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첫 번째 프로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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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첫 번째 프로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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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첫 번째 프로포즈
2022.09.23.
니콜라이는 여유가 넘쳤다.
그 모습에 분노가 더욱 치밀어올랐다.
그가 뜻하는 대로 흘러가게 놔둘 순 없었다.
최대한 가다듬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황제라도 앞길이 구만리 같은 숙녀를 데려다 원치도 않는 결혼을 한다니,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게다가 폐하는 아이도 있으시잖아요?”
“엘리자벳 엠스터가 숙녀라니. 저기 지나가는 개가 웃는군.”
“흠흠.”
“하룻밤 연인만 따져도 백 명이 넘던데? 그대에 비하면 내 후궁은 소박하다 못해 초라할 정도야.”
“그냥 친한 오빠 동생 사이예요. 몇 번 만나서 밥 먹은 게 전부라고요.”
“변명을 좀 더 성의 있게 해보면 어때?”
“그래도 결혼은 안 했어요!”
“그건 곧 하게 될 테니까.”
니콜라이가 상큼하게 웃었다.
짜증으로 똘똘 뭉친 심장이 화들짝 놀랄 만큼 아름답고 어여쁜 미소였다.
하지만 내 인생을 망치러 온 악역의 미모에 홀릴 만큼 굶주리진 않았다.
“납치가 취미세요?”
“그럴 리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던데요?”
“필요할 땐 주저해선 안 되지. 끈기도 있어야 하고.”
도망쳐 봐야 소용없다는 엄포였다.
황좌 옆에 석상처럼 서 있던 남자가 충언했다.
“폐하. 엘리자벳 양을 풀어주시지요. 황비로 맞으시려면 걸맞은 대우를 해드려야 합니다.”
“그러다 도망치면. 카레스, 자네가 책임질 건가?”
“얌전히 계실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카레스가 고요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황제의 최측근인 카레스는 들은 대로 합리적인 사람 같았다.
비록 대리석 바닥에 무릎 꿇려진 몸이지만, 나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얌전히는 안 있을 건데, 도망도 안 쳐요. 내 발로 나갈 거니까.”
니콜라이가 저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카레스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언사에 주의하십시오. 말 한마디로 재앙이 되는 곳입니다.”
“그렇겠죠. 말꼬리 잡아서 처벌하는 게 취미인 분도 계시잖아요? 그분 특기가 납치라면서요?”
“폐하께서 늘 막무가내이신 건 아닙니다.”
“이런 상태라, 동의하기 어렵네요.”
밧줄에 묶인 채로 꿈틀거렸다.
내 모습이 어깨춤 추는 애벌레 같았을까?
카레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모든 사달의 원흉인 니콜라이는 입을 꾹 다문 채 날 관찰하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솜털 하나 남기지 않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이었다.
새로운 행성을 발견한 천문학자도 저 남자처럼 심각하고도 열렬한 표정을 짓지는 못할 것 같았다.
남편이니 아내니 너스레를 떨고 있지만,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왜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는 거야? 대체 꿍꿍이가 뭐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니콜라이가 손짓했다.
“이만 포박을 풀라.”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무릎을 폈다.
희디흰 손목에 붉은 멍 자국이 깊게 남았다.
얼얼한 통증보다 날 괴롭히는 건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니콜라이란 남자였다.
“모두 들라.”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흑자색 참나무와 황금으로 만들어진 알현실 문이 열렸다.
비단옷을 빼입은 서른 명의 귀족들이 줄지어 입장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귀족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알현 인사를 올렸다.
초상화로 익혀둔 면면들이었다.
‘4대 가문 당주들이네. 귀족원 원로도 있고, 총리대신을 포함한 내정 고위 인사가 전부 모였어.’
내가 오로지 더글라스의 도움에만 매달렸던 건 아니었다.
써도 써도 줄지 않는 재산을 이용해 니콜라이와 정치판의 정보를 모조리 모았다.
역시 돈이 좋았다.
