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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팅데이-116화 (116/120)

치팅데이 116화

24. 짊어진 사람(1)

목요일.

사무실 문 옆에서 잠복해 있다가 백반토론을 하러 온 백우진을 뒤에서 덮쳤다.

“뭐야. 왜 이래. 어?”

“바른대로 불어.”

“그니까 뭘? 아! 하지 마학핰핳!”

“빨리 안 불어?”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두고 한참을 간지럽혀도 모른 체하길래 볼을 잡아 늘였다.

“지찬이 형한테 다 들었어.”

“몰?”

“나한테 은지 씨 얘기 하지 말자고 했다며.”

머리를 돌려 묵은지를 향하게 하니 그제야 본인의 죄를 시인했다.

“달 모태씁니다.”

“잘못인 건 알아?”

“히거 돔 나누면 안 대?”

볼을 놓아주니 양손으로 볼을 감싼 채 쭈그려 앉았다.

“왜 그랬어.”

“형이 괘씸해서.”

“이게.”

다시 볼을 잡으려던 차 묵은지가 뜻밖에 말을 꺼냈다.

“괘씸하긴 합니다.”

“그쵸?”

“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우진 씨 덕분에 저희가 많이 돌아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괘씸합니다.”

백우진이 묵은지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난 연애전문가로서 조언을 했을 뿐이야.”

“웃기지 마!”

“흐핳핫핫하! 그만! 아! 그만!”

직성이 풀릴 때까지 간지럽힌 뒤에 놓아주니 백우진이 바닥에 누워 꿈틀댔다.

“이제 좀 시원하네.”

“후회할 거야.”

“전혀.”

백우진이 꾸물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은인한테 진짜 이래도 돼?”

“은인은 무슨. 그동안 정을 생각해서 이 정도로 봐준 거야.”

“하아. 그래. 이렇게 나오면 나도 몰라.”

“얘가 뭘 믿고.”

“집 구한다며?”

“어?”

“우리 삼촌이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집 내놓는다고 하길래 형 얘기 했는데 없던 일로 하자.”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삼촌은 뭐 땅 파서 장사하시냐?”

“땅 파는 거나 다름없지.”

“어?”

“아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그냥 없던 일로 해.”

“사랑해.”

백우진을 끌어안았다.

“뭐래. 이미 맘 떠났어.”

“어딘데?”

“이미 마음 떠났다니까? 알아서 뭐 하게.”

“아니. 네 마음 떠난 곳 어디냐고. 가지러 가게.”

팔에 힘을 주어 더욱 세게 안으니 백우진이 몸부림 친다.

“아, 징그러! 이것 좀 놓아!”

“에이. 왜 이래. 우리끼리.”

“아파! 은지 씨, 이 형 좀 말려봐요!”

“…….”

고개를 드니 묵은지가 나와 백우진이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손을 풀었고 백우진도 묵은지의 눈치를 본다.

“안에서 천천히 말씀 나누십시오.”

묵은지가 본인 자리로 돌아갔다. 키보드 소리가 유난히 요란하다.

조용히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은지 씨 화난 거 같지?”

백우진이 물었다.

“어. 왜지?”

“몰라.”

한동안 고민해 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자세히 얘기해 봐. 뭔데?”

“우리 삼촌 사업하는데 요즘 자금이 안 돌아서 고민이거든. 흑자는 나는데 결제가 안 돼서 부도나게 생겼대.”

경제가 안 좋다는 말을 계속 듣긴 했지만 내 주변에도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그래서?”

“집이 두 채라 하나 급처하고 싶은데 요즘 집 사려는 사람이 없잖아? 그렇다고 아예 헐값에 내놓기도 그렇고. 파는 의미가 없으니까.”

“응.”

자금을 융통하려고 집을 파는 거니 시세보다 한참 싸게 팔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형 이사한다고 하길래 얘기 꺼냈지.”

“얼만데?”

“여기.”

백우진이 부동산 사이트에서 아파트 하나를 보여주었다.

공급면적이 100㎡의 아파트다. 주변에 초중고가 다 있고 공원도 있어 입지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구축이긴 해도 평당 1,800만 원 수준이라 저렴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주변 집값에 비해서다.

