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유혹 게임과 독소조항 (4/97)


#4. 유혹 게임과 독소조항
2022.09.13.



“얼마나 퍼마신 거야? 위장에 구멍 난 것 같네. 우욱.”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아침 햇살을 막으려고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소용없었다.

메스꺼움과 함께 지난밤 니콜라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황제모독죄로 얼음탑 감옥에 가기 싫으면 술을 받거라.」

「협박을 특이한 방식으로 하시네요.」

「관용을 베푸는 거지.」

「다른 선택지는요?」

「없어. 이 둘뿐이야.」

「왜 저랑 술 마시고 싶으신 건데요?」

「이유는 몰라도 돼. 술인지 감옥인지만 선택해.」

마침 호위 기사들이 칼집에 손을 올렸으므로 나는 니콜라이가 건네는 샴페인 잔을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최고급 샴페인이라 그런 걸까?

애주가인 엘리자벳에 빙의했기 때문일까?

샴페인은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빙글빙글 돌다가 엎어진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그러다 토했던 것 같기도 하고…….”

코를 킁킁거렸다.

다행히 몸에서 토사물을 쏟은 냄새는 나지 않았다.


“누가 씻겨줬나 보다. 고마워서 어쩌지?”

“감사 인사부터 해야지.”

바로 옆에서 들려온, 밤사이 익숙해진 중저음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드넓은 침대 위에서 니콜라이가 상체를 일으켰다.


“폐하?!”

비단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가죽 갑옷처럼 탄탄한 흉근, 칼로 조각한 듯 섬세한 복근이 눈을 찔렀다.

보기 드문 절경이었으나 온몸의 털이 거꾸로 솟았다.


“폐하께서 왜 여기 계세요?”

“황제가 황궁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인가?”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거대하다 못해 웅장한 침대와 크리스털 샹들리에, 천장을 가득 채운 명화가 보였다.

화려하기로 소문난 엠스터 저택보다 몇 차원 높은 호화스러움에 입을 떡 벌렸다.

이곳이 황궁, 그것도 황제의 침실이라는 걸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아, 또 클리셰야? 낯선 침대에서 눈을 뜬 여주인공과 반라의 미남!’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들췄다.

다행히 알몸은 아니었지만 안심할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다.

엘리자벳의 드레스룸에서도 비슷한 것을 몇 개 봤지만, 디자인이 야해서 건들지도 않았는데!


‘설마 이 남자가 갈아입혀 준 거야? 직접 했을 리는 없겠지? 시녀가 한둘이 아닌데…….’

까맣게 지워진 줄만 알았던 기억을 헤집고 커다랗고 두툼한 손이 떠올랐다.

조심스럽다 못해 정중한 손길로 날 어루만지는 남자.

흐릿한 시야 사이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과 녹색 눈이 보였다.

붉게 달아오른 듯한 두 뺨과 긴장으로 굳게 다물어진 육감적인 입술도.


“아아……!”

절망하는 나와 달리, 니콜라이가 새하얗고 가지런한 치열을 씩 드러냈다.


“부끄러워할 것 없다. 볼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 아닌가?”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는데요?”

“어젯밤에서부터 오늘 아침까지.”

“!”

“여인의 옷을 갈아입히는 게 몹시 어려운 일이더군. 그래도 내 덕에 푹 잤겠지?”

니콜라이는 유쾌한 기색이었다.

끈적끈적하거나 탐욕스러운 눈빛이었다면 소름 끼쳤을 텐데, 니콜라이의 눈동자는 순수한 즐거움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부담스럽긴 매한가지지만, 퇴폐미 폴폴 풍기던 첫인상과는 사뭇 달랐다.


‘이 남자 나한테 왜 이러지?’

혼란스러웠다.

니콜라이는 내게 유혹당하지 않았노라고 제 입으로 말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특별대우를 해주고 있는 걸까?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바람둥이라서?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다.

거의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니콜라이는 술로 떡이 된 나를 보살폈을 뿐, 다른 어떤 짓도 하지 않았다.


‘넙죽넙죽 받아 마시고, 인사불성으로 취한 건 나야.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살고 싶었는데. 외박도 모자라, 처음 본 남자와 한 침대에서 일어나다니!’

원작 엘리자벳과 다를 바 없는 문란한 행실에 고개를 푹 숙였다.

니콜라이가 무심히 한마디 던졌다.


“괴로워할 것 없다. 술을 권한 건 나니까. 샴페인 석 잔에 취할 줄은 몰랐지만.”

“…….”

“마차를 대령하라 일렀다. 엠스터 저택으로 돌아가거라.”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다음엔 더 조심하지.”

‘다음’이란 단어가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가 놓아주었다.

