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2/97)


#2.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2022.09.06.


카멜리아 파티는 원래 황실 주최 파티였다.

폭군 니콜라이는 즉위하자마자 켄싱 백작부인에게 파티를 위임했다.

켄싱 백작부인은 명문가 미남미녀와 고위 관료에게만 초대장을 뿌렸다.

거대 상단의 상속녀지만 평민 신분인 엘리자벳은 단 한 번도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저분은 엘리자벳 양 아닌가요?”

“백작부인이 허락할 리 없는데 희한하네요!”

나비 가면을 쓴 내가 등장하자,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가면으로는 작렬하는 태양처럼 붉은 머리칼을 숨길 수 없었다.

늘씬하게 큰 키에 풍만하면서도 나긋나긋한 몸매, 대귀족 못지않게 값비싼 장신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엘리자벳의 드레스룸에서 최대한 수수해 보이는 검은색 실크 드레스를 골랐다.

별로 눈에 띄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요란하게 치장한 귀부인들 사이에서 검은 드레스는 한 마리 우아한 흑조처럼 도드라졌다.


“한동안 파티장엔 얼씬도 안 하더니. 무슨 바람이 분 걸까요?”

“엘리자벳 양이 눈독 들인 미남이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하하!”

시시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렸다.

내가 파티에 적응할 수 있을까?

분위기만 싸해지는 거 아냐?

걱정도 잠시, 파티장에 들어서자마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 공기, 이 조명, 모든 게 익숙해.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하잖아? 엘리자벳은 타고난 인싸인가 봐!’

여유가 생기자 테이블 위에 차려진 요리가 눈에 들어왔다.

새끼염소 파이, 거위 간 설탕 조림, 달팽이 크림 찜 등등.

낯선 메뉴와 갈비뼈를 짓누르는 코르셋 때문에 식욕이 돌지 않았다.

매운 떡볶이, 육개장, 닭발이라면 몰라도.


‘고추장, 청양고추, 캡사이신이 그립다. 불맛, 엽기맛, 응급실맛, 지옥맛…….’

애석하게도 이 세계엔 고추가 없었다.

후추는 있지만, 한국인 입맛을 충족시키기엔 한계가 있었다.

원작 엘리자벳과 달리, 파티를 즐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시끄러운 음악, 짙은 향수 냄새, 무리 지어 속닥거리는 사람들.

그것 말고도 껄끄러운 점이 있었다.


‘드레스 코드가 너무 개방적이잖아? 저 여성분은 가슴 쪽 옷감을 너무 아끼셨네! 여긴 남자들 사이에서도 레깅스가 유행인가? 남사스러워서, 원.’

내면의 유교걸이 쯧쯧 혀를 찼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더글라스의 여동생 수잔에게 초대장을 양보해 달라고 했다.

첫 카멜리아 파티였음에도 수잔은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유도 묻지 않았다.

수잔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수잔은 오늘 만난 니콜라이에게 푹 빠지게 돼. 카사노바 황제를 짝사랑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수잔의 죽음이 클라우디아를 각성시키는 기폭제가 되고.’

나는 두 사람의 만남을 막고, 니콜라이를 유혹해야 해야 했다.

하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흑발과 녹안의 잘생긴 황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엘리자벳의 추종자들이 몰려들었다.


“카멜리아 파티에서 엘리자벳 양을 보게 될 줄이야! 특별히 더 아름다우십니다.”

“밤의 요정처럼 신비로우십니다! 아주 잠시라도 엘리자벳 양의 치맛단이 되고 싶습니다!”

키 크고 잘생긴 남자들이었지만 모두 내 취향은 아니었다.

기름에 튀긴 마가린처럼 느끼한 말투까지 최악이었다.


‘치맛단이 돼서 뭘 하려고? 아프면 병원엘 가라, 한심한 인간들아.’

전생의 부모는 맞바람을 피우다 내가 5살 때 이혼했다.

하나뿐인 자식을 짐 덩어리 취급한 것도 똑같았다.

덕분에 나는 친척 집을 전전하며 자랐다.

매사 흠 잡히지 않으려고 신경을 늘 곤두세웠다.

부모 닮았다는 소리만큼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유교걸의 운명을 타고난 내가 외모만 보고 껄떡대는 남자들을 어찌 곱게 보겠는가.

썩은 표정을 숨기려고 고개 숙였다.

속도 모르고 남자들이 환호했다.


“수줍어하시는 모습도 고우십니다, 엘리자벳 양!”

“하늘의 달도, 별도, 빛을 잃을 듯한 아름다움입니다!”

그 모습을 노란 꾀꼬리 가면을 쓴 귀부인이 짜증 섞인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날 고까워하는 백작부인 눈에 띄면 움직이기 불편한데. 확 유혹해버려?’

잠시 고민하다 이내 관두기로 했다.

날 적대시하거나,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유혹이 잘 먹히지 않았다.

성공한다 해도 짙은 피로가 몰려왔다.

원작 엘리자벳은 몰랐지만, 더러는 마성이 아예 통하지 않는 상대도 있었다.


