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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팅데이-111화 (111/120)

치팅데이 111화

23. 내 집(1)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나도 인사를 건네니 묵은지가 작게 웃으며 받아주었다.

“뭐 드실래요? 사 올게요.”

“같이 가겠습니다.”

다녀오는 동안 어떻게 마음을 전할지 고민하려 했는데 당황스럽다.

그러나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사무실 문을 잠그고 함께 나섰다.

“오늘 방송 대본이 혹시 따분했습니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묵은지가 대본이 어땠냐고 물었다.

“아니요. 딱히. 그랬으면 미리 말씀드렸죠. 왜요? 잘 안 나왔어요?”

“원래도 과장되게 행동하실 때가 있지만 오늘은 유독 그러셔서 의아했습니다.”

“아.”

내가 덥다고 할 때는 에어컨 온도를 낮추지 않더니, 백우진이 말하니 곧장 온도를 낮춰서 기분이 묘했다.

그걸 백우진에게 풀었는데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다시 생각하니 나도 내 행동이 낯설다.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묵은지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물었다.

꾸밈 하나 없이 올곧게 날 향한 눈을 보니 나도 모르게 솔직해진다.

“화가 좀 났어요.”

“백우진 씨가 더운 게 그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아니요. 우진이가 덥다고 하니까 PD님이 에어컨 트셨잖아요.”

“네.”

내가 이렇게나 유치했나.

말하면서도 부끄러워진다.

“그게 화가 나더라고요.”

묵은지가 날 보며 눈을 깜빡인다.

“전기 요금이 아까웠습니까?”

“아니요.”

“그럼 왜…….”

“제가 덥다고 할 땐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 자신에게 어이가 없다. 도저히 묵은지를 볼 자신이 없어 문이 열리자마자 다급히 빠져나왔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꺼냈는지 모르겠다.

당황해서 앞서 걸었지만 어차피 같은 곳에 가는 상황이라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절망스러울 정도로 멍청하다.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묵은지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해했습니다.”

“네?”

깜짝 놀라 되물었다.

방금 내가 뱉은 헛소리를 이해한다는 묵은지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다만 원활한 방송 진행을 위한 행동이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습니다.”

“알죠. 아는데.”

내가 한 어이없는 말조차 이해해 주려는 묵은지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저도 제가 왜 그런지 모르겠.”

고개를 돌려 묵은지를 본 순간 다시 솔직해진다.

“사실 알아요. 모르지 않아요.”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여름을 앞둔 밤 공기는 다소 습하고 주변을 둘러싼 고층 건물은 드문드문 불이 밝혀져 있다.

길을 걷는 사람들과 자동차 엔진 소리 사이에서 오직 그녀만이 내 시선과 귀를 이끈다.

“좋아해요.”

묵은지가 당황한다. 주변을 둘러보며 어쩔 줄 몰라한다.

“좋아해서 질투했어요.”

며칠 동안 내내 고민했다.

어디서 어떤 목소리로 전할지.

표정은 어떻게 지어야 할지, 이상하진 않은지 거울을 보고 연습하다가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곤 했다.

무슨 단어를 써야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싶어 몇 번이고 연습장을 썼다 지우고.

이불을 끌어안고 걷어차기를 수십 번 끝에 질투했다니.

그 수많은 상상 속에서 가장 한심한 고백이다.

“한심하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한다는 말이 고작.”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안심했습니다.”

신호등이 바뀌었다.

그러나 나도 묵은지도 횡당보도를 건너지 않았다.

“직접 표현하신 적이 없어서 가끔 제가 착각한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질투를 느꼈다며. 직접 말씀하시니 무척 기쁩니다.”

묵은지가 날 보며 싱긋 웃었다.

“저도 좋아합니다.”

믿기지 않을 만큼 기쁘지만.

사실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눴던 대화, 표정, 감정, 시간 모두가 지금 내 마음이 착각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많이. 많이 좋아해요.”

“저도 많이 좋아합니다.”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쑥스러워져 신호등을 보았다.

그렇게 나란히 파란불을 기다리다가 신호가 바뀌고 발을 내디딘 순간 손등이 스쳤고 한 번 더 스치고.

서로 조금 더 다가가 손바닥을 맞대었다.

어떤 샐러드를 먹을지 고민할 여유 따윈 없었고 손을 놓치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것마냥 사무실에 돌아올 때까지.

들어선 뒤에도 손을 꼭 쥐었다.

샐러드를 꺼내야 할 텐데 그러기 싫어서 내려놓고, 손 잡은 채 서로 딴청만 부렸다.

“……유치했죠? 우진이한테.”

“대표님은 원래 다소 유치했습니다.”

“네?”

“그 점이 귀엽습니다. 부끄러워서 빨리 걸어갔는데 결국 같이 가야 하는 걸 깨닫고 기다리는 점도.”

들켰다.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백우진 씨가 의외로 땀 냄새가 심한가 싶었습니다.”

“흐흫흣흫. 그게 뭐예요?”

“땀 좀 흘렸다고 그렇게 화를 내시니 땀 냄새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핫핫하!”

어이도 없고 황당하기도 해서 웃음이 터졌다. 몰랐는데 가끔 엉뚱한 소리도 한다.

“이제 먹을까요?”

