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두대는 거절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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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두대는 거절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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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두대는 거절하겠습니다
2022.09.02.
꿈이다, 이건.
지독한 악몽이자, 뻔하디뻔한 클리셰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했던 명장면이다.
“폭군 니콜라이와 악녀 엘리자벳을 처형한다!”
『백은의 여기사』의 여주 클라우디아가 외친다.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하늘빛이 도는 은발과 시리게 투명한 푸른 눈을 가졌다.
마이너라 불리는 여주 판타지를 몇 번이나 정주행했던 건 클라우디아 때문이었다.
특별히 아름답고, 당연히 강한 나의 최애.
그녀를 동경했다.
클라우디아의 모험담을 읽을 때면 지리멸렬한 삶도 잠시 잊었다.
클라우디아에 빙의하면 어떤 느낌일까?
그녀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조연도 괜찮은데!
책빙의라는 말도 안 되는 소원을 품었다.
이딴 식으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지만.
“난 죄 없어! 모두 니콜라이가 시킨 거라고!”
목구멍에서 소름 끼치는 쇳소리가 튀어 나간다.
거대 상단의 상속녀이자, 제국을 파멸로 이끈 악녀 엘리자벳.
그게 나다.
“너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않으냐?”
클라우디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날 응시한다.
나는 악녀답게 대꾸한다.
“내가 누굴 죽였다는 거야?! 시체라도 가져와 보라고!”
“역시,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구나.”
“질투 때문에 이러는 거야, 클라우디아? 네가 짝사랑하던 더글라스가 날 선택해서? 그게 왜 내 잘못이야?”
클라우디아의 두 눈에 새파란 불꽃이 인다.
그것도 잠시, 곧 고요를 되찾는다.
“제국민의 염원으로 죄인을 처단할 뿐이다.”
강직하고 냉엄한 최강의 여기사답다.
단두대에 무릎 꿇려진 상태만 아니라면 나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녀를 찬양했을 것이다.
“네틀톤 후작을 포함한 수많은 남성을 농락한 죄. 폭군과 함께 국정을 파탄 낸 죄. 국고를 탕진하고, 황비들을 암살한 죄.”
클라우디아가 엘리자벳의 악행을 읊조린다.
악역 황제, 니콜라이의 죄목도 나열된다.
“황제의 권력을 이용해 부녀자를 납치한 죄. 그들을 노리개 취급한 죄. 황제의 의무를 저버린 죄. 문란한 행실로 하트만 제국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
더글라스가 얽히지 않았대도 클라우디아는 악녀와 폭군을 처형해 정의를 바로 세웠을 것이다.
엘리자벳과 니콜라이는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나는 무고하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
내 뜻과 무관하게, 꿈은 반복된다.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기사들이 폭군과 나를 한 쌍의 단두대에 묶는다.
군중들이 열광한다.
마지막으로 클라우디아가 준엄하게 명한다.
“집행하라!”
순간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이 잘리고, 잘 벼려진 칼날이 내 목에 내리꽂힌다.
***
“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멀쩡한 목을 확인했다.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것도, 엘리자벳에 빙의했다는 것도.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22살 김예나는 해외 자원봉사 중 사망했다.
자신도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마당에 어린아이에게 산소호흡기를 양보하고서.
죽음의 늪에서 하얀빛이 물었다.
「의로운 사망자에게 특전이 주어집니다. 천국으로 가시겠습니까? 다른 세계로 가시겠습니까?」
당연히 꿈인 줄 알았다.
「빙의시켜 주세요. 다들 한 번씩 하잖아요? 이왕이면 제가 즐겨보던 작품으로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게 한 달 전 일이었다.
“악녀 빙의에 사망 엔딩. 후. 너무 뻔한 클리셰 아니야?”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반복되는 악몽을 빼고서라도, 엘리자벳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아직 폭군과는 만나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죽인 적도 없는데 말이다.
직접 체험한 바에 따르면 엘리자벳은 이런 여자였다.
1. 365일 올나잇 파티를 즐기는 파티광.
2. 최고급 보석과 드레스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사치광.
3. 평민 출신이란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이기주의자.
4. 극도의 미남 밝힘증 환자.
이 중에서도 4번이 특히 문제였다.
동방예의지국 출신 유교걸의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리 없지 않은가?
“양다리도 모자라, 삼다리, 사다리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부자 상속녀라고 해봤자 고작 평민일 뿐인데.”
엘리자벳은 예뻤다.
보통 예쁜 게 아니라 넋이 나갈 만큼 예뻤다.
네 번 탈색하고 염색한 것처럼 강렬한 선홍빛 머리와 고데기 없이 탱탱하게 유지되는 굵은 컬이 낯설었다.
세상 만물을 빨아들일 듯 신비로운 까만 눈동자도 전생과 비슷한 듯 달랐다.
