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110화
22. 으쌰으쌰(11)
백우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소 지쳐 보이고 얼굴에 땀도 맺혀 있다.
“더워?”
“너무 더워.”
“차 타고 온 거 아니야?”
“출판사랑 미팅 있어서 거기 들렀다가 걸어 왔어. 진짜 너무 덥고 꿉꿉해.”
백우진이 옷을 펄럭이며 더위를 호소했다.
주차장 자리가 애매할 수 있으니까 좀 걷더라도 그냥 두고 온 모양이다.
“에어컨 온도 좀 낮춰 줘.”
“안 돼. PD님 추워해.”
백우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만.”
“안 돼.”
묵은지는 오랜 기간 섭식 장애를 겪어 몸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찬 바람이라도 쑀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다.
“진짜 이렇게 나올 거야?”
“조금 참으면 괜찮아져. 선풍기 틀어줄게.”
“어~ 5년 동안 본 나보다 5달 만난 은지 씨가 더 좋다 이 말이지?”
“야.”
깜짝 놀라 백우진의 입을 막으니 띠띠띠 하는 전자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리모컨으로 에어컨을 조작하는 묵은지를 볼 수 있었다.
“고마워요.”
백우진이 묵은지에게 고맙다고 하자 묵은지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곤 본인 자리로 돌아가 얇은 카디건을 걸쳤다.
“…….”
“왜 그래?”
대답하지 않으니 백우진이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든다.
내가 덥다고 할 땐 낮춰주지 않았으면서 백우진이 덥다고 하니 곧장 온도를 낮춘 게 왜 이리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아니야. 시작하자.”
요리보고에 필요한 화면 세팅을 해두고 아기공룡 둘리 음악을 틀었다.
뚜뚜-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열 받네?”
“어?”
“왜 땀을 흘리고 난리야!”
백우진이 얼빠진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왜 힘들게 걸어 와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냐고!”
“어? 어?”
“많이 더워?”
“조, 조금?”
선풍기를 끌어다 틀어 놓고 냉동고를 열어 봉투에 얼음을 잔뜩 넣어 백우진 머리에 얹었다.
“아직도 더워?”
“형, 왜 이래.”
“덥냐고!”
“아, 아니.”
“땀 흘리잖아! 더운데 땀을 왜 흘려! 벗어! 옷이라도 벗자!”
옷을 벗기려고 하니 백우진이 기겁했다.
“미쳤어? 왜 이러냐고!”
“덥잖아! 더워 미치겠다며! 죽겠다며!”
“그렇게까지 말 안 했어! 이것 좀 놔!”
“옷은 안 벗고 싶다?”
“당연하지!”
냉동고에서 얼음을 통째로 꺼내왔다.
“설마. 아니지?”
백우진의 옷을 잡아 당겨 얼음을 털어넣으려 하니 녀석이 펄쩍 뛰었다.
“그만! 그만! 반찬용! 아! 형! 형 제발! 미안! 미안!”
“왜 미안해! 내가 미안해! 더운데 에어컨도 못 틀어줘서 정말 미안해!”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참을게. 참는다고!”
“참긴 왜 참아? 내가 잘못했는데. 시원하지? 이제 시원하냐!”
“아! 진짜 미쳤나 봐!”
다 털어넣긴 불쌍해서 하나만 옷 속에 넣었더니 꿈틀거리며 난리법석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뭔 짓이얔ㅋㅋㅋㅋㅋㅋ
└갑자기 왜 저랰ㅋㅋㅋㅋㅋ
└훈훈하네요. 더운 동생 위해서 귀한 얼음도 털어내 주고.
└좋아 죽네
└뭐냐곸ㅋㅋㅋ
└이 방 콘셉 바뀌었음?ㅋㅋㅋ
등허리 주변에서 얼음을 꺼낸 백우진이 의자에 털썩 앉고는 날 노려본다.
“아직 더워?”
“아니. 하나도 안 더운데?”