‘목숨 건 신념을 가진 사람’

대표적인 예가 클라우디아였다.


‘원작 엘리자벳은 그것도 모르고 클라우디아를 유혹하려다 단두대로 끌려갔지. 오늘은 수잔을 지켰다는 것에 만족하자.’

 

 

***

안락한 침대에 파묻힐 수 있다고 생각하니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때 등 뒤에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발정 난 암고양이가 도망을 치는군요. 이제야 주제 파악을 한 걸까요?”

말투하고는. 쯪.

켄싱 백작부인과 그녀를 둘러싼 몇몇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재수 없지만, 인사치레 정도는 해야지.


“인사가 늦어 송구합니다. 켄싱 백작부인.”

“이제야 말을 걸어주시네요! 끝까지 무시하는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례했다면 부디 마음 푸시길 바랍니다, 부인.”

우아한 자세로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엠스터 부부는 외동딸의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엘리자벳의 가정교사는 전 황실 예법 선생님이었고, 그녀는 제법 명석한 제자였다.

제멋대로 행동할 뿐, 얼마든지 고상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불청객이 기웃거리는데 어떻게 마음을 풀겠어요? 그것도 사교계에 빌붙어 보려고 몸뚱이를 굴리는 하층계급이라면요.”

“행실에 유념하라는 조언으로 듣겠습니다.”

“가능할까, 그게? 장례식도 아닌데 검은 드레스라니…… 관심받고 싶어서 아주 발악을 하는군요.”

“…….”

“분에 넘치는 약혼이 깨졌으니 엘리자벳 양도 눈치챘겠죠? 돈 몇 푼으로 타고난 핏줄까진 감출 수 없다는 걸. 호호!”

이 여자가 선 넘네?

나는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말자는 주의였다.

무례한 상대에게 예의를 지켜봤자, 나만 손해라는 걸 어려서 깨달았다.

게다가 켄싱 백작부인은 엘리자벳을 부추겨 파혼에 이르게 한 장본인 아니던가.


“부인. 면전에서 빈정거리는 예법은 가문 어른들이 가르쳐주신 건가요?”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켄싱 백작부인이 발끈했다.


“백작가 안주인에게 말대꾸를 하는 건가요?!”

“아뇨. 훈계하는 겁니다.”

“뭐, 뭐라고?!”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격언을 들어보셨는지 모르지만, 이쯤 하시지요. 그럼 저도 조용히 떠나겠습니다.”

“어린 계집이 감히……!”

“그 정도 격언도 모르시나? 책 같은 건 통 안 읽으셨나 봐요.”

주변에서 비웃음이 들려왔다.

켄싱 백작부인이 기부금을 낸 아카데미에서 낙제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제집 안방에서 모욕을 당한 켄싱 백작부인이 날 향해 손날을 치켜세웠다.


“천한 것들은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당신이 뭔데 날 때려?”

켄싱 백작부인의 가느다란 손을 탁, 쳐냈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켄싱 백작부인이 입을 뻐끔거렸다.


‘내 별명이 알바의 탈을 쓴 진상 암살자였어. 대한민국 알바생 무시하지 말라고!’

귀족을 잘못 건드렸다간 큰코다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날 마음은 없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아닌가?


“정곡을 찔리니까 바로 폭력이라니. 수준 대단하시네요. 부군께서 엠스터 상단에 6천만 골드를 빚졌다는 건 아시나요?”

“뭐? 무슨 헛소리야!”

“못 들으셨구나. 도박에 푹 빠져 사시느라 깜빡하셨나 봐요. 이 순간에도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고 있는데.”

“이 천한 것이 거짓말까지 하네?”

“저는 천해도 차용증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황제 폐하를 우롱하는 짓도 이젠 그만두셔야 할 겁니다.”

“이년! 지금 폐하를 들먹이며 날 모함하려는 것이냐?!”

‘내가 아무 준비도 없이 왔을까 봐? 당신이 엘리자벳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아는데!’

“시치미를 떼시는 건가요? 암시장에서 초대장을 팔아놓고?”

내세울 거라곤 잘난 핏줄밖에 없는 켄싱 백작부인을 노려봤다.

내 기세에 눌린 그녀가 주춤 물러섰다.


“그, 그건……!”

“황도에 타운하우스가 없는 귀족들은 사교계에 연줄을 만들려고 하죠. 폐하께 위임받은 파티를 이용해 돈을 벌다니…… 이 무슨 궁상인가요? 거지 근성이라고 해야 하나?”

장탄식 섞인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암시장에서 초대장을 산 사람들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내가 석상처럼 얼어붙은 켄싱 백작부인 귀에 속삭였다.


“얌전히 꺼져요. 당신이 마구간지기랑 목하 열애 중이라는 것까지 확 다 불어버리기 전에.”

한참 후에 클라우디아가 밝혀내는 사실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켄싱 백작부인이 비틀거리며 파티장을 떠났다.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낭랑한 목소리를 내쏘았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백작부인을 위해 박수 올리죠! 켄싱 저택에서 열리는 마지막 카멜리아 파티일지도 모르니까요!”