“야, 내가 이 돈이 어딨냐?”

“빌리면 되지.”

“돈은 뭐 그냥 빌려줘? 됐어. 됐어.”

잘은 모르지만 소득이 높으면 디딤돌 자격 요건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빌려줄게.”

“뭐?”

“무이자로 빌려줄 테니까 사. 집 괜찮아.”

“잠깐.”

당황스럽다.

이렇게까지 문제가 쉽게 풀리는 것도 의아하지만, 대체 뭘 믿고 내게 돈을 빌려주는지 알 수 없다.

친하니까 해준다는 범위를 한참 넘었다.

“얘가 진짜 큰일날 애네? 너 이러면 안 돼.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정말이야.”

“왜?”

“왜긴 왜야? 야, 어떤 미친놈이 돈을 억대로 빌려줘?”

“형이니까.”

“답답하네. 친하고 자시고 그런 문제가 아니야. 정신 차려.”

“차용증 써. 카톡 기록으로도 남기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너 내가 그 돈 갚고 싶어도 못 갚으면 어쩌게.”

“왜 못 갚아?”

“당장 한 달, 아니,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우리 직업이야. 지금 괜찮다고 막 그러면 안 돼.”

“망하면 우리 회사에 취직해. 돈 많이 줄게.”

“이 자식이 진짜. 그만해. 못 들은 걸로 할 거야.”

“내 말대로 해. 어차피 지금 전세 구하기도 애매하잖아.”

“월세 사는 게 낫지! 내가 너한테 돈을 어떻게 빌려!”

나도 힘들게 살았지만 백우진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녀석이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어떤 상처를 품고 사는지 아는 나로서는 손을 내밀 수 없다.

“너 내 앞에서 울면서 말했어. 친구라고 믿었는데 돈 빌려주고 나서 연락 끊겼다고.”

불과 3년 전 일이다.

나만큼이나 찢어지게 가난했던 백우진이 막 큰 돈을 벌기 시작하자 주변에서 녀석을 가만두지 않았다.

유명 유튜버가 됐다는 소식에 온갖 사람이 부탁하고 애원하고 협박하는 상황에도 소신을 지키던 백우진도 20년지기 가장 친한 친구의 눈물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 당시 가지고 있던 전 재산 3,000만 원을 빌려주었다.

3달 뒤에 적금 타면 갚는다는 말을 믿으며 건넨 돈은 지금도 돌려받지 못했다.

9,000만 원이 찍혀 있던 적금 통장은 위조된 것이었고 빌려간 돈은 주식과 도박으로 탕진하곤 배 째란 식으로 나왔다.

백우진은 평생을 함께한 친구도 돈도 잃어 한동안 크게 낙담했었다.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진짜 한 마디만 더 하면 그 입 꿰매버린다.”

“나 제일 힘들 때 형이 도와줬잖아. 형 없었으면 우지니어스 이렇게 못 컸어. 나도.”

“그건 맞지.”

3~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떠벌대는 영상을 말이 되게 편집하고, 오만 잡동사니로 가득했던 채널에 콘셉트를 만들어 정리했다.

짐꾼처럼 순식간에 성장하진 않았지만 차곡차곡 구독자를 모으다가 2년 전부터 크게 사랑받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아, 말 좀 들어라.”

“듣긴 뭘 들어! 나 진짜 화낼 거야. 입 다물어.”

* * *

일요일.

백승용차 이후로 주말마다 모여 잡담을 떠드는 게 일상이 되었다.

오늘도 아침에 모여 채널 운영이나 업계 돌아가는 이야기, 혹은 저 하고 싶은 얘기를 나누었다.

차지찬은 웬일로 운동 얘기도 없이 가만 앉아 있고 말하길 좋아하는 백우진도 얌전하다.

나도 말 없이 있는데 주지승이 우리 셋을 둘러보더니 묻는다.

“오늘 너희 좀 이상하다?”

“…….”

“특히 찬용이랑 우진이. 너희 무슨 일 있었어?”

“야, 그 일 때문에 아직도 그러는 거야?”

차지찬이 묵은지와의 일을 감춘 일을 언급했다.

대답하기 싫어 다른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지찬이 형 괜찮아?”

“안 괜찮아…….”

