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팅데이 115화
23. 내 집(5)
자다가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떠보니 묵은지가 날 빤히 보고 있다.
“아. 은지 씨.”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옷도 그대로고. 여기서 주무셨습니까?”
일어나 앉으려는데 온몸이 뻐근하다. 의자를 붙여서 잤더니 이곳저곳 안 쑤시는 곳이 없다.
“어제 불이 났어요.”
“네?”
“가 보니까 윗집에서 불이 나서 난리도 아니더라고요. 정리되고 올라가 보니까 바닥은 물바다지, 탄내는 진동을 하지. 어휴.”
“다친 곳은 없습니까?”
“네. 하아암.”
하품이 절로 나온다.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할지도 모르고. 누전될 수도 있어서 불도 못 켜고 해서 아무것도 못 했어요.”
“그렇다고 여기서 주무시면 어떡합니까.”
“호텔 가기엔 돈 아깝고 해서요.”
“돌아오면 되지 않았습니까.”
묵은지가 조금 화를 냈다.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잠들었을 것 같아서.”
“바봅니까? 제가 그런 것 하나 이해 못 하겠습니까?”
묵은지가 날 일으켰다.
“택시 타고 제 집으로 가서 눈 좀 붙이고 오십시오. 운전하지 말고 꼭 택시 타고 가십시오.”
“아니에요. 이따 집에 다시 가봐야 하고 방송도 해야 하니까. 집주인한테도 연락해 봐야 해요.”
묵은지가 숨을 푹 내쉬더니 내 머리를 안고 등을 쓸었다.
“좀 부끄러운데 효과는 좋네요.”
“시끄럽습니다.”
묵은지가 떨어져 말했다.
“오늘은 쉬는 게 좋겠습니다. 커뮤니티에 공지 올리십시오.”
씻지 못한 건 둘째치고 정신이 하나도 없다. 몸도 쑤시는데다 처리할 일도 많아 묵은지 말대로 방송은 하루 쉬는 게 좋겠다.
“잠깐 켜서 상황 설명해야겠어요.”
“네. 저는 청소 가능 업체가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가능하면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는지도.”
“고마워요.”
화장실로 가서 세수랑 양치만 한 뒤 방송을 켰다.
└?
└이 시간에 웬일?
└무슨 공지?
└머리 까치집
└ㅂㅎ
└반하
└왤케 피곤해 보여
“안녕하세요. 오늘 방송 못 할 것 같아서 잠깐 상황 설명 좀 하려고 켰어요.”
말하는 와중에도 또 하품이 나온다.
“어제 윗집에서 불이 났어요. 잠깐 영상 보여드릴게요.”
핸드폰으로 찍은 화재 영상을 컴퓨터로 옮겨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안 다쳤어?
└한숨도 못 잤겠네
└헐
└꽤 크게 났는데?
└그 와중에 그걸 찍었넼ㅋㅋㅋ
└유튜브에 미친자
└아니 괜찮아?
“몰라. 나도 정신 차리고 보니 찍고 있더라고. 다친 데는 없고 나중에 집에 들어가 보니까 난장판이더라. 냄새도 심하고.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어요. 네.”
밤 10시 조금 넘어서 발생했는데, 아주 늦은 밤은 아니라 사람들이 깨어 있었고 화재 경보기도 잘 작동했으며 무엇보다 소방관들이 진압을 잘해줘서 인명 피해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다.
“그래서 오늘 어쩌면 내일까지 제대로 방송하기 힘들 것 같아요. 정리되는 대로 커뮤니티에 공지 올릴게요. 자, 끝. 다들 나가세요. 이 시간에 방송 보면 회사에서 짤려요.”
└회사 안 다니지롱
└점심시간임. 바보야.
└지가 켜놓고 나가래ㅋㅋㅋ
└놀랐겠다. 잘 정리하고 천천히 와. 유튜브 복습하고 있을게.
└윗집에 피해보상 청구해.
└아저씨 힘내요
커뮤니티에도 하루이틀 정도 휴방한다는 소식을 적어두고 나오니 묵은지가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어때요?”
“화재 청소 업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건당 평균 천만 원 정도라고.”
“예?”
“집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따라 다를 테지만 특수 작업이라 비용이 많이 드는 모양입니다.”
“아, 큰일이네.”
