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무슨 개망나니짓이세요? (6/97)


#6. 무슨 개망나니짓이세요?
2022.09.20.



“엘리자벳이 변한 게 한 달 전부터라고?”

황제의 집무실.

니콜라이가 고풍스러운 의자 팔걸이를 톡톡 건드렸다.

그 앞에 건장한 체격과 서늘한 눈매를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내무 대신 카레스였다.


“치료사들도 포기할 만큼 심각한 열병이었다 합니다. 완쾌한 후 사람이 돌변했다더군요. 파티, 술, 데이트 모두 끊었고요.”

“저승꽃일 가능성은?”

“꽃잎 모양의 붉은 발진, 묘한 향내, 기침, 각혈 등 저승꽃 증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엘리자벳이 저승꽃과 무관하다는 건 니콜라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타인을 통해 확인받고 싶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전에서는 소식이 없던가? 저승꽃을 연구하는 신관이 있다던데?”

“아칸소 추기경 말씀이시군요. 불러올릴까요?”

“됐다. 그보다 황비 책봉을 서두르라.”

“엘리자벳 양이 끝까지 거부하면 어찌할까요?”

“내 명령을 거역하고 살아남은 자가 있더냐?”

항명한 자에게 죽음을 내리겠다, 말하면서도 니콜라이는 무료해 보였다.

그의 심복인 카레스도 동요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런 자리였다.


“엘리자벳의 침소는 내 침전에서 가까울수록 좋다. 후궁은 너무 머니까.”

순간 카레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셀 수 없이 많은 황비가 있지만, 니콜라이가 이런 명령을 내린 건 처음이었다.


“본궁에 들인다는 말씀입니까?”

“안 될 것 있나?”

“태풍이 몰아칠 겁니다.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지요.”

“카사노바 황제가 미녀를 수집할 뿐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니콜라이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걸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평화로움을 가장하던 황궁이 요동치리란 것을.

그 태풍의 한복판에 엘리자벳이 놓이리란 것 또한.


‘누군가는 살아남을 테고, 누군가는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 누군가는 고귀한 자리에 오르게 될지도 모르고.’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는 듯 카레스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귀족원에서 황후 책봉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 터져 나오겠군요.”

“자리를 욕심내는 쥐새끼들이 너무 많아.”

“영원히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하트만의 심장의 주인은 내가 정한다.”

오직 황후만이 쓸 수 있는 루비 티아라.

하트 모양의 루비와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티아라는 ‘하트만의 심장’이라 불렸다.

황제는 그것을 이용해 명문 귀족들을 쥐락펴락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귀족들은 겉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4대 가문의 황비 중 누군가 황후가 된다면 아슬아슬하던 힘의 균형이 단번에 무너질 터였다.

권력에 눈먼 인간들은 남이 저보다 큰 권력을 갖는 걸 못 참는 법이니까.


‘난봉꾼 가면을 쓴 채 나라를 통치하려면 기술이 필요해. 아첨꾼들에게 던져줄 당근도, 날강도들을 위한 채찍도.’

엘리자벳을 가지려면 뭐가 필요할까?

그 빨갛고 매혹적인 비단 쥐를 얻으려면.

카레스가 물러가고 시종이 초콜릿 케이크를 내왔다.

니콜라이가 포크로 케이크 한 귀퉁이를 잘라 입으로 옮겼다.

다디단 초콜릿 케이크는 그가 맛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었다.


“끈적거리고 텁텁해. 원래 이런 맛이었나?”

니콜라이가 새빨간 혀로 입술을 훑었다.

그 모습이 뭇 여인들의 심장을 녹일 만큼 유혹적이라는 걸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지우려 했지만, 엘리자벳의 아리따운 얼굴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코끝에 체리블로섬 향기가 스쳤다.

굽이치는 선홍색 머리칼과 백옥으로 조각한 듯 새하얀 손,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가 자꾸만 맴돌았다.


‘키스가 아니라 사고였어. 그 여자의 계략이었는지도 모르고.’

계략이라면 대성공이었다.

