

“아니야.”

주방장의 말에 차지찬이 닭가슴살과 우리를 번갈아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의리 없는 인간들.”

“적어도 상식은 있어.”

소동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우리 모두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대화할 시간도 부족했다.

그 와중에 한 사람씩 짬을 내 팬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내 차례가 돌아왔다.

“와! 실물이야.”

“네. 실물이에요.”

“형, 몸 왜 이렇게 좋아요?”

“진짜요? 나 진짜 몸 좋아요?”

그러지 않아도 요새 살 많이 빠졌다, 몸 좋아졌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거짓말~”

“넌 가라.”

“아저씨, 저 사인해 주세요.”

“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뭐예요?”

한 구독자가 만 원을 내밀었다.

“계산은 이따가 저기 우진이한테 하시면 돼요.”

“현실 후원이요.”

“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명 방송 중일 때는 넙쭉넙쭉 잘 받았는데 직접 얼굴 보며 현찰을 받자니 어색하다.

“아니에요. 이 돈으로 도시락 사 주세요.”

평범하고 상식적으로 대하는데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라고 할 줄 알았지? 이런다고 사양할 줄 알았어요?”

이제야 주는 사람도 주변사람들도 웃는다.

대체 내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길래 돈에 미친놈처럼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사진 찍어주세요.”

“근데 진짜 살 많이 빠지셨다.”

“방송보다 훨씬 나아요.”

“왜 이래요. 방송에선 놀리기만 하더니.”

“장난이죠~”

“어. 승민이 얼굴 기억했어. 놀리긴 했단 말이지?”

“으하하핳핳.”

사인을 받은 김승민이란 학생이 친구들과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뭐라도 사 주면서 더 얘기 나누고 싶다.

“진짜 고마워요. 더 있고 싶은데 안에 사람들이 다 너무 바빠서 들어가야 해요. 오늘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힘내세요!”

“파이팅!”

매장에 들어오자마자 프라이팬 앞에 붙었다.

“마지막 200개!”

“오케이! 손님 받자!”

백우진이 도시락 세팅이 절반 정도 되었다고 알리자 주지승이 손님을 받자고 외쳤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주지승이 한숨과 함께 안대를 내리곤 소리쳤다.

“그대들은 들으라. 곳간을 열고 굶주린 백성들을 도성에 들여 쌀을 나눠주도록 하라.”

“예, 폐하!”

* * *

수요일.

잠에서 깨어나 보니 새벽 5시다.

지난 한 달간 백승용차를 운영하다 보니 일찍 일어나는 버릇이 든 모양이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다시 누웠다.

“하아.”

온몸이 쑤신다.

음식 장사는 차라리 헬스를 하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정말 고되다.

어지간하면 어제 가볍게 쫑파티라도 할 계획이었는데 다들 녹초가 되어 이번 주 금요일로 미뤘다.

점심 장사만 하는 나도 이 지경인데, 새벽부터 출근해 늦은 밤까지 근무하는 요리사들은 대체 어떻게 버티는지 모를 일이다.

“…….”

금세 다시 잠들었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이 환하다.

시계를 보니 아침 9시.

좀 더 잔 덕분인지 컨디션이 나쁘진 않다.

“어디.”

유튜브에 들어가 오늘 0시에 업로드된 영상을 확인했다.

내일 올려도 된다고 했는데, 묵은지와 편집자들이 야근까지 하며 올려주었다.

이제는 제법 반찬가게 스타일에 적응했다고 판단해서 피드백 과정을 넘기고 있는데, 큰 문제는 없다.

댓글을 확인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고생했다. 고맙다. 맛있었다. 응원한다는 내용의 댓글을 읽고 있자니 정말 내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기분이 든다.

└헛소리만 하는 놈인 줄 알았는데 진짜 의외였음

└딱 한 번뿐이지만 덕분에 점심 맛있게 먹었어요

└채널명 닉값 ㄷㄷ

└나중에라도 진짜 쭉 운영했으면 좋겠다

침대에 엎드려 댓글을 읽다 보니 시간이 훅 지났다.

유동식으로 나온 당뇨케어 제품을 들이켠 뒤 출근 준비를 했다.

주차장으로 가니 우리 예쁜 팔공이가 먼지를 덮고 있다.

카마스터가 발품을 팔아 옵션에 맞는 취소차량을 구해줘 출고를 빨리 받았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세차도 제대로 못 해줬다.

이번 주말에는 꼭 때를 밀어주기로 마음먹고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여니 묵은지가 키보드 앞에 놓인 편지 봉투를 심각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PD님.”

“오셨습니까.”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홍성일 대표가 사례라며 줬는데 받고 나서 확인하니 고민이 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받았는데 장사하느라 까먹고 있었다.

“뭔데요?”

묵은지가 봉투를 열어서 내용물을 들어 보였다.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50만 원권 백화점 상품권이 다발로 들어 있다. 어림잡아 20장은 되어 보인다.

홍성일 대표 쪼잔한 줄 알았는데 통이 크다.

“돌려줘야 하나 고민하는 거예요?”

“왜 돌려줍니까?”

묵은지가 날 보다가 상품권을 봉투에 넣었다.

“어디에 써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고민이었군.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말리려고 했는데 자기 몫은 알아서 잘 챙겨 다행이다.

“갖고 싶은 게 딱히 없습니다.”

“옷이라든가. 가구라든가. 신발도 있고요.”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그다지 관심 없는 분야 같다.

“구경하다 보면 사고 싶은 게 있지 않을까요?”

“충동구매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냥 두는 게 좋겠네요. 어차피 유효기간도 많이 있을 테고.”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묵은지가 의자를 돌리고 날 빤히 봤다. 시선을 마주치니 조금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께서도 보류할 생각이십니까?”

“뭘요?”

“홍성일 대표에게 사례 받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 저는 이거 받았어요.”

지갑을 꺼내서 홍성일에게 받은 명함을 보여주었다.

“연락해 보라고 했는데 바빠서 못했어요.”

웬만하면 꼭 나가고 싶었던 모교 강의도 못했고 심지어 개인방송도 쉬는 날이 꽤 있었다.

5월 한 달은 정말 백승용차에 올인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잊고 있었다.

“표승재…….”

“아는 분이에요?”

“네.”

“무슨 투자 회사인 것 같긴 하던데. 맞다. 제임스자산운용.”

“재벌 상대로 자금 운용하는 기업입니다. 홍성일 대표도 거래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왜.”

“직접적인 금전 보상은 기록에 남으니 간접적인 방법으로 사례한 듯합니다. 제게 굳이 백화점 상품권을 준 이유도 그 때문일 겁니다.”

“간접적이요?”

“제임스자산운용에 가입하려면 금융자산을 최소 30억 원 이상 보유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네?”

“그 외에도 비공개된 가입 조건 까다로워 거래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곳입니다.”

“엄청 수상하잖아요.”

투자 회사면 운용 자금 확보에 힘쓸 텐데 가입 조건이 까다롭다고 하니 이상하다.

“고급 인력은 한정되어 있고 그들이 관리할 수 있는 사람도 정해져 있다는 게 표승재 대표의 지론입니다.”

“…….”

“홍성일 대표가 스스로 사례라고 했으니 나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는 대표님께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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