원작을 달달 외운 애독자도 모르는 정보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니콜라이의 사생활만큼은 철통처럼 지켜지고 있었다.
업계 최고 전문가들조차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납치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어. 미친 계약서까지 만든 인간이 뭔들 못해. 하지만 귀족들을 부른 이유는 뭐지?’
니콜라이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철없는 바람둥이만은 아니었다.
뭔가 숨기는 게 있었다.
결코 아랫도리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았다.
비밀스런 황제가 별안간 황좌에서 일어났다.
주름 하나 없는 새빨간 양탄자를 밟으며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게 다가왔다.
“폐하?”
스테인드글라스와 샹들리에, 황금 석상으로 호화롭게 꾸민 대형 홀에 터질 듯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눈을 부릅뜬 귀족들이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
나는 잠시, 호흡을 잊었다.
상대가 납치범일지라도, 세계관 최고의 미남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면.
그것도 모자라 손등에 입 맞춘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
부드럽고 따스한 입술이 살갗에 닿았다.
손등을 살짝 내리누르는 압력이 심장을 거칠게 때렸다.
눈앞에서 빨주노초파남보 불꽃이 터졌다.
입술을 짓깨물었다.
달뜬 신음이 잇새로 흘러나갈까 봐.
“엘리자벳. 이만 황제의 마음을 받아주는 게 어때?”
니콜라이의 목소리는 꿀을 바른 듯 달콤했다.
날 바라보는 눈빛도 그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진심으로 연인의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 같았다.
모든 게 과장이며 거짓이라는 걸 아는 내 가슴을 뒤흔들 정도였다.
‘메소드 연기 쩌네. 배우 하면 오스카 씹어먹겠어.’
찌릿찌릿한 감촉이 손등을 떠나지 않았다.
은밀한 감촉을 지우려고 손등을 북북 문질러봤지만 소용없었다.
잠시나마 설렜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폐하. 원로들은 왜 부르신 거죠?”
“증인이 있어야 그대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아서.”
니콜라이가 요망한 입술을 나풀거렸다.
짙은 초록색 눈동자에 모략가의 총명함이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니콜라이는 능숙하게 카사노바의 가면을 다시 썼다.
그리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엘리자벳. 나와 혼인해주겠는가?”
연이은 파격에 귀족들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내 존재를 애써 무시하던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였다.
-황제가 남자 피를 빨아먹는 팜므파탈에게 단단히 홀렸군!
-후궁에서 데리고 놀기나 할 것이지 왜 여기서 이 난리야?
-설마 황후로 책봉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난봉꾼이라도 그런 짓을 하겠나? 곧 질리겠지!
비웃는 귀족들과 달리, 4명의 황비를 배출한 가문 당주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날 경계했다.
니콜라이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엘리자벳이 그대들 눈치를 보느라 대답을 못 하잖아? 명문가 황비들도 걱정스럽겠지. 보기보다 여린 사람이라니까.”
니콜라이가 천연덕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쳐내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그의 이마에 ‘난 아무것도 모르는 개망나니입니다’라고 써주고 싶었다.
아니면 ‘이중인격 주의!’ 표지판이라도.
“그대들이 우리의 혼인을 축복한다면 엘리자벳도 기꺼이 총비가 되겠지.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가?”
4대 가문 당주들의 낯빛이 푸르죽죽해졌다.
내게 쏟아지는 시선도 한층 더 흉흉해졌다.
입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제야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호! 날 이용해서 판을 흔들어보겠다? 내가 납치범한테 순순히 당해 줄 것 같아?’
***
거북한 균형을 유지하던 후궁에 총애를 듬뿍 받는 황비가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몇몇은 아첨할 테고, 몇몇은 본심을 드러내겠지. 황제를 갈아치우려 들지도 몰라.’
니콜라이는 귀족들의 반응을 지켜봤다.
예상대로 귀족들은 패를 갈라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군주가 여러 아내를 거느리는 게 무슨 흠이 되겠습니까?”
“모든 일엔 절차와 법도가 있는 겁니다.”
