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치팅데이-119화 (119/120)

치팅데이 119화

24. 짊어진 사람(4)

“그래서 진짜 걸어갈 거야?”

백우진이 물었다.

“진짜 걸어가지.”

“왜?”

“왜긴.”

차지찬이 잠시 말문이 막혔다.

사실 이유는 차고 넘쳤다.

거의 집에서만 활동하는 인터넷 방송인들이 운동할 기회를 마련하고, 친목도 도모하고 겸사겸사 좋은 일도 하자는 취지였다.

또 스폰서로부터 후원을 약속받기도 했다.

한 도시를 거칠 때마다 후원금이 누적되어 종래에는 큰 금액을 취약 계층에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유튜버들도 기꺼이 나섰는데 모든 스폰서가 떠난 현재로선 의미가 퇴색되었다.

“잘 생각해야 해. 걷기만 하면 아무 의미 없어.”

백우진의 지적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끼리 해야지 뭐. 어차피 스폰 없잖아.”

반찬용이 나섰다.

“우리끼리. 좋네.”

차지찬은 씩 웃었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백승용차는 ‘걸어서 저 하늘까지’가 준비되고 있을 때 이미 천만 원씩 기부하기로 말을 맞추었다.

4천만 원이 큰돈이긴 하나 행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을 때 약속되었던 14억 원에는 크게 못 미쳤다.

“그래. 금액이 중요한 건.”

주지승이 금액이 중요하진 않다고 얘기하려다가 친구들의 표정을 보고 곧장 말을 바꿨다.

“중요하지. 중요한데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해야지. 그렇다고 원래만큼 할 순 없잖아.”

아쉽다고 해서 14억 원을 백승용차가 전부 감당할 순 없었다.

“오케이.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차지찬도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다시. 왜 걸어야 하는데?”

백우진이 한 번 더 물었다.

후원액이 줄어든 건 어쩔 수 없지만, 여전히 걸어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냥 천만 원씩 기부하면 돼. 그건 완전 찬성. 근데 우리한텐 부산까지 걸어가야 할 이유가 필요하다니까?”

“우진이 말 맞네. 비 맞으면서 부산까지 가는데 우리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해. 안 그러면 분명 그만두고 싶어질걸.”

주지승도 같은 생각이었다.

백승용차가 말없이 고민에 빠졌다.

“상규야.”

차지찬이 안상규 PD를 불렀다.

대답이 없어 둘러보니 다른 직원이 대답했다.

“PD님 김 실장님 배웅하러 나가셨어요.”

“그래? 너희는?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차지찬이 다른 직원들에게 물었지만 그들도 특별한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거 어때?”

침묵이 이어지던 차, 반찬용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우리 천만 원씩 기부하기로 했잖아. 부산까지 완주하면 천만 원 그대로 내놓고 실패하면 천만 원에 만 원 더 내자.”

“무슨 말이야?”

백우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부산까지 가면 만 원이나 아낄 수 있다고. 무조건 걸어야지.”

“그게 뭐야.”

부산까지 걸어가는 데 실패하면 만 원을 더 기부하자니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거 괜찮네.”

차지찬이 나섰다.

“땅 파면 만 원이 나와? 무조건 걸어야지. 안 그래?”

“그건 그렇지.”

주지승과 차지찬마저 동조하자 백우진이 펄쩍 뛰었다.

“맞긴 뭐가 맞아! 그냥 만 원 더 내고 말지!”

“어허. 만 원은 돈도 아니야?”

반찬용이 백우진을 몰아세웠다.

“부산까지 걸어야 할 만큼은 아니잖아!”

“백우진 돈 좀 벌었다고 초심 잃었네. 만 원 아까운 줄 모르고.”

반찬용이 고개를 저으니 주지승과 차지찬도 혀를 찼다.

“쯧쯧. 요즘 것들은.”

“으잉. 쯧쯧쯧쯧.”

“니네도 요즘 것들이잖아!”

백우진이 빽 하고 소리쳤다.

“그래! 한다 쳐! 그냥 우리가 정하는 거잖아! 그게 무슨 메리트가 있냐고!”

“원래 우리 그랬어. 미션 걸고 벌칙하고. 우리 원래 그러고 방송했잖아.”