하지만 엘리자벳이 사교계의 여왕벌로 군림했던 건 오직 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나뿐인 딸을 애지중지하는 갑부 부모 덕분도 아니었다.
엘리자벳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소설 속 악녀에게 아주 딱 어울리는.
“네틀톤 후작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녀 낸시가 주눅 든 목소리로 고했다.
신경질적인 불호령이 떨어질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곧 내려갈게. 잠시만 기다려주시라고 말씀드려줘.”
지극히 상식적으로 대답했을 뿐인데 낸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가씨! 또 어디 편찮으세요? 열병이 다시 도지신 건가요?”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나 건강해.”
“하지만 우리 아가씨께서 이럴 리가 없잖아요! 죽다 살아나시더니 머리가 이상해지셨나 봐요!”
낸시가 손으로 내 이마를 짚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기분은 썩 좋지 않지만, 날 진심으로 걱정하는 게 느껴졌다.
사용인을 코 푼 휴지 취급하던 주인이 뭐가 좋다고.
‘엘리자벳이 망나니가 된 건 원작 설정 때문이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예쁘다, 예쁘다, 오냐오냐해줬으니까.’
악녀 엘리자벳의 캐릭터는 ‘마성의 팜므파탈’이었다.
엘리자벳에겐 사람을 매혹하는 힘이 있었다.
작정하고 덤비면 누구든 유혹할 수 있었다.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보통의 경우 윙크 한 번이면 충분했다.
입맞춤에 끈적한 타액까지 오갔다? 완전 게임 끝.
상대는 엘리자벳이 앉으라면 앉고, 구르라면 구르는 충실한 노예가 되어버렸다.
기이한 이 능력을 어떻게 소유하게 됐는지는 모른다.
설정이라는데 뭐 어쩌겠는가.
문제는 앞으로 내가 그 힘을 감당해야 한다는 거였다.
***
“엘리자벳. 파혼을 재고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정중하고도 조심스러운 어조로 더글라스가 물었다.
핑크뮬리처럼 보드라운 핑크색 머리카락이 잘생긴 얼굴에 깊은 그늘을 만들었다.
엘리자벳의 전 약혼자인 더글라스 네틀톤 후작은 클라우디아의 오랜 짝사랑 상대였다.
‘로맨스 소설이었다면 무난하게 남주로 등극할 캐릭터지.’
애석하게도 『백은의 여기사』는 여주 판타지였다.
몰락한 후작가의 당주이자, 소설가 지망생이던 더글라스의 비중은 그닥 크지 않았다.
클라우디아는 더글라스를 농락한 엘리자벳에게 복수했지만, 완결 즈음 사랑이 아닌 검을 선택했다.
‘더글라스는 악녀에게 질질 끌려다니다가 뒤늦게 클라우디아의 사랑을 깨닫는 조연이지. 나쁜 남자는 아니야. 아버지의 빚 때문에 약혼한 엘리자벳을 진심으로 사랑했잖아? 엘리자벳이 마성을 발동한 것도 아닌데.’
내가 빙의하기 얼마 전, 엘리자벳은 순정남 더글라스와 파혼했다.
한 귀부인의 꾐에 빠진 탓이었다.
「진짜 사교계 여왕이 되고 싶어? 그렇다면, 폐하를 유혹해봐!」
이 얼마나 유치한 도발인가.
안타깝게도 엘리자벳은 유치한 걸 넘어 단순한 여자였다.
「내가 못 할 줄 알아요? 이왕이면 후작부인보다, 황후가 낫죠!」
엘리자벳이 공공연히 떠들어댄 탓에 더글라스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5대 명문가 중 하나였던 네틀톤 후작가를 귀족원에서 제명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첫사랑의 행복을 빌던 클라우디아에겐 청천벽력이었겠지. 파혼 뒤에도 더글라스를 농락했으니 엘리자벳을 향한 분노는 극에 달했을 테고.’
나도 모르게 목을 더듬었다.
매일 밤 처형당하다 보니 절실하게 살고 싶어졌다.
하룻밤만이라도 단두대를 벗어나 푹 자고 싶었다.
원작을 비틀면 이 끔찍한 악몽도 끝나려나?
어떻게 해야 저 최강의 여기사를 물리칠 수 있는 거지?
한 달 동안 미친 듯이 원작을 분석했다.
이 세계를 파악하고 익숙해지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몇 가지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더글라스 님. 아직도 제게 미련을 못 버리셨나요? 조롱당하는 게 지겹지도 않아요?”
최대한 까칠하고 재수 없게 물었다. 소설 속 악녀답게.
하지만 날 바라보는 더글라스의 눈빛은 생크림을 올린 케이크처럼 달콤했다.
“남들이 뭐라 떠들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린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완전히요!”
