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치팅데이-118화 (118/120)

치팅데이 118화

24. 짊어진 사람(3)

“그래? 어쩔 수 없지.”

-죄송해요, 형.

“아니야. 그럼 다음에 한번 보자.”

-네.

차지찬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며 책상을 짚었다.

아침부터 수십 통을 돌렸지만 단 한 사람도 긍정적인 대답을 주지 않았다.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호응해 주지 않아서 힘들지는 않았다.

차지찬을 절망하게 만든 것은 이 일이 감정에 호소할 사안이 아님을 본인이 너무나 잘 안다는 점이었다.

보름이나 개인방송 일정을 비우면서도 부산까지 걸어가려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모두 WTV와 넷플릭스에 출연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기꺼이 함께하기로 했는데, 이제는 제작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WTV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제작사 레터럴에서는 위약금을 받지 않을 테니 다른 업체를 알아보길 권했다.

줄을 이루었던 후원사들도 차지찬을 높이 산 WH전자만이 남았을 뿐, 모두 다음을 기약했다.

“후우.”

차지찬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은 없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걸어서 저 하늘까지’가 취소되고 막대한 위약금을 물게 된다면.

개최조차 못하고 수포로 돌아간 상황은 전 국민의 뇌리 속에 남을 터였다.

차지찬이 다음에 좋은 기획을 꺼내온다 해도 큰 행사를 시작조차 못한 사람이란 오명이 따를 터였다.

기회는 성공한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차지찬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사장님.”

안상규 PD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

차지찬은 대답할 힘도 없었다.

“141분 연락 모두 돌렸습니다.”

차지찬은 책상을 짚고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말해.”

“17분은 연락이 안 돼서 문자 남겨두었고 124분과 통화되었습니다. ……23분 참석하겠다고 합니다.”

안상규 PD가 힘겹게 상황을 전달했다.

WH와 약속한 100명을 어떻게든 채우고자 1차 지원자에게 모두 전화를 돌렸지만, 참가자 수는 점점 줄었고 대책회의를 하루 앞둔 현재.

기어이 대부분의 사람이 손을 놓아버리는 데 이르렀다.

차지찬도 안상규 PD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침묵이어진 끝에 차지찬이 입을 열었다.

“중학생 3학년 때 우리 반이 꼴등이었어. 8반까지 있었는데 1학기 중간고사, 기말고사 전부 꼴등이었어.”

“…….”

“공부는 드럽게 못 하면서 기분이 나쁘더라고? 담임까지 꼴통 새끼들이라고 하니까 빡치는 거야. 뭐 하나는 보여주고 싶어지더라.”

“…….”

“그래서 반 애들한테 얘기했어. 우리 체육대회는 1등하자고. 여름방학에 모여서 연습하자고.”

“…….”

“될 리가 있나. 귓등으로도 안 듣지. 그래도. 음. 그래도 반 전체는 아니지만 친했던 애들이랑 같이 아침마다 모여서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고 했어.”

“…….”

“근데 첫 날에 한두 시간 운동하고 PC방 가자는 거야. 1등 해야 하는데. 그래서 더 해보자, 더 열심히 해보자 말했지. 근데 귀찮다더라. 1등 하고 싶은 거 아니었냐고 물으니까 해서 뭐하냐고 그러더라.”

차지찬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지금도 혼자 극성이었나 보다.”

안상규 PD는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몇 마디 말로 차지찬의 마음이 풀릴 리 없었다. 위약금이나 이미 지불된 돈 같은 현실적인 문제는 더더욱 그러했다.

“상규야.”

“네.”

“그땐 납득이 안 돼서 싸웠어. 자존심도 없냐. 1등 한번 해보자 뭐 그런 식으로. 원망도 했고. 근데 지금은 알겠더라. 각자 사정이 있잖냐. 딸린 식구들도 있고.”

“사장님…….”

“그래도. 그래도 난 하련다. 우리가 뭐 언제부터 대기업 후원받고 그랬냐? 너 처음 입사했을 때 기억하지?”