반찬용이 답했다.

먹방할 때는 흔한 일이었다.

라면 6봉지를 못 먹으면 콜라 안 마시기, 짜장면 한 그릇 30초 안에 못 먹으면 단무지 안 먹기 등 대부분의 콘텐츠가 본인 스스로 조건과 벌칙을 걸고 진행되었다.

“맞아. 나도 그랬어. 10세트 못 조지면 걸어서 집 가고 그랬어.”

“그러게. 나도 미카엘이 맛 없다고 하면 다음 방송 때 코스프레 벌칙하다 보니 궁예로 살게 됐는데.”

“크흐흣.”

주지승, 차지찬, 반찬용의 태연한 모습에 백우진이 펄쩍 뛰었다.

“그거랑 이거랑 같냐고! 이 바보 멍청이들아! 세상 어떤 인간이 만 원 덜 내려고 부산까지 걸어냐고!”

반찬용이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받은 차지찬이 목을 돌려 주지승을 보았고 주지승은 다시 백우진을 봤다.

“왜 이래? 나 바보 아니야.”

“아니야. 여기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멍청해.”

“어. 우리 우진이 엄청 멍청하지.”

“칭찬처럼 말하지 마!”

주지승과 차지찬이 백우진을 놀려댔다.

“……걸어가는 동안 어차피 방송 할 거잖아.”

반찬용이 입을 열었다.

“중간중간 도시 도착할 때까지 받은 슈퍼챗도 같이 기부하자. 그럼 걷는 이유 있잖아.”

“괜찮네. 뭐, 얼마나 되겠냐 싶지만 그게 어디야.”

차지찬이 반찬용이 낸 의견에 동조했다.

“어때?”

주지승이 백우진에게 물었다.

“아, 몰라. 뭔 얘기를 해도 안 들을 텐데 해서 뭐 해.”

“이야. 우진이 똑똑해졌는데? 이제 상황 파악이 좀 되나 봐.”

“그러게.”

“이이이익!”

백우진이 주지승의 팔뚝에 머리를 박으며 화풀이를 했다.

* * *

“실장님.”

안상규 PD가 건물을 막 나서는 김기태 실장을 불러 세웠다.

“네.”

“걸어서 저 하늘까지. 약속했던 100명은 못 모았지만 다시 생각해 줄 수 없으실까요?”

“PD님, 그건.”

WH전자 직원이 선을 그으려 했지만 김기태 실장이 직원을 막아섰다.

“PD님만큼은 아니겠지만 저도 이번 일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조건 변경도 어렵게 성사된 일이었습니다. 다음에 더 좋은 기회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기태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려던 차, 안상규 PD가 한 번 더 그를 불러 세웠다.

“백승용차 충분히 경쟁력 있는 구성입니다.”

“…….”

“지난 달에 네 개 채널에 업로드된 도시락 관련 영상은 24개였습니다. 모두 합치면 조회 수만 3,000만이었습니다. 100명은 아니지만 WH전자 홍보하기에 메리트 있는 조합입니다.”

“허어.”

김기태는 난감했다.

확실히 그도 갑자기 떠들썩해지며 활기를 되찾은 세미나실과 백승용차를 보며 아쉽기는 했다.

저들이 함께한다면 충분히 승산 있는 일이라 판단했지만, 어디까지나 걸어서 저 하늘까지가 계획대로 진행되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화제성이야 이미 검증되었다지만 기나긴 장마 속에서 저들이 부산까지 걸어간다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오히려 좋은 기회입니다.”

안상규와 김기태가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묵 PD님.”

안상규가 아는 체하자 묵은지가 안상규와 김기태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반찬가게의 묵은지라고 합니다.”

“아. 네…….”

김기태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반찬가게라면 최근 여러 매체에 등장하며 인지도를 쌓는 반찬용의 유튜브 채널명이었다.

김기태도 익히 알았지만 그곳의 PD는 처음이었다.

“걸어서 저 하늘까지는 성공한 젊은 사람들이 선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이미지로 주목받았습니다. WH전자에서도 눈여겨볼 정도니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김기태가 묵은지를 살폈다.