한번 크게 웃고는 밥을 먹자고 하니 묵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늘 저녁은 닭가슴살 샐러드다.

대표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샐러드를 뒤적인다.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같은 걸로 달라 했을까 싶은데, 인상을 쓰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베시시 웃는다.

그러면 나도 기분이 좋아져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다.

사실 불안이 없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적극적이었으면서 퇴근 후에는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

워낙 일을 많이 하시니 피곤해서 일찍 자나 보다 하고 이해했다.

항상 PD님이라고 부르는 점도 신경 쓰이다가 일할 때만큼은 구분 짓고자 나 또한 대표님으로 불렀던 걸 깨닫고, 그의 깊은 사려를 이해했다.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도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라 생각했다.

나도 그렇고 그의 마음은 충분히 전달되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만 연인끼리 하는 흔한 스킨십이 전무한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유치원생도 하는 뽀뽀는커녕 손조차 잡을 생각이 없는 태도에 혹시나 내가 착각한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1박 2일 여행을 제안받았을 땐 깜짝 놀랐다.

둔한 건지 아니면 내 착각인지 혹은 그러한 욕구가 전혀 없는 사람인지 의심하던 차.

의외로 대담한 구석도 있구나 싶었다.

어머님께 소개하고 싶단 말에는 진도가 너무 빠르지 않나 싶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의문이 해소되긴 했지만 불안은 여전했다.

혹시 내가 너무 말라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지 걱정되었고 그가 나를 정말 좋아하는지 자꾸만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주말을 지난 오늘.

정말 뜻밖에 행동으로 그간의 의구심을 날려주었다.

“더 드실래요?”

대표님이 내게 샐러드를 권했다.

닭가슴살, 새싹채소, 양상추, 파프리카 모두 본인이 싫어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많이 못 먹습니다.”

“……PD님.”

“네.”

“저 어디가 괜찮았어요?”

질문의 의도가 뻔하다.

그도 나와 같이 불안했던 거다.

생각해 보면 표현을 안 하기로는 나도 마찬가지라, 오늘 대표님이 왜 백우진 씨에게 질투를 느끼고 좋아한다는 말을 꺼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처음에는 남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입을 떡 벌린 모습이 귀엽다.

“이상한 말이나 하는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입이 더 커진다.

“그런데 같이 일하게 되면서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상처가 있음에도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아픔이 있어도 다시 일어설 줄 알고. 그런 자세를 곁에서 보며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목을 쓸어내리며 쑥스러워한다.

“처음 마음을 알게 됐을 때는 당황했지만, 결국 그 마음과는 별개로 어느새 마음에 두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천천히 알아가고 싶었습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와닿지 않는 모양이다.

“그때는 조금 멋있었습니다.”

“언제요?”

“홍당무 엔터테인먼트 사옥 앞에서.”

김서진을 도발했던 날.

한 대 맞아주려 했지만 무섭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당시 몸무게는 34㎏ 정도로 성인 남성이 마음먹고 해를 끼치려 하면 나로서는 저항할 수 없었다.

대낮이고 개방된 공간에다 호신용 스프레이도 휴대하고 있긴 했지만 떨리는 몸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이 사람을 지키고 이 사람과 내 관계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백승용차 하면서 끝끝내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은 정말 멋있었습니다.”

대표님이 입을 오물거리더니 소리내 웃는다.

“저도 처음에 살짝 헷갈렸어요.”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기는 처음이라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다.

“어떤 점이 헷갈렸습니까?”

“계약도 잘하고 기획도 잘하고 성실하고 똑 부러지고 가끔 엉뚱한 말을 해서 웃기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래서 좋아하나 싶었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럼 어떤 점이?”

“그냥 같이 있으면 좋더라고요. 얘기를 해도, 안 해도 그냥 좋더라고요.”

“…….”

“PD님이 말랐든 뚱뚱하든. 일을 잘하든 못하든. 그런 건 상관없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확신이 들더라고요.”

대표님의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침을 삼킨 모양이다.

“정말 좋아한다고.”

자기가 말해놓고 부끄러운지 닭가슴살 샐러드를 먹었다가 또 울상을 짓는다.

남자가 귀엽게 보이면 답도 없다고 하던데.

내가 그렇다.

“저.”

“네.”

“저 꼭 해보고 싶은 거 있는데. 괜찮아요?”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바라본다.

매번 이렇게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데 싫지 않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으니 그가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읏챠.”

“……?”

이상해서 눈을 떠 보니 내쪽에 있던 핸드폰을 챙겨 갔다.

“저 D+ 며칠 이거 엄청 해보고 싶었거든요.”

“…….”

유치원생인가?

“카톡 프로필에 해놔도 괜찮아요?”

남의 속은 모르고 싱글벙글 웃으며 묻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저도 설정하겠습니다.”

카카오톡을 열어 프로필 D데이 만들기에 들어갔다.

설정을 마치고 대표님 프로필에 들어가니 날짜가 잘못 설정되어 있다.

“날짜를 잘못 적으셨습니다.”

“어? 오늘 6월 5일 아니에요?”

“오늘은 6월 5일이지만 5월 8일로 설정해야 제대로 쁩니다. 이렇게.”

D+29가 적힌 내 프로필을 보여주니 대표님이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좁힌다.

“오늘부터 아니에요?”

“……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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