사무실 얻을 돈도 없어 차지찬이 사는 원룸에서 함께 살며 현재의 구독자 240만 명의 짐꾼 TV를 키워냈다.

“첫 번째.”

차지찬이 목에 힘 주어 말했다.

“이번 일 꼬꾸라지면 다음은 10년 뒤야.”

안상규도 같은 생각이었다.

한 번 무너진 신뢰는 쉽게 돌이킬 수 없었다. 5년 동안 쌓아온 이미지로 진행했던 일이니, 그 두 배는 걸린다는 비유적 표현이었다.

“두 번째. 246만 7천 명이 보고 있어. 내 재산은 그게 전부야. 4억 잃기 무서워서 전 재산 날리는 병신도 있냐?”

안상규가 마른침을 삼켰다.

짐꾼이 이번 일에 투자한 비용은 4억 1,000만 원이었다.

당장 짐꾼 채널의 존망이 달린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사내 유보액이 5억 원이었고 그중 대부분을 사용했으니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대처할 여력이 없었다.

누군가는 4억 원을 버린다고 멍청하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차지찬은 누구보다도 상황을 냉정히 보고 있었다.

차지찬은 건물이라든가 현금이 아닌 구독자야말로 짐꾼의 재산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걸어서 저 하늘까지’는 누가 봐도 취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실망하는 사람은 나오게 마련이었다.

“없죠.”

“그래. 이해하는 사람도 실망하는 사람도 있겠지. 다만 내가 약속을 안 지킨 사람으로 남는 건 타격이야.”

“네.”

“세 번째. 500명이 기다리고 있어.”

“…….”

기부를 약속한 단체에서 생활하는 이들이었다.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안상규는 대답할 수 없었다.

바보 같다면 바보 같고 대단하다면 대단한 이유였다.

“형이 너랑 우리 새끼들 굶기진 않을게. 안 되면 뭐 이거 확 갖다 팔아버리지 뭐.”

차지찬이 방을 훑어보며 말했다.

차지찬과 짐꾼의 지난 5년이 고스란이 녹아든 5층짜리 건물이라도 팔겠다는 말에 안상규 PD도 마음을 굳혔다.

“그러니 이번에도 나 믿어. 따라 와.”

“그럼요.”

차지찬이 씩 웃었다.

“내일 다과 많이 준비해. 혹시 알아? 그럴싸하게 해두면 찾아들 올지.”

“네.”

* * *

2023년 6월 17일 토요일.

짐꾼 사옥 세미나실에 절망감이 감돌았다.

‘걸어서 저 하늘까지’ 대책 회의를 10분 앞둔 시점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탓이었다.

어제 WTV 편성표에 ‘걸어서 저 하늘까지’가 삭제되었음이 알려지면서 그나마 참가하겠다던 23명의 유튜버들도 어제 밤과 새벽, 아침에 걸쳐 불참 의사를 밝혔다.

행사 시작 시간이 다가오자 혹시나 싶어 찾았던 스폰서들이 줄지어 퇴장하기 시작했고 짐꾼 직원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실장님.”

WH전자 직원이 김기태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저희도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김기태 실장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WH전자는 최근 스마트폰 구매 경향을 바꿔보고자 노력 중이었다. 어리거나 젊은 세대가 점차 WH의 스마트폰을 멀리 함에 위기감을 느낀 탓이었다.

여러 방면으로 대응책을 마련하고 진행하던 중, 김기태 실장의 눈에 차지찬이 들어왔었다.

젊은 패기, 성공, 선한 영향력 등 김기태가 바라는 모든 이미지에 부합했다.

때문에 차지찬을 눈여겨보던 중 백승용차가 대박을 터뜨리며 김기태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는 ‘걸어서 저 하늘까지’로 WH전자가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다고 윗선을 설득했고.

WTV 편성에도 빠졌음에도 일말의 가능성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인사나 하고 가지. 그간 같이 일했는데.”