본인을 반찬가게 직원으로 소개한 묵은지는 김기태와 WH의 의도를 정확히 꿰면서도, WH전자의 이름을 빌려 걸어서 저 하늘까지의 파급력을 강조했다.

WH가 눈여겨볼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는 말을 김기태가 부정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묵은지가 말을 이어갔다.

“아마 브랜드 이미지를 쇄신하려는 의도가 있으셨을 겁니다. 삼사십 대가 사용하는 고급 브랜드. 플래그십 모델만이 아니라, 십 대와 이십 대를 겨냥한 엔트리 모델 홍보가 필요하셨을 겁니다. 나아가 그들이 성장해서 스스로 구입하는 첫 스마트폰이 WH의 플래그십 모델로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겁니다.”

WH의 목적이었다.

그들이 이번에 출시할 엔트리 모델은 가격 대비 성능이 기존 제품과는 궤를 달리할 만큼 뛰어났다.

어린 세대 사이에서 WH의 입지가 좁아지는 데 위기감을 느낀 탓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타 회사 제품을 사용한 사람들은 성장해서도 브랜드 이동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현재로서는 십 대 대부분이 WH의 경쟁사 스마트폰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김기태는 묵은지와 더는 말을 섞지 않고자 발을 옮겼다.

“WH가 백승용차와 함께하실 이유는 더 명확해졌습니다. 제작사, 스폰서, 방송국 등 온 세상이 젊은 사람들에게서 등 돌린 지금, WH만이라도 그들을 지켜준다면 바라시는 이미지 혁신이 일어날 겁니다.”

김기태가 돌아섰다.

“쉽게 말씀하시는군요. 백승용차가 영향력 있는 크루인 건 사실이지만 모든 일이 그리 쉽게 이뤄지진 않습니다.”

“그 쉽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WH가 바라는 이미지 아닙니까?”

김기태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기존 걸어서 저 하늘까지는 24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짐꾼이 거대 방송국, 우수한 콘텐츠 제작사에 여러 기업으로 스폰 받는 행사일 뿐이었습니다. 선행이긴 하지만 감동 요소를 찾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짐꾼은 쫄딱 망하게 생겼습니다.”

묵은지는 의도적으로 자극적인 단어로 현재 짐꾼 채널을 표현했다.

“함께하기로 한 이들은 모두 떠나고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던 방송국과 제작사도 떠났습니다. 큰 힘이 되어 주었던 스폰서들은 고개를 돌렸고 날씨마저 돕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걸어서 부산까지 가는 무모한 행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일을 오직 선한 의도만으로 실행하려 합니다.”

묵은지의 설명에 김기태가 잠시 고민하다 미소 지었다.

“백승용차가 가진 이미지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분들의 이미지를 WH가 받아오는 일은 별개입니다.”

브랜드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백승용차의 행동은 높이 평가할 만하고 분명 화제를 모으겠지만, WH전자로서는 선행만 할 순 없는 법이었다.

유튜버 200명이 참가했다면 그 자체로 젊은 세대를 상징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백승용차만으로 WH전자가 도전, 혁신, 패기 등의 젊은 이미지를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젊은 이미지가 아닙니다.”

묵은지가 답했다.

“도전하는 젊은이를 감싸주는 울타리가 되는 겁니다.”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턱없이 높은 취업문, 취미도 친구도 연애도 포기하며 겨우 들어선 직장에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노동 소득으로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물가와 부동산 가격. 투자라도 하면 나아지려나 싶었지만 HTS에는 파란 글자만 보입니다. 이제 연금도 없어진다고 하는데 그래도 꿋꿋이 일어나 출근합니다.”

묵은지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김기태 본인 또한 같은 처지였던 탓이다.

“온 세상이 쓰러지라고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저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저를 보는 듯합니다.”

묵은지는 본인을 투영했지만 그것이 우리 모두를 뜻함을 모를 리 없었다.

묵은지가 벽에 걸린 걸어서 저 하늘까지 포스터에 시선을 주었다.

“모든 기업이 외면했을 때 우리나라 최고 기업이라는 WH가 함께해 준다면 젊은 이미지를 얻진 못하더라도, 그들을 감싸안은 유일한 기업으로 깊이 각인될 겁니다.”

말을 마친 묵은지가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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