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114화
23. 내 집(4)
방송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어느새 묵은지가 돌아와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홍성일 대표하곤 얘기 잘 됐어요?”
“네. 며칠 내로 연락이 올 겁니다.”
“무슨 연락이요?”
표승재를 소개해 준 것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다는 뜻을 전달한 줄 알았다.
“다른 방식으로 사례받기로 했습니다.”
묵은지가 홍성일 대표와 나눈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WTV에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요구한 묵은지나 그 자리에서 수락한 홍성일 대표나 그릇이 크다.
혹은 저번 일이 그만큼 중차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거절도 직접 만나서 해야 하나 싶어서 의아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을 가져왔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요. 그건 아닌데.”
“방금 돈이 최고라고.”
“아, 그건 그냥 하는 말이죠.”
웃자고 한 말이긴 하나 아주 틀린 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 그냥 거절하는 걸로 생각해서 의아했어요. 엄연히 말하면 그 일 피해자는 은지 씨라서 제가 받기 민망하기도 하고.”
“같은 피해자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묵은지가 본인 때문에 내가 피해를 봤다고 생각하길래 우리 모두 피해자라 말한 적 있다.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저는 제 몫을 받았고 대표님도 응당 보상받아야 할 일입니다.”
김서진에게 받아내는 게 맞지 않나 싶지만 생각해 보면 그 사람 능력에 내게 뭘 해줄 수 있을 리 없다.
아마 묵은지도 그리 판단하고 모든 책임은 김서진에게 돌리고,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에는 빚을 만들어 이번 일을 처리했을 거다.
생각할수록 실리적인 해결이었다.
“근데 왜 WTV예요?”
“지상파가 가진 이점은 TV 매체의 영향력이 줄어든 지금도 유효합니다.”
같은 생각이다.
“그중 WTV는 대표님이 백반따라를 통해 얼굴을 알린 곳입니다. 백반따라 시즌2에 더불어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타 방송국 출연은 자연스레 이어질 겁니다. WTV가 믿고 쓰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아.”
WTV에는 백반따라 시즌2가 예정되어 있으니 다른 곳이 좋지 않을까 혹은 다른 곳을 경험하기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묵은지의 말이 옳다.
WTV 정도 되는 곳에서 3개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럴싸한 명함이 된다.
특히나 백반따라 외에 또 하나의 이력이 남는 거니 박상철 PD 덕분에 성공했다는 평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놀랐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요?”
“평소 하던 일입니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평소와 달리 시선을 피한다.
쑥스러워하는 것 같다.
“앞으로 반찬가게는 집. WTV는 직장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출근은 WTV로 하시고 벌어들인 수익은 집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유튜브를 잊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TV 출연이 주가 되어서는 대표님의 가장 큰 무기를 잃게 될 수 있습니다.”
“구독자.”
묵은지가 빙그레 웃었다.
“기존 구독자는 물론이고 최근 반 년 동안 유입된 분들도 기간 대비해서 친밀도가 높습니다. 본래 먹방 채널이었던 반찬가게가 토론, 정보 전달, 잡담 등 여러 콘텐츠를 소화할 수 있었던 원인은 그곳에 있습니다. 반찬가게의 콘텐츠는 음식이 아니라 대표님입니다.”
이 역시 묵은지가 정확히 알고 있다.
대형 채널이라도 기존 콘텐츠와 다른 영상은 조회 수가 높지 않은 경우는 흔하다.
채널의 정체성에서 벗어난 영상이기 때문이다.
어떤 채널을 구독하는 이유는 소재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리 채널이 경제 영상을 올리면 조회 수가 나올 수 없다.
그 채널을 찾아온 사람들은 요리를 검색해서 해당 채널을 방문하고 취향에 맞다고 생각하면 구독하게 된다.
그러니 요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영상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무시하게 되고 지속되면 구독을 취소하는 데 이르게 된다.
대체 채널은 많으니까.
정말 독특한 소재가 아닌 이상 비슷한 채널은 너무나 많고 지금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반면 채널 운영자에게 이끌려 구독한 사람들은 운영자가 무엇을 하든 호응을 잘해 주는 편이다.
소재가 아니라 운영자에게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과학 이야기를 하든 역사를 얘기하든 채널을 계속 찾게 된다.
그런 구독자를 코어 팬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감사하게도 내겐 그런 분이 많다.
실제로 먹방 비중을 줄일 때 조회 수가 줄어들진 않을까 많이 걱정했는데, 잡담이나 운동, 토론 같은 다른 형태와 소재를 다뤄도 시청자 이탈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안심했었다.
“그러니 TV는 어디까지나 반찬가게 구독자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출근은 어디든지 할 수 있으니 집 잘 지키란 말이네요.”
“그렇습니다.”
묵은지가 WTV를 직장으로 비유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현재는 WTV에서 인지도를 쌓지만, 어디까지나 나를 알리고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한 수단일 뿐.
출근은 NBC든 CBS든 어디든 할 수 있다.
묵은지가 말한 대로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집이다. 나를 좋아해 주시는 구독자들이 모인 반찬가게야말로 내 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
“언제까지 대표님이라고 할 거예요?”
묵은지가 날 빤히 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아침에 바꾸기로 했잖아요.”
“동의한 적 없습니다.”
“그럼 계속 그럴 거예요?”
“처리할 일이 남았습니다. 하실 말씀 없으시면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 말하고 있잖아요.”