재계약까지 한 달 남았는데 이거 계약 연장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윗집 세입자의 과실 혹은 부주의로 인한 화재인지가 중요해 보입니다. 이건 조사가 이뤄진 뒤에 알 수 있는 문제고 피해액 산정도 정확히 해야 합니다.”
“피해액이 얼마나 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던데.”
“많으면 변호사와 상담해 보는 게 좋고 아니라면 보험사가 진행하는 대로 처리하면 됩니다.”
“월세인데 화재 보험을 들었을까요?”
“음.”
흔치 않은 일이기도 하고 찾아볼 시간도 없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상담 한번 받아야겠어요. 알아봐 줘서 고마워요.”
“이제 들어가 쉬십시오. 운전하시면 안 됩니다.”
“어……. 그런데 정말 은지 씨 집에 가도 돼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처음 가는 거니까. 뭔가 집주인 없는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게 그렇잖아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냥 호텔에서 지내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요.”
“집 정리될 때까지 계속 호텔에서 지내려고 하십니까?”
부우웅-
핸드폰이 울려서 보니 차지찬이다.
“어, 형.”
-야, 불 났다며.
“누구한테 들었어?”
-상규가 네 방송 보고 말해주더라. 다친 덴 없어?
안상규 PD가 내 공지 방송을 본 모양이다. 예고도 없이 켠 방송을 봤다니 조금 감동이다.
“응. 아, 그런데 복잡해. 청소도 알아봐야 하고 피해액도 알아봐야 하고 할 게 너무 많네.”
-그러게. 잠은 어디서 자냐?
“그것도 모르겠어.”
-우리 집 와.
“엉?”
-오라고. 해결될 때까지 그냥 지내.
“그래도 돼?”
-그럼 인마, 내가 이런 걸로 장난 치겠냐. 비밀번호 보내놓을 테니 알아서 다녀.
“형.”
-왜?
“나한테 뭐 잘못했어?”
-뭐?
“아니면 뭐 잘못할 예정이야?”
-이 자식이. 내가 너한테 나쁜 일 한 적 있냐?
“여의도에서 구디까지 걸어가게 하고. 일주일 내내 잠도 못 자게 하고. 이번 달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가게 했잖아.”
당뇨 때문에 운동을 막 시작할 무렵 여의도에서 구디까지 그 추운날 걸어가게 했던 일은 잊을 수 없다.
편집자가 아프다고 3명이 할 일을 일주일 동안 몰아줬던 일도 잊을 수 없다.
게다가 3주 뒤에는 부산까지 배낭 매고 걸어가야 할 판이다.
-어. 상규야, 뭐? 누가 나 찾는다고? 급해? 어어! 갈게! 찬용아, 나 일 있어서 끊는다.
“없는 거 알아.”
말을 마치기도 전에 통화가 끊겼다.
“차지찬 씨입니까?”
묵은지가 물었다.
“네. 정리될 때까지 자기 집에서 지내래요.”
묵은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왜요?”
“아닙니다.”
묵은지가 의자를 돌려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 * *
“그래서 연장 안 하기로 했어. 당장 내일은 집 찾아야 해.”
오늘 집주인을 만났다.
다음 달 월세를 받지 않고 피해 보상도 해준다곤 했지만, 수리와 청소가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어차피 다음 달까지 계약된 거라 이사를 가기로 했다.
집주인이 친절해서 피해 보상은 문제 없이 받을 예정인데 물건을 새로 사고 버리고 고치고 빨고 이사하기까지 당분간 정신이 없을 것 같다.
“고생했다. 천천히 알아 봐.”
차지찬이 리클라이너 소파에 눕다시피 앉은 채 말했다.
“근데 이거 좋다.”
“맞나.”
나도 소파를 기울였는데 생각 이상으로 편해서 이사갈 집에 소파를 하나 살까 싶다.
“집은 어떻게 알아보게?”
“모르겠어. 잠깐 찾아보니까 나 지금 집이랑 비슷한 곳 월세가 100만 원이 넘더라.”
“비싸네. 근데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잖아.”
“그렇긴 해도 아껴야 빨리 내 집 사지.”
“음. 기특하네.”
차지찬이 레몬즙을 넣은 탄산수를 마셨다.
“전세는?”