“네.”

김기태가 직원을 데리고 차지찬에게 다가갔다.

“지찬 씨.”

“실장님.”

“유감입니다. 아쉽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지금까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기태는 눈을 의심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차지찬은 씩 웃고 있었다.

“일이 잘 풀렸나 보군요.”

김기태가 위약금 이야기를 돌려 말했다. 막대한 피해를 막아내거나 일부 줄였으니 저리 여유로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엄청나게 망가졌죠. 200명이서 출발하려던 일을 혼자 가게 생겼으니까요.”

“예?”

차지찬은 씩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잘못 듣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제작이 취소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저 원래 혼자 했습니다.”

“…….”

“아쉽긴 해도 원래 하던 대로 돌아온 것뿐이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무모했다.

‘혼자서라도 진행해서 동정표라도 얻어낼 생각인가?’

김기태는 차지찬의 선택이 요행에 기댄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는 그 누구도 차지찬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터였다.

“오. 제로콜라.”

그때 적막한 세미나실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소리를 친 것도 아닌데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반찬?”

차지찬이 김기태 옆으로 얼굴을 빼 반찬용을 불렀다.

반찬용은 손을 들어 보여 인사하곤 김기태와 눈을 마주쳐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일하는 중이야?”

반찬용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

차지찬이 명확히 답을 못하자 김기태가 한 발 물러섰다.

“말씀 나누시죠.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지찬과 김기태가 악수를 나누었다.

차지찬이 반찬용에게 다가갔다.

“뭐야?”

“뭐긴 뭐야? 오늘 오라며.”

“안 온다며.”

“내가?”

차지찬이 잠시 고민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연락을 돌렸는데 반찬용에게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일요일에 모여서 나눈 대화로 반찬용이 참가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탓이었다.

“맨날 의리 찾더니 꼴이 말이 아니네. 이게 뭐야? 우리 둘이 가?”

“반찬…….”

“방 따로 써. 어? 나 형이랑 같이 못 자.”

“이 자식!”

차지찬이 폴짝 뛰어올라 반찬용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아! 이거 놔!”

“이 귀여운 자식. 어? 귀여워 죽겠네.”

반찬용의 목을 조르며 기뻐하던 차지찬의 시야에 막 세미나실로 들어오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

“상규 형, 마가렛트 없어?”

백우진이 문 앞에 서 있던 안상규 PD한테 물었다.

“어, 응.”

“다과 준비하는데 어떻게 마가렛트가 없어? 별꼴이야.”

백우진이 빈츠를 챙겨 자리에 앉았다.

“백우진.”

차지찬이 반찬용의 목을 감았던 팔을 풀고는 백우진을 불렀다.

백우진은 그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빈츠를 먹으며 스마트폰을 봤다.

“형.”

차지찬이 시선을 옮겼다.

백우진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주지승은 손을 들어 보인 뒤 씩 웃을 뿐이었다.

“어떻게 왔어?”

차지찬이 주지승에게 물었다.

“어떻게 오긴. 같이 가려 왔지. 자리 없어?”

“없긴 뭐가 없어. 널렸구만.”

백우진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일 있다며.”

차지찬이 주지승과 백우진에게 물었다.

“몰라. 아, 빨리 시작해. 시간 없어.”

툴툴거리는 백우진을 보던 차지찬이 씩 웃더니 반찬용에게 했던 그대로 헤드락을 걸었다.

“아! 아! 왜! 왜왜왜왜!”

“이거 왜 이렇게 귀엽지? 어?”

“지승이 형! 형! 살려줘!”

“찬용아, 제로콜라 어디 있었어?”

“저기. 가져다 줄게.”

“다른 것도 있어?”

“나랑드 사이다.”

“나랑드 좋지.”

“악! 차지찬!”

“지찬아, 너도 나랑드 마실래?”

반찬용이 들어온 순간 걸음을 멈추었던 김기태는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진 세미나실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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