“그럼 왜 그렇게 씩씩거려. 증기 나오겠다.”
“……빨리 시작이나 해.”
다시 둘리 노래를 틀었다.
“요리 보고.”
“저리 봐도.”
“알 수 있는 음식 이야기. 세상 모든 지식을 탐구하는 백우진 선생님과 함께합니다.”
“진짜 뻔뻔하다. 방금 전에 제가 무슨 일을 당했냐면요.”
“어차피 편집할 건데 그냥 포기해.”
“누구 마음대로 편집을 해? 지금 여기 계신 분만 만 명인데 누굴 속이려고?”
“왜 이렇게 열을 내. 다시 더워지고 싶어?”
“아니.”
└ㅋㅋㅋㅋ왤케 살벌햌ㅋㅋㅋ더워지고 싶넄ㅋㅋㅋㅋㅋ
└백우진이 쭈그리된 거 봨ㅋㅋㅋ
└반찬용 진짜 개나빴닼ㅋㅋ 좀 덥다고 좀 할 수 있짘ㅋㅋㅋ
└그래도 시원하긴 한 모양이네
손뼉을 쳤다.
“오늘은 초계탕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를 준비해 봤습니다. 여름마다 시원한 보양식으로 많이 사랑받는 음식인데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면서요?”1)
백우진이 입을 쭉 내밀고 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니 또 설명을 시작했다.
“네. 초계탕이란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 얘기가 많아요.”
“그냥 생각하기로 식초랑 닭이 들어가서 초계탕 아닌가 싶은데요.”
“두 가지 주장이 있어요. 방금 말씀하신 식초의 초와 닭을 뜻하는 계가 더해져 초계탕으로 부른다는 사람이 있고, 계가 겨자의 평안도 사투리 계자에서 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초계탕은 평안도 음식이겠네요?”
“네. 2011년 4월 1일 당시 서울신문사 문화사업부의 최영철 과장님이 쓰신 조선시대 평안도 지방의 궁중요리 초계탕을 보면 초계탕은 조선시대 평안도 지방의 대표 궁중요리로 소개돼요.”
“좋습니다. 근데 왜 어원에 대한 주장이 갈리죠?”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어요. 다만 초계탕을 판매하는 업장이나 요리 관련 지식이 있으신 분들은 보통 식초와 겨자에서 온 이름이라고 말씀하시고. 국립국어원에서는 닭 계라고 말해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초계탕을 검색해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다.
“확실히 사전에 닭 계 자로 나와 있네요.”
“사실 초계탕은 고급 음식이라 궁중에서 많이 즐겼어요.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보면 1795년 2월,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차린 회갑연에 초계탕이 나와요.”
“2월? 차가운 음식을 겨울에. 아, 얼음이 없으니까 겨울에만 먹을 수 있었구나.”
“좋은 추리지만 아니에요. 초계탕은 원래 따뜻한 요리였어요.”
백우진이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1700년대 조리서 증보산림경제에서는 초계탕 조리법을 이렇게 설명해요. 살찐 암탉과 파 흰 부분을 솥에 넣고 좋은 식초와 청장, 참기름을 부은 뒤 푹 고아 닭뼈가 발라질 정도에 이르면 달걀 6~7개를 풀어 먹는다고.”
“그러네요. 처음부터 차가운 음식은 아니었네요.”
“그러기도 하고 겨자가 빠져 있죠.”
“혹시 청장이라는 게 겨자 아닐까요?”
“청장은 곰팡이가 핀 메주를 씻어서 소금물에 담가 발표시킨 거예요. 색이 진하지 않은 갓 담은 간장으로 보면 돼요.”
“그럼 초계탕은 원래 닭에 식초, 간장, 참기름을 더해 만든 탕이었네요. 그럼 겨자 얘기는 뭐예요?”