무엇을 조심한다는 건지 되묻고 싶었지만 하나로 달라붙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득 니콜라이와 단둘이 침대 위에 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부끄러워졌다.

나도 모르게 손끝으로 입술을 더듬었다.


‘어젯밤 이 남자와 첫키스를 했지.’

양 볼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낯선 남자의 감촉이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입술에 남아 있었다.

열기도 숨결도 그대로였다.

니콜라이는 갑작스러운 키스를 받고도 흥분하지 않았다.

인사불성이 된 나를 함부로 다루지도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다음엔 더 조심하겠노라 했다.

니콜라이와 대화를 나눌수록 견고하던 카사노바 폭군 이미지에 미세한 금이 갔다.


‘원작보다는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 폭군이 아니라면 클라우디아가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겠지? 유혹하지 않아도 단두대 엔딩을 피할 수 있는 건가?’

약간의 호감이 새로운 희망으로 피어날 즈음 니콜라이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입궁을 서두르라. 후궁에 거처를 마련해놓겠다.”

“네?”

“왜 모른 척하는 거지? 게임은 그대가 하자고 해 놓고?”

“게임이라니요?”

“시치미 떼는 거라면 용서하지 않겠다.”

미간을 찌푸린 니콜라이가 바짝 다가왔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자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황제모독죄에 사기죄를 더해 삼족 아니, 구족을 멸해주지.”

서슬 퍼런 살기가 온몸을 찔렀다.

니콜라이는 진심이었다.

진심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권력도 가지고 있었다.


‘빼박 폭군이네! 요리 보고 조리 봐도 폭군이야!’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니콜라이가 악역 본성을 발휘하기 전에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어느 안전이라고 사기를 치겠습니까? 술 때문에 필름, 아니 기억이 끊겨서 그래요!”

“…….”

“무슨 게임인지 알려주세요. 네?”

미심쩍은 눈으로 날 노려보던 그가 은혜라도 베풀 듯 오만하게 말했다.


“상대를 먼저 유혹하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그따위 게임을 제가 제안했다고요?”

“아주 자신만만하게.”

“말도 안 돼요!”

“나는 응하기로 했다. 그대가 입궁하는 조건으로.”

“거절하셨어야죠?”

“내가 왜? 재미난 장난감이 생길 판인데.”

아무리 신분 사회라지만 장난감이라니, 너무한 거 아냐?

재미로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겠다고?

발끈하려는데 니콜라이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황제의 허벅지에 토하고, 황제에게 목욕시중을 들게 했다. 설마 공짜인 줄 알았나?”

그의 전신에서 검은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거역하면 찍소리도 못하고 처형당할지 몰랐다.

클라우디아는 아직 등장도 하지 않았는데.


‘유혹하러 왔다가, 엿만 먹고 가네요.’

후회의 눈물을 삼켰다.

니콜라이가 질 좋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단순한 서류가 아니라는 걸 받자마자 직감했다.

종이는 계약서였고, 믿고 싶지 않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1. 니콜라이 롭 예브레이와 엘리자벳 엠스터는 승패가 결정되는 시점까지 함께 생활하며 서로를 유혹한다.

2. 유혹 방법을 제한하지 아니한다. 단, 폭력, 약물 등 보편율법에 반하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한다.

3. 신체 접촉을 제한하지 아니한다.

4. 먼저 상대의 마음을 빼앗은 자가 승리하며, 승자는 패자에게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다.

5. 패자는 승자의 뜻에 무조건 순응해야 하며 거부할 권리를 갖지 아니한다.

니콜라이가 웃었다. 그의 미소는 더 이상 소년처럼 해맑지 않았다.


 

***

니콜라이는 기쁜 마음으로 엘리자벳의 반응을 살폈다.


‘낯빛이 순식간에 파래졌다가 하얘지는군. 어떨 때는 황당할 만큼 뻔뻔하다가 또 어떨 때는 겁에 질린 햄스터처럼 굴어. 못 견디게 향기롭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는 엘리자벳의 달콤한 향기가 일시적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했다.

인간이 체리블로섬과 스위트베리 향을 풍기는 이유가 뭔지, 향기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직접 그녀를 돌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엘리자벳의 체취는 저승꽃의 악취를 내쫓는 데 지속적이고도 탁월한 힘을 발휘했다.

밤사이 엘리자벳이 머문 황실 곳곳에서 악취의 흔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최고급 향수와 향초, 향로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신비롭고도 불가해한 여자.

니콜라이는 엘리자벳의 모든 걸 빨아들일 듯 두 눈에 담았다.


‘유치한 게임을 핑계 댈 만큼 이 여자가 간절해. 향기가 사라질 때까지만이라도 손에 넣어야 한다.’

그 목적 말고도 엘리자벳은 곁에 둘 가치가 있었다.

일단 표정과 반응이 신선했다.

