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특전을 또 준다고요? (5/97)


#5. 특전을 또 준다고요?
2022.09.16.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는 세계에서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낸시까지 소문을 꿰고 있었다.


“나라가 발칵 뒤집혔어요! 세기의 만남이라고요!”

“카사노바와 팜므파탈이 만났으니 뭐, 재미있겠네.”

“왜 남 일처럼 말하세요? 황제 폐하께서 아가씨에게 푹 빠지셨다면서요?”

“전부 다 헛소문이야.”

“곧 황후가 되신다는 말도요?”

황후는 무슨. 부당 계약으로 팔려 가는 노예면 몰라도.


“낸시. 역대 황후 중에 평민 출신이 있었어?”

“아뇨.”

“현 폐하께서 황후를 들이신 적은?”

“없죠.”

“내가 황후가 되는 일도 없어. 되고 싶지도 않고.”

“신분 때문에 폐하를 포기하신다고요? 사랑으로 극복하실 수 있잖아요?”

“로맨스 소설 그만 좀 봐.”

낸시는 더글라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내가 『백은의 여기사』의 여주 클라우디아를 좋아했던 것처럼 『제국의 붉은 별』의 여주 엘리제를 동경했다.

어여쁘고, 자신만만하고, 똑 부러지는 여주인공을 누가 싫어할까?

더글라스는 내게 영감을 받아 엘리제를 창조했다.

하지만 나는 악역 조연에 불과했다.

폭군을 유혹하겠노라고 야심 차게 도전했지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그뿐만 아니라 소중한 기회를 아주 대차게 말아먹었다.


‘취하면 우는 버릇이 있었을 줄이야. 니콜라이의 셔츠가 눈물 콧물 범벅이었지. 진정한 알콜 쓰레기가 여기 있네.’

무방비 상태로 처음 본 남자에게 온갖 추태를 부렸다.

하지 말아야 할 말 또한 너무 많이 했다.


「또 죽고 싶진 않아요. 단두대는 싫다고요. 하지만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흑흑.」

니콜라이는 난감한 기색이었다.

내 어깨를 어색하게 토닥거렸다가, 화들짝 손을 거두는 식이었다.

평생 데이트 한번 못해본 숙맥처럼.


‘괜찮은 척했지만 무서웠어. 엘리자벳에 빙의한 것도, 두 번째 죽음을 기다리는 것도. 클라우디아를 막겠다고 큰소리 뻥뻥 쳤지만, 센 척한 거야. 그럼 좀 덜 무서울 것 같아서.’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불안이 니콜라이의 체온과 만나 눈물방울이 되었다.

오랫동안 참았던 눈물은 쉬 멈추지 않았다.

세상 무뚝뚝한 얼굴로 니콜라이가 말했다.


「울고 싶으면 맘껏 울거라. 어디 가지 않을 테니.」

며칠이 지났어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감정이 오락가락했다.

열이 확 올랐다가 냉랭하게 식기도 했다.

수치스럽다가, 미안했다가, 고마웠다가, 궁금했다.

그는 왜 날 황비로 만들려는 걸까.

정말 내가 흥미로운 장난감으로 보이는 걸까.


“역시 진짜 목적은 내 몸인 건가…….”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머리를 빗겨주던 낸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솔직히 알려주세요! 그날 밤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키스. 포옹. 눈물. 계약.

무엇 하나 사소한 게 없었다.

니콜라이에겐 마성이 통하지 않았다.

뜻대로 조종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와 유혹게임을 하는 건 기름을 뒤집어쓰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부일처제를 숭상하는 내가 어떻게 난봉꾼 황제의 수십 번째 애첩이 되겠는가?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그를 유혹해 성군으로 만들겠다는 내 계획은 이미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일단 클라우디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저 폭군과 최대한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야심한 밤 내 침대에 숨어드는 니콜라이!

상상만으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네틀톤 남매에게 도움을 구해보자. 염치없지만 지금으로선 다른 방도가 없잖아.’

 

***

세간의 눈을 피해 네틀톤 후작 저택을 찾아갔다.

크고 고풍스러운 저택이지만 넉넉지 못한 형편이 느껴졌다.


‘포석도 깨졌고, 정원수도 손질이 안 됐어. 책이 대박 났다던데. 인세는 안 들어왔나?’

더글라스의 아비는 솜씨 없기로 유명한 도박꾼이었다.

그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네틀톤 후작가는 5대 명문가에서 제외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알거지가 되었을 거였다.


“어서 오세요, 엘리자벳.”

“기다리고 있었어요, 언니!”

염치없다고 문전 박대라도 당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더글라스와 수잔이 날 반갑게 맞았다.

파티장에서의 독설은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유혹게임 계약서에 대해 털어놓자 더글라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도 이럴 수는 없습니다.”

“명문가 출신 황비들이 후궁을 장악하고 있대요. 어떡해요, 언니?”

수심 가득한 얼굴로 수잔이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4대 명문가.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원작에 그려진 그들의 악행은 정말 치가 떨릴만했지.