“공과 사를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부끄러워서 그러죠?”
“아닙니다. 애도 아니고.”
“그럼 해보세요.”
“…….”
“못 하겠죠? 부끄럽죠?”
묵은지가 고개를 돌려 날 빤히 보다가 입을 움찔했다. 도발이 통했나 싶어 기대하던 차, 다시 모니터를 본다.
“왜 하다 말아요.”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진짜 그렇게 나올 거예요?”
“이렇게 실랑이 벌일 동안 일했으면 벌써 마무리하고 퇴근했을 겁니다.”
“퇴근 안 돼요. 말 안 하면 퇴근 못 해요.”
“빨리 퇴근해야 같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얌전히 기다리십시오.”
“……네.”
내 방으로 돌아와 유리창 너머로 사무실을 보니 묵은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 * *
묵은지를 데려다주는 길에 라디오에서 해묵은 깻잎 논쟁이 언급되었다.
-다음은 6475 님이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같은 직장을 다니는 커플입니다. 저번 주 팀 회식이 있어 고깃집에 갔습니다. 오랜만에 회식이고 팀 분위기가 좋아서 다들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데 맞은편에 앉은 분이 깻잎을 못 떼고 계시길래 떼어주었다가 싸우게 되었습니다. 깻잎 논쟁은 인터넷에서만 얘기하는 일 아니었나요? 제가 그렇게 잘못한 걸까요? 화를 어떻게 풀어주죠?
라디오를 껐다.
이제 막 사귀기 시작했으니 묵은지는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듣고 싶어 물었다.
“은지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깻잎 말씀이십니까?”
“네.”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크게 문제될 건 없어 보입니다.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 무조건 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건 논란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대답이 없어서 고개를 살짝 돌리니 날 노려보고 있다.
조금 무섭다.
“왜 무조건 잡아줘야 합니까?”
문제될 것 없다고 하더니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깻잎김치는 한 장, 한 장 양념 묻혀야 해서 만들기가 되게 까다롭거든요? 그래서 주는 식당도 많지 않고, 주더라도 조금만 줘요.”
“……그렇습니다.”
묵은지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수긍했다.
“그래서 아주 아껴 먹어야 하는 반찬이죠. 근데 그런 깻잎김치를 두 장이나 집어들었다? 그걸 못 떼서 곤란해한다? 이건 말이 안 돼요.”
“그럼 무엇입니까?”
“당연히 두 장 먹으려는 개수작이죠. 어딜 감히 귀한 깻잎김치를 두 장이나 먹으려고. 완전 여우짓이죠.”
“프핫핳하!”
깜짝 놀랐다.
묵은지가 이렇게 크게 웃은 적은 처음이다.
기분이 좋아져서 옆을 슬쩍 보니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있다.
“그래서. 떼 줘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럼요. 그런 거 오냐오냐 받아주면 깻잎 도둑이 명이나물 도둑 돼요.”
“하하하하!”
이런 걸 좋아했구나.
기억해 둬야겠다.
“그런 식으로 접근한 사람은 처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소중한 깻잎김치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네. 바꿔 생각해 보세요. 삼겹살 먹는데 누가 두 점 집어 봐요. 어휴. 살인 나요.”
묵은지가 이번에는 입꼬리만 올린 채 날 보았다.
3절은 안 하는 게 좋겠다.
“그나저나 걱정이에요. 어떤 프로그램인지는 얘기 못 들었죠?”
홍당무 엔터테인먼트에서 어떤 자리를 소개할지 모르겠다.
“걱정 마십시오. 문제는 많지만 유튜버를 어떻게 컨설팅해야 하는지 잘 아는 회사입니다. 이번 일을 소홀히 하진 않을 겁니다.”
그렇게 부조리한 경험을 했어도 본인이 몸 담고 있었던 곳이라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다.
혹은 그 문제의 원인을 회사가 아닌 개인 문제로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오형만이라고 했나?”
묵은지를 괴롭혔던 또 한 사람, 기획지원팀 오형만 팀장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홍성일 대표도 이번 일로 기획지원팀에서 누가 가장 문제였는지 파악했을 겁니다. 책임을 피할 순 없습니다.”
그래도 일이 제대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홍당무로부터 내쳐지고 형사입건까지 된 데다 언론에서도 몰매 맞은 김서진은 재기불능이 되어버렸다.
그런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오형만 역시 매니지먼트 업계에 발붙이고 살긴 힘들 것 같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묵은지의 집에 도착했다.
“오늘도 고생했어요.”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묵은지가 조수석 문을 열고는 내리지 않았다.
뭔가 잊은 게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는데 돌아본다.
“내일 봬요, 찬용 씨.”
“…….”
내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내려서 원룸 건물로 들어갔다.
단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이렇게나 기쁠 수 있나.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기분이 좋아서 노래가 절로 나온다.
이용이용이용-
사이렌 소리가 나서 놀라 길을 비켜주니 소방차 두 대가 지나갔다.
“불이라도 났나.”
사이렌 소리가 멀어져야 할 텐데 집으로 향하는 내내 소리가 들린다.
“어?”
집 근처에 차량 진입이 통제되어 있고 사람이 잔뜩 몰려 있어 일단 근처에 주차하고 건물로 향하니 자욱한 안개가 피어오르고 내 집 바로 윗집 창문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내 집.”
서둘러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 버튼을 누르고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이 들었다.
“내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