“지찬이는 왜 이래.”

주지승이 물었다.

“걸어서 저 하늘까지. 일기예보 때문에 비상이래.”

일기예보를 보니 올 여름은 비가 많이 내린다고 한다.

행사명 그대로 걸어서 하늘, 아니, 부산까지 가는데 비가 온다고 하니 행사를 주최하는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괜찮아!”

차지찬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말했다.

“와 봤자 얼마나 오겠어. 우리 일정 보름이야. 설마 보름 내내 오진 않겠지.”

차지찬이 애써 괜찮은 척했다.

“보름은 무슨. 한 달 내내 온다던데.”

백우진이 말했다.

“그렇게 많이 와?”

주지승이 물었다.

“봐 봐.”

백우진이 스마트폰으로 일기예보를 찾아 보여주었다.

‘걸어서 저 하늘까지’ 출발일인 6월 30일 금요일부터 부산 도착 예정일인 7월 14일까지 단 하루를 제외하고 전부 비 소식이다.

주지승이 상체를 내밀어 일기예보를 보다가 눈을 비빈다.

“이거 심한데? 7월 내내 오네.”

주지승이 혀를 내둘렀다.

“일기예보 그거 안 정확해. 날씨 맞추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래. 어? 괜찮아. 괜찮아.”

괜찮다고 하지만 평소답지 않게 차지찬의 목소리가 잔뜩 떨렸다.

“진짜 오면 어쩌게?”

백우진이 물었다.

“200명이나 참가하잖아. 그냥 안 오길 바라고 진행하는 건 도박 아니야?”

백우진의 말에 주지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워낙 큰 자본이 들어가는 행사인데다 참가 인원도 어마어마하다. 대비책을 확실히 해야 한다.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차지찬이 본인 스마트폰으로 일기예보를 검색했다.

이미 몇 번이고 확인했을 텐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다.

“그래도 야외 행사니까 비 올 때 대비책 같은 거 세웠지?”

백우진이 물었다.

“했지. 근데 누가 이렇게까지 비만 올 거라고 생각해.”

“비만?”

세 사람이 동시에 날 봤다가 다시 시선을 옮겼다.

정체기가 길어져서 비만이란 단어가 유독 귀에 꽂힌다.

“비가 와도 조금만 오면 어떻게 걷겠는데. 우비 준비했어?”

“어…….”

현실을 부정하듯 일기예보를 찾던 차지찬이 힘없이 답했다.

“우비도 문제야. 종일 비 맞은 우비를 언제 말려.”

“그치. 습해서 잘 마르지도 않겠다.”

“일회용품 쓰면 200명, 아니, 제작진 우비까지 보름치를 산다고? 그건 또 어떻게 버리게?”

백우진이 우려사항을 제시했다.

“또 카메라야 비닐로 어떻게 감싸서 막는다 쳐도 다른 장비는 어떡하게?”

“쓰읍. 그러게. 보름 내내 비 오는 곳에서 촬영하면 장비가 남아날까.”

주지승도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방송국에서 제작하는 거니 비 오는 날 대비는 되어 있을 수도 있을 텐데 사람이 문제야. 비 맞으면서 하루에 40㎞씩 보름이나? 암만 좋은 의미라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조용히 좀 해!”

차지찬이 버럭 소리 치자 백우진이 두 팔을 들어올리며 기겁하다 내게 기대었다.

떨떠름 하게 밀어서 자세를 고쳐 잡아주고 입을 열었다.

“어려운 거야 지찬이 형도 알지. 저번 주부터 이걸로 계속 회의했대.”

주지승과 백우진이 차지찬을 안쓰럽게 봤다.

“근데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이 투입됐잖아.”

차지찬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

“맞네. 이거 멈추고 싶다고 해서 멈출 수 있나?”

백우진과 주지승도 이해한 모양이다.

‘걸어서 저 하늘까지’는 비가 오든 오지 않든 이미 멈출 수 없는 단계를 지나섰다.

만약 모든 일을 취소한다면 어마어마한 위약금이 발생할 거다.

“아, 진짜 사기 치지 마!”

차지찬이 내려놓은 핸드폰에 7월 달력 내내 비구름이 그려져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날씨 섹션 제공(2023년 5월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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