“저도 조사해봤어요. 리먼 공작가의 프레이아 황비, 브렌든 후작가의 로즈 황비, 파이프 후작가의 엠마 황비, 블랙폴드 백작가의 신시야 황비. 모두 황후를 노린다죠?”

“폐하께서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그중 한 명이 황후가 되셨을 겁니다.”

“왜 그동안 황후를 맞지 않으신 걸까요?”

내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 수잔이 목소리를 높였다.


“천하의 바람둥이니까요! 제국의 모든 여인을 취하려는 거죠!”

“말조심해라, 수잔. 누가 뭐라 해도 제국의 하늘이시다.”

“죄 없는 여인들을 잡아서 끌고 갔잖아요. 언니까지 노리다니 용서할 수 없어요.”

수잔이 작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두 눈에서 적의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수잔이 니콜라이를 짝사랑할 일은 없겠네.’

한시름 놓으려는 순간, 수잔이 무릎을 쳤다.


“파렴치한 폭군을 막을 방법이 떠올랐어요!”

“뭔데요?”

“클라우디아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히익!”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빙의한 후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수잔! 충성 맹세를 한 기사가 어떻게 주군을 죽여요?”

“라디아는 옛날부터 황제를 처단하고 싶어 했어요. 바람둥이를 증오하거든요. 어릴 때부터 친해서 잘 알아요.”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매일 밤 클라우디아 손에 죽고 있으니까!’

하마터면 속말이 튀어 나갈 뻔했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일단 수잔부터 진정시켜야 했다.


“수잔, 그건 반역이에요. 날 염려해주는 건 고맙지만, 무모한 짓은 하지 마세요.”

“부탁하지 않더라도 라디아는 아마 곧 결단을 내릴 거예요.”

“클라우디아 님의 결심이 그렇게 확고한가요?”

“그럼요. 고집불통이지만, 정의로운 사람이에요. 어떤 기사들보다 강하고요!”

막막하고 허탈했다.

벼랑에 간신히 매달린 내 손을 누군가 짓밟는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클라우디아가 돌아오는 걸까?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는 거야?’

번뜩이는 단두대 칼날이 옷깃을 스치는 듯했다.

죽음의 운명은 내 앞길마다 검은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이런다고 포기할 줄 알아? 폭군의 셔츠를 콧물닦개로 쓴 나야. 무기력하게 죽는 건 전생으로 족해!’

두 눈에 힘을 주고 더글라스를 노려봤다.


“더글라스 님. 잠깐 주제넘은 소리를 해도 될까요?”

“경청하겠습니다.”

“더글라스 님은 후작가 당주이자, 수잔의 유일한 보호자예요. 여동생을 아끼신다면 엄하게 지도하셔야죠. 이런 문제라면 더더욱이요.”

“엘리자벳이 옳습니다. 제가 소홀했습니다.”

더글라스가 뺨을 붉혔다.

내 시선이 수잔에게 옮겨갔다.

수잔은 벌써 주눅 들어 있었다.


“반역이 애들 장난인가요? 수잔의 말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어요. 감당할 수 있나요?”

“죄송해요. 언니를 구하겠다는 욕심이 앞서서…….”

“수잔을 위험에 빠뜨리고 제가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럴 바엔 내가 입궁하는 편이 백번 나아요.”

“그러지 마세요! 다신 허튼 생각 안 할게요.”

수잔은 반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도 잠시, 날 바라보는 수잔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이 상황에서도 언니는 제 걱정뿐이시네요.”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나는 눈꺼풀을 끔뻑거렸다.


“알고 있었어요. 그날 언니가 절 보호하기 위해 테라스로 갔다는 걸요.”

확신에 찬 어조로 수잔이 말했다.


“제가 폭군의 먹잇감이 될까 봐 대신 희생하신 거잖아요?”

“그런 적 없는데요?”

“시치미떼셔도 소용없어요. 5대 명문가 중 황비를 배출하지 않은 건 우리 네틀톤 후작가뿐이에요.”

“다른 황비들은 제 발로 입궁했다던데요?”

“언니가 아니었다면 저도 후궁으로 끌려갔겠죠. 황제는 그런 인간이니까요.”

수잔은 뭔가 오해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5대 명문가라 칭하지 않는다.

5대 명문은 추억의 이름일 뿐, 지금 제국을 호령하는 귀족은 네틀톤을 뺀 4대 명문가뿐이었다.

니콜라이 역시 수잔에게 아무 관심 없었다.


‘오해를 바로잡아줘야 하나? 그냥 놔둬도 되겠지? 누구에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뭐, 수잔을 구하려 한 건 사실이니까.’

계산은 끝났다.

나는 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시선을 떨구며 쓸쓸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속여서 미안해요. 수잔이 자책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요.”

“엘리자벳 언니!”

“수잔이 한낱 평민인 절 언니로 생각하는 것처럼 저도 수잔을 친동생처럼 여기고 있어요. 수잔을 지킬 수 있다면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답니다.”

내가 생각해도 자연스러운 즉흥연기였다.