 

***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내 앞으로 은쟁반을 든 하녀가 지나쳤다.

은쟁반에는 체리를 얹은 초콜릿케이크가 담겨 있었다.


‘저건 니콜라이가 유일하게 즐기는 음식이잖아! 드디어 찾은 건가?’

하녀를 따라 테라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작 악역을 드디어 만난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엘리자벳 언니!”

핑크색 머리칼과 순한 눈망울을 지닌 귀족 영애가 다가왔다.

절대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더글라스의 여동생 수잔이었다!


“언니께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친척 어른께 초대장을 양도받았어요.”

나는 병약하지만 강단 있는 수잔 캐릭터를 무척 좋아했다.

수잔이 목숨을 끊던 회차에 악플을 달았을 정도로.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강단 있으면 곤란했다.


“결례라는 걸 알지만, 오라버니와의 파혼을 취소해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수잔…….”

“한 번만 다시 생각해주세요. 제 이야기라면 항상 귀 기울여주셨잖아요? 전폭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으셨고요.”

“미안해요, 수잔. 더글라스 님과 저는 끝났어요.”

“그럼 우린요?”

수잔이 되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맑은 눈물이 찰랑찰랑 차올랐다.


“저도 오라버니만큼 언니를 좋아해요. 언니와 진짜 가족이 되는 날만을 기다렸어요.”

이 말을 전하려고 수잔은 모든 용기를 그러모았을 것이다.

비 맞은 새끼 사슴처럼 떨고 있는 수잔을 안아주고 싶었다.

더글라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말 끌어안았을지도 몰랐다.


“수잔. 여기서 지금 뭘 하는 것이냐?”

“오라버니!”

“동생이 졸라서 에스코트했는데…… 엘리자벳을 곤란하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대신 사과드립니다.”

더글라스가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그는 이 상황이 몹시 난처한 기색이었다.

동생의 간청으로도 내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 역시 그를 괴롭혔으리라.


“언니를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래도 이러면 안 된다. 엘리자벳이 우리 오누이를 얼마나 불편해하시겠니?”

“제가 큰 결례를 저질렀어요. 부디 용서해주세요, 언니.”

울먹울먹한 눈동자의 사슴 남매가 두 손을 맞잡았다.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자꾸 이러면 너무 미안하잖아! 내가 사실 악역에는 익숙하지 않다고!’

오빠 사슴이 조심스레 물었다.


“엘리자벳. 얼굴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시는 게 어떨까요?”

“같이 가요, 언니. 저쪽 테라스가 좋을 것 같아요!”

동생 사슴이 하필이면 악역 황제가 도사리고 있을 테라스를 가리켰다.


“제가 모셔도 괜찮겠습니까, 엘리자벳?”

오빠 사슴이 소박한 기대를 담아 날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냉혹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지긋지긋하네.”

순진무구한 네틀톤 남매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미움을 사더라도 수잔과 니콜라이를 만나게 할 수 없었다.


“병약한 여동생을 앞세워서 절 회유하려고 하다니, 정말 실망이에요.”

“오해입니다, 엘리자벳!”

“저 좀 내버려 두세요. 눈앞에서 사라져주시면 고맙고요.”

마음에 없는 독설을 내뱉었다.

수잔이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모두 저 때문이에요. 오라버니까지 미워하진 마세요.”

“불편하게 해 드렸습니다.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뿐인 혈육을 이용할 정도로 파렴치한은 아닙니다.”

더글라스는 진심으로 상처 입은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죄책감을 지우기 힘들었다.


‘악녀 노릇, 이왕 하려면 확실하게 하자. 동정심은 독일 뿐이야.’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차갑게 등을 돌렸다.

원작 엘리자벳도 인정해줄 만큼 완벽한 악녀의 모습이었다.

***

거침없이 테라스 커튼을 젖혔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푹신한 소파 위에 세 명의 남녀가 얽혀 있었다.

가면을 쓴 남자를 중앙으로 여인 두 명이 야릇한 장면을 연출 중이었다.
‘한 번에 두 명을? 저걸 쓰봉에 담아버려?! 태우는 쓰레기로 분류해서!’
 

 
보고 싶지 않은데 자꾸 눈이 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남자는 아름다웠다.

풀어헤친 셔츠 사이로 팽팽한 가슴 근육이 도드라져 있었다.

어깨는 태평양처럼 넓었고, 우람한 허벅지는 웬만한 여인의 허리보다 굵었다.

관능적이면서도 유연하고, 기품을 잃지 않은 근육질 몸에서 짙은 색기가 흘러나왔다.

가면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그 사이로 배부른 맹수처럼 느른한 초록 눈이 번뜩였다.

잊었던 공포가 엄습했다.


‘입 한번 잘못 벙끗했다가 처형당하는 거 아냐? 폭군들은 아무 때나 막 죽이잖아?’

날카롭게 날 관찰하던 니콜라이가 중저음으로 물었다.


“그대도 끼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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