격식에는 완벽히 어긋나지만, 자신도 의아할 만큼 유쾌했다.

벌써 그녀의 향기에 취해버린 걸까.


“무효예요. 심신미약 상태에서 강제적으로 체결된 계약이 분명하다고요!”

엘리자벳이 발끈했다.

니콜라이가 계약서를 흔들었다.

엘리자벳의 작은 손도장이 인사를 건네듯 팔랑거렸다.


“지장이 마르기도 전에 오리발부터 내미는 건가?”

“제가 유혹게임을 제안했다는 증거가 있어요?”

“그대 입으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하지 않았나. 엠스터 저택보다 황궁이 훨씬 더 안전할 거라며.”

“…….”

“먼저 접근한 것도 그대 아닌가? 이왕 말 나온 김에 묻겠다. 왜 날 유혹하려고 한 건가?”

“…….”

“소문처럼 황후가 되고 싶었나? 황비로 시작하면 충분한데 왜 싫다는 거지?”

엘리자벳의 검은 눈동자가 요동쳤다.

새 부리처럼 작은 입술을 빠끔거리는 걸 보니, 적당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니콜라이에게 엘리자벳의 본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쓸모 있고도 흥미로운 여자. 단지 그뿐이었다.

앞으로도 그러리라 믿지만, 남녀 사이의 일은 쉬 장담할 수 없는 법이었다.


“함께 생활한다는 조항은 있지만, 황비가 된다는 조항은 없잖아요?”

“시녀가 되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귀족 출신 시녀들 틈에서 허드렛일이나 하겠지만, 내 알 바는 아니니까.”

“폐하께는 수십 명의 황비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정확히 몇 명인지 모른다. 궁금하면 그대가 입궁해서 세어보고 알려주도록 해.”

엘리자벳의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니콜라이는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그녀를 놀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자꾸 짓궂은 마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여자 경험도, 연애 경험도 없지만, 니콜라이는 일국의 황제였다.

즉위하기 전부터 절제하고 인내하는 법을 익혔다.

무뎌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에 감각을 외면했다.

감정도 끊어냈다.

어느 틈엔가 인간이 느낄법한 모든 희로애락이 어색해졌다.

아쉽지는 않았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저주받은 늑대를 황태자 프란츠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핀치를 아들로 키운 지도 벌써 6년이 지났구나. 라일라 품에 안겨 있던 꼬맹이가 벌써 10살이라니 믿기지 않아.’

니콜라이에겐 비밀이 많았다.

황태자 프란츠가 그의 친아들이 아니란 사실도 그중 하나였다.

눈부시게 빛나는 프란츠의 금발을 보며 핏줄을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입 밖에 내면 모조리 없앴다.

프란츠는 목숨을 주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존재였다.

별을 닮은 라일라. 그녀와 약속했으므로.


‘이 여자가 나와 프란츠를 도와줄지도 모른다. 처음이자 마지막 희망일지도.’

니콜라이는 엘리자벳을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황제가 마음먹었으니, 그녀가 도망칠 방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 싫다면 계약을 파기해도 좋다.”

“정말요?”

죽다 살아난 표정으로 엘리자벳이 반색했다.

문득 부아가 치밀었다.


‘살고 싶다느니, 단두대는 싫다느니, 하며 울더니만. 하나도 기억을 못 하는군.’

지난밤 엘리자벳은 니콜라이의 품에 안겨 뜨거운 눈물까지 펑펑 흘렸다.

니콜라이는 우는 여자를 달랠 줄도, 위로할 줄도 몰랐다.

낯선 곳에서 길 잃은 아이처럼 목 놓아 우는 그녀를 안아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처음엔 엘리자벳이 황제모독죄로 받게 될 처벌을 두려워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엘리자벳은 곧 죽게 되리란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공포는 꽤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혀 온 듯 했다.


‘뭐가 그리 두렵고 서러운 걸까. 눈부신 미모와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재산을 가졌으면서.’

모든 걸 다 가진 사람도 술을 빌려 울고 싶은 날이 있었다.

설명할 수 없고, 설명되지 않는 슬픔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니콜라이는 엘리자벳의 마음을 섣불리 넘겨짚지 않았다.

신분과 무관하게 그래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계약 파기 조항을 잘 살펴보길 바란다.”

니콜라이가 계약서를 뒤집었다.

계약서 뒷면에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있었다.

엘리자벳의 검은 눈동자가 잘 익은 포도알처럼 휘둥그레졌다.


“일방적으로 파기하면…… 전 재산을 몰수하고, 일가족을 노예로 팔아버린다?!”

“지장 찍기 전에 확인했겠지? 안 했어도 별수 없지만.”

“이 간사한 인간!”

“말조심하시오, 부인. 남편은 황제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