“황명입니다. 신하 된 도리로 받들어야지요!”
“황후 폐하가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 기회에 황후 책봉을 서둘러야 합니다!”
최근 4대 가문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입김이 커지고 있었다.
황제의 눈을 피해 지방 권력을 장악하고,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하는 귀족 토호들이 늘었다.
적국과 내통하며 은밀히 사병을 키우는 자도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영리한 쥐새끼는 꼬리를 잘 감췄다.
니콜라이는 카사노바 황제라는 가면을 쓴 채 충신과 간신을 가려내야 했다.
까다롭고도 외로운 일이었다.
‘돌림병보다 위험한 건 백성들의 공포와 불안이다. 저승꽃 보균자들을 후궁에 격리 중이란 사실을 숨겨야 해. 문제는 권력에 눈이 먼 쥐새끼들이지.’
하지만 니콜라이의 관심은 주판알을 두드리고 있을 귀족들이 아니라, 냉담한 얼굴로 관조 중인 엘리자벳에 쏠려있었다.
코끝을 간질거리는 체리블로섬 향기.
악취가 사라지자, 모든 게 한결 명료해지는 기분이었다.
‘향기로운 줄만 알았더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똑똑한 여자야. 내가 뭘 꾸미는지 이미 눈치채고 있어.’
엘리자벳은 당황하지 않았다.
거칠고 솔직한 말을 내뱉으며 끼어들지도 않았다.
가끔 무시무시한 눈으로 절 째려봤지만, 엘리자벳은 니콜라이의 기대보다 훨씬 잘 대처하고 있었다.
그녀를 선택한 니콜라이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역시 난 저 여자에게 홀리지 않았어. 자제심을 잃지도 않았지. 늘 그래왔듯이.’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했다.
저승꽃과 무관한 여인을 끌고 왔다.
지금 이 순간도 그녀가 도망칠까 봐 마음 졸였다.
니콜라이가 흉내 내 왔던 바람둥이보다 훨씬 볼썽사납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엘리자벳에게 흔들리지 않는다면 수치스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저 여인을 이용할 뿐이라면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저승꽃 악취를 내쫓는 디퓨저.
비겁한 귀족들을 분열시킬 불쏘시개.
엘리자벳의 쓸모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폐하. 더글라스 네틀톤 후작께서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니콜라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엘리자벳의 고운 얼굴에 살며시 화색이 도는 걸 놓치지 않았다.
쫓아내고 싶은 마음과 엘리자벳의 전 약혼자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솟구쳤다.
‘허울뿐인 몰락 귀족에 불과해. 직접 만나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지.’
그래야만 하고, 그러려고 했는데.
엘리자벳의 도발적인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파르스름한 불꽃을 튀기며 시선이 얽혔다.
그녀는 한 떨기 꽃이 아니라, 전장에 나선 기사처럼 꼿꼿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걸까?
니콜라이가 잊으려 했지만, 한순간도 잊을 수 없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쫄리면 꺼지시든가.’
***
“엘리자벳 양의 황비 책봉을 부디 거두어주시옵소서!”
더글라스가 모라신시아의 눈동자가 담긴 상자를 니콜라이에게 바쳤다.
황제와 쟁쟁한 귀족들 앞에서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가문 전체가 큰 화를 당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날 지키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내가 더글라스를 과소평가했어. 잘생기고 착한 데다가 강직한 남자야.’
절 버린 여자가 뭐 좋다고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걸까?
나로서는 눈곱만큼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고마웠고, 또 감동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감도 잡히지 않을 만큼.
오늘따라 유난히 넓은 더글라스의 등을 바라봤다.
“초대 황제께서 하사하신 보물이로군. 그때만 해도 제국엔 5대 명문가가 있었지.”
“송구합니다, 폐하.”
“그래. 항명권을 저 여인을 위해 쓰겠다는 건가?”
“그러하옵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나 하는 짓인가?”
니콜라이의 눈빛이 흉포하게 돌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