“모르겠어. 요새 뉴스에 전세 문제 엄청 많이 나오잖아. 무서워서 못 하겠던데.”
“그래? 바빠서 뉴스를 못 봤네.”
“어. 공인중개사 끼고 알아볼 거 다 알아보고 들어갔는데도 문제가 있더라니까?”
“공인중개사를 꼈는데 문제가 있다고?”
“어.”
“제정신이 아니네. 하여튼 직업 이미지 망치는 놈들이 꼭 있다니까.”
차지찬이 타 준 탄산수를 마셨다.
이걸 대체 뭔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
“아예 사는 건 어때?”
“에이. 지금 어떻게 사.”
“돈이 문제야?”
“돈도 돈인데 지금 집 아무도 안 사. 더 떨어질까 봐.”
“그래도 많이 떨어지지 않았나?”
“그런가?”
사실 서울 집값은 잘 모른다.
언젠가 돈 많이 모아서 사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범위도 원체 넓고 무엇보다 살 수 있단 생각을 못 했기에 대강 5억 정도 있으면 살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봐 봐.”
스마트폰을 꺼내 신림동 아파트 매매 매물을 찾았다.
5억 원 정도의 매물이 많다.
“부담스러우면 오피스텔 들어가고.”
“살 거면 아파트가 낫지. 나중에 결혼할 거 생각하면.”
오래된 아파트는 평당 1,600만 원에 26평인 곳도 있다.
“여기 4억 3천인데 나 사는 동네네. 오다가다 본 적 있는데.”
대답이 없어 고개를 돌리니 차지찬이 굳어 있다. 손으로 눈앞을 휘저으니 말까지 더듬으며 묻는다.
“너 은지 씨랑 만나?”
“응.”
“언제부터?”
“이번 주 월요일.”
“근데 그걸 왜 지금 말해!”
목청도 좋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다.
“깜짝이야.”
“어떻게? 어? 어떻게 됐는데?”
“뭘 어떻게 돼. 그냥 좋아한다고 했지. 은지 씨도 같았고.”
“이야. 짜식. 자세히 좀 말해 봐.”
“진짜 그게 전부야.”
“은지 씨는 이미 너랑 사귀고 있다고 알던데?”
“어?”
“어떻게 알았냐고. 아, 빨리 말해. 궁금해 죽겠다.”
“그걸 왜 형이 알고 있어?”
“어? 뭘?”
“은지 씨랑 나 사이에 오해가 있던 거. 그거 형이 어떻게 아냐고.”
“은지 씨가 얘기했으니까.”
“뭔 소리야?”
“백승용차 할 때 얘기하더라. 사귀고 있는데 안 믿는다고 해서 직접 말하는 거라고. 잘 부탁한다고.”
“……언제?”
“마지막 주?”
“근데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탄산수 더 마실래?”
“아니. 왜 얘기 안 했어?”
차지찬이 천천히 시선을 피하더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아. 오늘 하체해서 그런가 힘이 없네. 나 먼저 잔다.”
“거기 서.”
차지찬이 멈칫했다.
“왜 알고도 얘기 안 했냐고.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했는지 알아? 아니. 잘 알잖아.”
“야, 그거 내가 하자고 한 게 아니라.”
“그럼 누가 얘기하지 말자고 작당질한 거네?”
“찬용아. 형이야. 응? 형이야. 릴렉스.”
“형이라면 진정하겠어?”
“못 하지.”
“빨리 말해. 누구야. 주지승이야 백우진이야.”
“야, 내가 의리가 있지 아무리 그래도 그걸 이르겠냐.”
“이래도?”
TV 옆에 놓인 레고에 오른손을 얹으니 차지찬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야, 손 떼.”
“형한테 달렸어. 이 멋진 우주비행선이 계속해서 위용을 자랑할지 아니면 처참히 부서질지.”
“인마, 그거 만드는 데 3달 걸렸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니 차지찬이 안절부절못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지승이 형이 그런 말할 사람은 아니다.”
“아~ 백우진?”
“난 아무 말 안 했다?”
“그래. 솔직하게 공범을 고발한 점과 숙박비를 참작하겠어.”
레고에서 손을 떼니 차지찬이 다가와 날 밀치고 레고를 닦았다.
백우진 만나기만 하면 볼따구를 마구 주물러 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