그날의 키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숯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던 감각이 요동쳤다.

혀를 찌르던 달콤함, 막힌 가슴을 뻥 뚫어준 쾌청함, 눈과 귀를 멀게 한 향기로움.

그 황홀경을 어찌 잊을까.

하루빨리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다.

말을 몰고 엠스터 저택으로 달려가 엘리자벳을 데려오고 싶었다. 폭군이라 불려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몹시 못마땅했다.


“자제력을 완전히 잃었군. 여신의 늑대가 미친 건가? 아님 내가 미쳤거나.”

니콜라이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누군가 이토록 절 흔든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이 여인이라는 것도, 그 여인이 제 곁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도 모두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상대가 자신을 구원할 처음이자 마지막 희망이라는 기대조차 위로가 되지 않았다.

니콜라이가 엘리자벳의 손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봤다.

그것도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작은 손도장 위에 입술을 댔다.

숨을 깊이 빨아들였다.

그럴 리 없지만, 딸기와 벚꽃 잼 향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엘리자벳과 보낸 짧은 밤이 또다시 이성을 헝클어놓았다.


「폐하는 영원히 제 마음을 모를 거예요.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까요. 사실 기다리셨죠? 누군가 죽여주기를.」

새까만 눈동자에서 만들어진 눈물이 니콜라이의 가슴에 뚝뚝 떨어졌다.

순식간에 젖어 들었고, 오싹하리만치 서늘했다.

엘리자벳은 어떻게 이처럼 속내를 꿰뚫었을까.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던 진심을.

니콜라이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엠스터 저택에 전령을 보내라. 내일 당장 입궁하지 않으면 계약 파기로 받아들이겠노라고.”

니콜라이가 준엄하게 명했다.

작은 손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소중히 안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



“특전을 또 준다고?”

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통을 느낄 새가 없었다.

주변은 온통 하얀빛으로 가득했다.

시간은 물론 공기의 흐름까지 멈춰버린 것 같았다.


「치유의 여신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통해 질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물을 착용하시면 모라신시아의 눈동자가 발동합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블루투스 스피커도, CCTV도 없는 세계였다.

엘리자벳의 삶을 안겨준 미지의 존재가 또다시 등장한 거였다.


“너, 정체가 뭐야? 나한테 왜 이래?”

핑핑 도는 머리를 감싸며 물었다.

하얀빛은 온화하고 부드러웠지만 따박따박 제 할 말만 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거부하시겠습니까?」

 
신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갑작스럽고 당혹스러운 선택 때문에 머리가 터질 듯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거부하시겠습니까?」

 
하얀빛이 재촉했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받을게! 한국인은 못 먹어도 고니까!”

욱신. 가슴 안쪽에서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기세 좋게 말했지만 내면의 목소리까지는 외면할 수 없었다.


‘뻔뻔하게 특전을 또 받는다고? 네가 의로운 사망자라 불릴 자격이 있어? 혼자 힘으로 살아남지도 못하는 주제에!’

내게 가장 냉혹한 비판자는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괴감에 허우적댈 때가 아니었다.

선택은 이미 끝났다.


「의로운 사망자가 첫 번째 신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두 번째 신물을 찾지 못하면 모든 특전이 사라집니다.」

 
하얀빛이 선언했다.

내 뒤통수를 야무지게 후려치며.


“두, 두 번째 신물이라고?”

 


「특전이 사라지면 의로운 사망자의 영혼은 이전 세계로 되돌려집니다.」

 


“처음부터 말을 해줬어야지! 죽은 영혼을 돌려보내면 어떻게 되는 건데?”

 


「무(無)로 돌아갑니다.」

 
심장 박동이 쿵쿵 고막을 때렸다.

공기가 희박해지고, 온몸의 혈관이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주인공은 온갖 버프 다 받고 회귀하던데 난 뭐가 이래? 이럴 거면 왜 살렸어? 두 번째 신물은 언제까지 찾아야 하는데?!”

목이 터지라 외쳤지만, 하얀빛은 사라진 뒤였다.

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바닥에 주저앉았다.