“말 그대로 북한 향토 음식이에요. 평안도, 함경도 부근에서는 여름철 닭의 기름기를 제거하고 신선한 채소나 전복, 해삼을 넣어 초계탕을 만들어 먹었는데 겨자는 예전부터 소독 효과가 있어 채소를 신선하게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어요.”
“그럼 북한에서 먹던 초계탕은 진짜 겨자가 들어갔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그렇게 북한 향토 음식이었던 초계탕을 서울 평래옥에서 1950년부터 팔기 시작했으니 아마도 닭 계 자를 쓰는 초계탕과 겨자, 즉, 계자를 쓰는 초계탕이 나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기하네요. 근데 1700년에 소개된 초계탕은 따뜻한 음식이잖아요? 이건 어떻게 된 거예요?”
“아마도 소실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원래 닭 계 자를 쓰던 초계탕이 소실되었다?”
“1910년대에 출간된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을 보면 초계탕을 여름에 차갑게 먹는 음식으로 소개해요. 이후로도 쭉 같은 식으로 소개되고요. 전통 방식은 나오지 않는데, 아마 조선 왕실이 해체되면서 그때 같이 사라진 것 같아요. 그러다 궁에서 일하시는 분들에 의해 조금씩 민간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있지만요.”
“그러면 왕실에서 먹던 따뜻한 초계탕과 평안도에서 먹던 차가운 초계탕 두 개가 있었단 말이네요?”
“저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그래서 어떤 초계탕을 지칭하냐에 따라 계가 무슨 뜻인지 달라진다고 보고요.”
“좋습니다. 초계탕 이름의 어원을 둔 저와 백우진 위원의 생각을 다뤄봤는데요. 사실 정확히 밝혀진 건 없습니다. 그 점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바라요.”
“그나저나 초계탕 얘기를 하다 보니 한 그릇 먹고 싶네요.”
“이따 같이 먹을래?”
“선약 있어.”
“누구랑?”
대답하지 않으니 백우진이 슬쩍 고개를 돌려 묵은지를 확인하곤 내 멱살을 잡았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 어? 어떻게 그렇게 변하냐고!”
“왜, 왜 이래?”
“여기까지 오게 해놓고 밥도 같이 안 먹고 돌려보내려 했어? 변했어! 형 변했다고!”
“나 다이어트 중이잖아. 너처럼 일반식 자주 못 먹어.”
“왜 혼자만 빼!”
“살려고 그런다 살려고.”
“그럼 어쩔 수 없지.”
백우진이 손에 힘을 풀고 얌전히 앉았다.
얘 이렇게 태도를 확확 바꾸는 걸 보면 가끔 좀 무섭다.
* * *
방송을 종료하니 백우진이 턱을 괴고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뭐가?”
“은지 씨 좋아한다며. 얘기했어?”
“아직.”
백우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 진짜 그러다 벌 받는다?”
“시끄러워. 빨리 가.”
“와. 일 끝났으니 버리는 거야? 진짜 섭섭하다.”
“그게 아니라. 아.”
답답해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묵은지가 아직 업무 중인 것을 확인하곤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얘기할 거야.”
백우진이 입을 크게 벌리더니 얼굴을 들이밀었다.
“진짜?”
“그러니까 오늘만 좀 봐주라.”
“흠. 그래. 뭐, 그런 이유면 봐 줄게. 근데 어떻게 말하게?”
“분위기 있는 곳에서 밥 먹고 산책 좀 하다가 얘기하려 했는데, PD님이 샐러드 먹자고 해서 잘 모르겠어.”
“진짜 큰일날 뻔했다. 형, 고백은 무조건 공개로 해야지.”
“뭔 말이야?”
“사람들 많은 곳에서 꽃다발 주면서 큰 소리로 해야 한다고. 영화 안 봤어?”
“내가 네 말을 듣느니 차라리 목을 매달지.”
“아, 답답해. 진짜라니까?”
“닥쳐. 빨리 가.”
“크히히히힛. 파이팅.”
백우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내 방을 나섰다.
“은지 씨, 저 갈게요.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