“엘리자벳과 엠스터 상단이 아니었다면 네틀톤 후작가는 계보조차 유지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 잘난 허울 지키시느라 제 남자친구들은 다 잊으셨나 봐요. 니케, 조던, 아디, 아머, 란스…….”
이 세계에 남자친구가 있을 리 없는 내가 대충 둘러댔다.
더글라스는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 자책까지 했다.
“엘리자벳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사내들의 접근을 막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여전히 어리석고 답답한 분이시네요. 내가 그래서 당신을 떠난 거예요.”
침착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더글라스의 눈동자가 태풍을 만난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단두대를 피하려면 일단 더글라스부터 떼어놔야 해. 그리고 클라우디아와 더글라스 사이에 사랑의 징검다리를 놔주는 거야. 짝사랑이 이루어지면 클라우디아도 바뀔지 몰라. 이제부터 내 꿈은 커플매니저다!’
운 좋게 갑부 초미녀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이대로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다 죽긴 싫었다.
최애 손에 처형당하는 건 더더욱 싫었다.
“하나뿐인 누이동생 수잔도 우리의 파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엘리자벳도 그 애를 귀여워해 주셨지 않습니까?”
“수잔에게 전해주세요. 더글라스 님과 제 인연은 끝났지만, 우리 우정은 변치 않을 거라고요.”
“제겐 엘리자벳뿐이라는 걸 정녕 몰라주시는 겁니까?”
“몰라요.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요.”
“엘리자벳…….”
“저 말고, 여기사님은 어떠신가요? 펜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 없는 더글라스 님을 든든하게 지켜주실 텐데.”
더글라스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죄책감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심장을 쿡쿡 찔렀다.
구애하는 남자에게 철벽 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난 모솔이었고, 더글라스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생겼다.
‘미남보다 무병장수가 우선이야. 아련한 표정에 홀리면 안 돼! 길게 쭉 뻗은 손가락도 보지 마!’
흔들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킬 때, 더글라스가 가죽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부끄럽지만 받아주세요. 제 마음입니다.”
‘웬 책? 그가 소설가로 데뷔하는 건 한참 뒷일인데?’
파혼 뒤에도 엘리자벳은 더글라스를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액세서리로 이용했다.
원작과 달리 나는 더글라스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것이 더글라스의 창작욕을 부채질할 줄은 몰랐다.
더글라스는 원작보다 훨씬 빨리 『제국의 붉은 별』이라는 초히트 로맨스 소설을 썼다.
이게 과연 어떤 징조일까?
“편집자가 말하기를 서점가의 반응이 아주 뜨겁답니다.”
“무슨 내용인데요?”
“사랑받는 운명을 타고난 여인과 그녀를 바라보는 한 사내의 이야기입니다.”
더글라스는 수줍어하면서도 자부심을 내보였다.
오랜 꿈을 이뤘음에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나였다.
“불쾌하시다면 모두 거두어 태우겠습니다.”
그가 바라는 건, 따뜻한 말 한마디와 미소 한 조각이 전부였다.
문득 엘리자벳이 부러웠다.
'김예나로 죽을 때 모든 게 다 후회였지. 등록금, 생활비에 치여 알바만 했으니까. 연애? 첫 키스? 그게 뉘 집 강아지 이름이래? 해외 자원봉사도 비행기 푯값, 체류비 다 대준다고 해서 간 거야. 뭐가 대단히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낯선 나라에서 요절할 줄 알았다면 다르게 살았을 텐데.
엘리자벳이 된 이상, 또 다른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시간 낭비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더글라스가 피땀 흘려 쓴 첫 작품이자, 엘리자벳에게 바치는 순정을 매몰차게 던져버렸다.
짜증 나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덧붙여서.
“태우거나 말거나 알아서 하세요. 귀찮게 하지 마시고요.”
***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독설을 내뱉은 혀가 아직도 깔깔했다.
그러나 더글라스에 대한 미안함을 느낄 새도 없이 두 번째 계획을 서둘러야 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악역 황제가 열일하는 이상, 클라우디아는 혁명을 일으켜. 단두대를 피하려면 니콜라이의 캐릭터를 바꿔놔야 해. 폭군을 유혹해서 성군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카사노바 황제가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하는 성군이 되고, 팜므파탈 악녀가 정경부인처럼 조신해진다면?
클라우디아의 혁명 명분도 사라진다.
모태솔로 집순이에겐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그러나 마성의 팜므파탈이라면 가능했다.
나는 원작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원작처럼 폭군을 유혹하기로 했다.
물론 결과는 정반대가 되겠지만!
“자, 그럼 파티에 가볼까?”
야무지게 무도회용 나비 가면을 쥐었다.
아직은 운명이 어디로 굴러갈지 눈치챌 수 없었다.
때로 황당하고, 가끔 장난스러우며, 대부분 예측 불가능한 운명이 내 인생을 뒤흔들 한 남자를 데려온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