모라신시아의 눈동자. 아니, 생명을 위협하는 또 다른 저주를 바라봤다.

단두대 엔딩도 피하지 못했는데, 영혼 소멸 플래그라니!

현기증과 구역질이 동시에 밀려왔다.


“엘리자벳! 괜찮으십니까?”

더글라스가 날 부축했다.

빌어먹을 존재에게 사기당한 나보다 그의 안색이 더 창백했다.


“신물을 함부로 만지면 해롭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엘리자벳이 쓰러진 건 제 탓입니다……!”

“선택은 제가 했어요.”

“네?”

“더글라스 님. 그 목소리 들으셨나요?”

“목소리라니요? 이곳엔 저와 엘리자벳뿐입니다.”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더글라스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희망의 불씨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환청이었을지도 몰라. 불면과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허해졌으니까.’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모노클을 주웠다.

모노클을 귀에 걸고 간절한 바람을 담아 두 손을 맞잡았다.

긴장감 때문인지 속눈썹이 파들거렸다.


“엘리자벳?”

더글라스가 걱정을 담아 불렀다.


“쉿! 확인해볼 게 있어요.”

더글라스의 입을 막고 조심스레 눈을 떴다.

달라진 건 없었다.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다행이다! 이건 그냥 상자고, 저건 그냥 창문이야!”

이제는 익숙해진 이 세계의 평범한 풍경이 사랑스러웠다.

그래. 전부 환각이고, 환청이었다.

오늘 저녁엔 푹 삶은 오리고기와 닭튀김으로 원기 보충을 해야지!


“그냥 죽은 벌레, 그냥 쥐 해골! 역시 세상에 신물 따위는 없어!”

벌레 사체와 쥐 뼈를 보고 좋아하는 내가 더글라스 눈에 정상으로 보일 리 없었다.


“쓰러지시면서 머리를 다치셨나 봅니다.”

“저는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멀쩡하답……!”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사라진 줄 알았던 하얀빛이 더글라스의 가슴 아래쪽을 비추고 있었다.


“설마. 안 돼!”

하얀빛이 점점 투명해지더니 더글라스의 골격과 내장기관을 희미하게 비췄다.

당황한 마음에 모노클을 벗어던지려 했다.

하지만 얼굴에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소용없었다.

새까만 눈꺼풀 아래로 더글라스의 몸속 장기들이 점점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살아 움직이는 채로!


‘위장에 맺힌 저 검붉은 반점은 뭐지? 어쩐지 불길한데?’

못 본 척할 수 없는 반점을 응시하며 물었다.


“더글라스 님. 혹 위장병 있으세요?”

“수잔에게 들으셨나 보군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많이 나아졌으니까요.”

“나아지긴요. 더 나빠지셨을 텐데요.”

“!”

“밤마다 쿡쿡 찌르듯 아프셨을 거예요. 항상 속이 부대끼고, 음식도 잘 넘어가지 않으셨겠죠.”

“아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더글라스가 물었다.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한다고 믿어주기나 할까.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는 병이 어디에 있는지, 어느 증상이 있는지, 어떻게 진행될지 상세하게 알려줬다.

나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냥 울고 싶었다.

순간 붓으로 한 올 한 올 그려낸 듯 섬세한 미남자가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다.


「울고 싶으면 맘껏 울거라. 어디 가지 않을 테니.」

그 말은 언제까지 유효할까?

니콜라이에게 묻고 싶었다.

이렇게 빨리 그와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



“이 무슨 개망나니짓이세요, 폐하?”

경멸을 듬뿍 담아 호화스러운 황좌에 앉아 있는 니콜라이를 노려봤다.

황제모독죄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니콜라이는 밧줄에 결박당한 날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삐뚜름히 올라간 입꼬리가 즐거워 보이는 건 또 뭐지?


“오는 길이 불편하지는 않았는가?”

“이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세요?”

“작은 오해가 있나 보군.”

“죄 없는 사람을 납치해놓고, 오해라고요?”

“아내가 그리운 남편도 죄 아니긴 마찬가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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