하지만 수잔을 친동생처럼 여긴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녀를 지키려고 폭군 앞에 나섰던 것도 진실이었다.

이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는 듯 더글라스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저와 파혼하시고 저희를 매정하게 내치신 거군요. 마음에 없는 말씀까지 하시면서…….”

마음에 없는 말은 맞는데, 거기서부터 오해하는 거야?

오해도 집안 내력인가?

의아해하는 날 수잔이 꽉 끌어안았다.


“언니는 빚더미에서 우리 가문을 구해줬어요. 절 지켜줬고요. 그런 언니를 빼앗길 수 없어요!”

수잔은 사소한 도움도 몇 배로 고마워하는 아이였다.

그 착한 심성에 마음이 아렸다.


“수잔. 포기하긴 이르다. 엘리자벳을 구할 마지막 방법이 있어.”

더글라스가 나섰다.

전에 보지 못했던 비장한 얼굴이었다.

***

더글라스가 날 데려간 곳은 저택 안의 작은 예배당이었다.

몇 년간 치우지 않은 먼지 때문에 호흡기가 약한 수잔은 따라오지 못했다.

나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대리석 신상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 세계엔 신이 너무 많았다.

더글라스가 친절히 설명했다.


“검을 든 분이 전쟁의 신 타토스 님이십니다. 늑대와 함께 있는 분은 치유의 신 모라신시아 님이시고요. 문학의 신, 농사의 신, 바다의 신 석상도 저쪽에 있습니다.”

“치유의 여신은 왜 늑대를 기르는 거죠? 눈은 왜 가렸고요?”

“모라신시아 님의 늑대는 만병의 근원을 찾아내는 영물이라고 합니다.”

“신기하네요.”

“눈을 가린 이유는 부자와 빈자, 귀족과 천민을 따지지 않고 평등하게 치유한다는 의미로 배웠습니다.”

“그런 신이 존재할 리 없어요.”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 비소를 머금었다.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 제일 먼저 죽어요. 죽음이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건 개소리예요.”

단호한 태도에 더글라스가 움찔했다.

전생의 나는 해외 자원봉사 중 전염병으로 죽었다.

전 세계를 강타한 신종 전염병에 제대로 대응한 나라는 몇 없었다.

대한민국이 가장 안전한 편에 속했으나, 나는 의료시설 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라에 체류 중이었다.

발병한 상태였으므로 고국에서 보내온 전세기에 오를 수 없었다.

전염병은 가난하지만 평화롭던 나라를 인간성이 말살된 지옥으로 바꾸어놓았다.

밀가루 한 자루, 산소 한 통에 살인이 일어났다.

매장되지 못한 시체가 거리마다 널브러져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산소호흡기를 건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부 포기하고 싶었어. 처참한 환경도, 홀로 헤쳐나가야 할 삶도. 아이를 핑계로 죽을 기회를 잡은 것뿐이야. 이런 내가 새 인생을 살 자격이 있을까?’

포기하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가끔 우울한 기억이 엄습했다.

더글라스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어딜 기어갔다 온 건지 뽀얀 먼지와 거미줄을 뒤집어쓴 상태였다.


“이건, 가문 대대로 내려온 신물입니다.”

더글라스가 붉은 가죽을 덧댄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뚜껑엔 구리 징이 박혀 있었고, 겉면에 여신 모라신시아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상자를 열자, 비로드 쿠션 위에 놓인 오래된 외눈 안경이 보였다.


“낡은 구리 모노클이네요?”

“남루해 보여도 신물입니다. 신물을 바치면 황제 폐하의 명을 거스를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뿐이지만요.”

“항명권을 절 위해 쓰시겠다는 건가요?”

“엘리자벳에겐 뭘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우린 파혼했잖아요.”

“민망하지만 제가 쓴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구절이죠?”

“사랑에 빠진 사람은 종종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른다. 허망하고 어리석다는 걸 알고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후회하기는커녕 기뻐한다. 그걸로 제 사랑이 진실함을 확인했기 때문에.”

날 응시한 채 더글라스가 읊조렸다.

얼굴인지, 뱃속인지 모를 곳이 자꾸 간지러웠다.

한결같이 곧은 남자. 그가 날 떠올리며 적어 내려간 문장.

그의 진심이 내 가슴에 한 글자씩 새겨지는 듯했다.

잠시 클라우디아와 니콜라이를 잊어도 될 듯했다.

더글라스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해도.


‘내 처지에 연애는 과분해. 더글라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희망고문하지 않는 것뿐이야. 그런데 왜 자꾸 심장이 벌렁거리는 걸까. 경망스럽게스리.’

미묘한 침묵이 작은 예배당을 쿡쿡 찔렀다.

날 바라보는 더글라스의 눈빛도 한층 그윽해졌다.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모노클을 움켜잡았다.


“고마워요. 신물은 감사히 쓸게요.”

“신물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됩니다!”

너무 늦은 경고였다.

새하얀 빛이 모노클에서 쏟아져 나왔다.

어딘가 그립고 익숙한 빛이었다.

「의로운 사망자가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발견했습니다. 특전이 주어집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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