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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폭군에겐 자비가 없다 (8/97)


#8. 폭군에겐 자비가 없다
2022.09.27.


더글라스가 단정히 무릎을 꿇었다.

굴종의 자세를 취하고서도 하나도 비굴해 보이지 않으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엘리자벳은 저와 가문의 은인입니다.”

“그래서?”

“엘리자벳 양은 폐하와 혼인을 원치 않습니다. 부디 신물을 취하시고 그녀의 뜻을 헤아려주시옵소서.”

니콜라이는 쿡, 짧은 웃음을 던졌다.

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내가 봤던 미소 중 가장 섬뜩한 미소였다.


‘이 남자가 화사하게 웃던 그 바람둥이였다고? 폭군이 아니라 살인마 같은데? 더글라스, 도망쳐!’

내 손엔 식은땀이 맺힐 지경인데, 더글라스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것이 니콜라이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든 모양이었다.


“황명은 네가 아니라, 저 여인에게 내려진 것이다.”

“폐하!”

“항명권은 신물의 소유자인 네틀톤 가문만이 가진다. 너와 파혼한 저 여인에겐 어떤 권리도 없다.”

“하오나……!”

“여봐라, 황비를 침소로 모셔라!”

근위 기사들이 날 붙들었다.

억센 힘 때문에 절로 눈썹을 응그려졌다.


“놔!”

“저항하지 마시지요. 다치십니다.”

니콜라이의 아름다운 얼굴에 시퍼런 노기가 서렸다.


“뭣들 하느냐?”

꼴 보기 싫은 날 냉큼 치우지 못하는 기사들에게 화가 난 것 같았다.


“엘리자벳!”

더글라스가 날 향해 손을 뻗었다.

나도 그 손을 맞잡고 싶었다.


“더글라스 님!”

하지만 기사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온전한 몸으로 살고자 한다면 경거망동하지 말라.”

니콜라이가 씹어뱉듯 말했다.

그의 몸에서 폐부를 찌르는 살기가 흘러나왔다.

더글라스는 굴하지 않고 신물 상자를 두 손에 떠받쳤다.


“네틀톤 가의 명예와 충심을 받아주시옵소서.”

“네놈이 끝까지 날 거스르겠단 것이냐?”

“만일 소신이 엘리자벳과 혼인을 한다면 그녀에게 항명권이 생기는 것 아니옵니까?”

“!”

“저 더글라스 네틀톤은 이 자리에서 엘리자벳 엠스터를 아내로 맞이하겠습니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찾아왔다.

경악에 빠진 귀족들이 몰락한 후작가의 젊은 당주를 바라봤다.

갓 구운 빵처럼 촉촉하고 부드럽던 더글라스의 갈색 눈에 흔들리지 않는 기개가 서렸다.

그는 신물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각오한 자신을 가져온 거였다.

오직 폭군 니콜라이의 손에서 날 구하기 위해.


“혼인서약서를 가져왔습니다. 부디 윤허해주십시오.”

각오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더글라스가 품에서 곱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내가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5년 전 원작 엘리자벳이 더글라스를 괴롭히려고 작성한 혼인서약서였다.


「무릎 꿇고 빌어봐요, 더기. 내가 실수로 이 서류를 공증받을지도 모르잖아요?」

그 모욕을 당하고도 혼인서약서를 간직했다니.

더글라스는 어떤 마음으로 엘리자벳을 기다려 온 걸까?

엘리자벳은 그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연애도 사랑도 해보지 못한 내겐 너무 어렵고도 두려운 문제였다.


“하하하!”

숨 막히는 정적 끝자락에서 니콜라이가 폭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청록색 눈은 어느 때보다 냉정했고, 시퍼렇게 벼려진 칼날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니콜라이가 카사노바의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졌기 때문이었다.


“파혼한 여인과 다시 혼인하지 말란 법은 없지. 하지만 난 원하는 여인을 절대 놓치지 않아.”

“폐하!”

“이깟 종이 쪼가리 따위로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니콜라이가 혼인서약서를 갈기갈기 찢었다.

더글라스의 연심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단정한 얼굴에 잠시 절망이 스쳤지만, 더글라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초대 황제 폐하의 약속을 기억해주시옵소서!”

니콜라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신물 상자를 주워들었다.


“좋다. 신물을 받도록 하지.”

“황공하옵니다.”

“네틀톤 후작가와의 혼인은 인정할 수 없지만, 황비 책봉 명령은 거두겠다.”

“이 은혜, 평생을 바쳐 갚겠습니다! 네틀톤 후작가의 당주로서 맹세합니다!”

“그 맹세 부디 잊지 말라.”

긴장이 풀렸는지 더글라스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바짝 얼어있던 귀족들도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불안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니콜라이의 입꼬리가 위로 끌어 올려졌다.

악역이 왜 악역인지 보여주는 오싹한 미소였다.

이윽고 들리는 목소리.


“대신 엘리자벳 엠스터를 황후에 봉하겠다.”

“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황비와 황후는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이 명령도 거역하려면 또 다른 신물을 바쳐보든가.”

어서 가져오라는 듯 니콜라이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날 황후로 만든다고? 이 남자 미친 게 틀림없어!’

천지개벽에 버금갈 충격이 알현실을 휩쓸었다.

귀족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들부들 떨었다.

니콜라이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눈빛이 불길하리만치 예리하게 빛났다.


“그토록 엘리자벳과 함께하고 싶은 거라면, 황실의 종으로 일할 기회를 주지. 가끔 황후를 알현할 기회는 오지 않겠나?”

비꼬듯 말하고 있었지만, 한겨울 서릿발 같은 폭군의 일갈에 귀족가 당주들과 유력 인사들 모두가 얼어붙은 듯했다.


“폐하, 부디 말씀을 거두어주십…….”

“부족한가? 네 누이동생에게도 황제를 모실 영광을 주겠다.”

“폐, 폐하!”

시체처럼 파리한 안색의 더글라스가 풀썩 주저앉았다.

알현실을 떠나면서 니콜라이가 오만하게 덧붙였다.


“만백성이 기다리던 황후 탄생이다. 역사에 남을 화려한 예식을 준비하라!”

 

***

나는 황궁 안의 모처로 옮겨졌다.

위압적일 만큼 호화스러운 다른 곳과 달리 화이트와 민트색으로 화사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벽에 걸린 풍경화, 수술이 달린 비로드 쿠션, 은 촛대, 도자기 장식 등 하나같이 조화롭고 기품있었다.

침실과 드레스룸, 욕실, 응접실이 나뉘어 생활하는 데 전혀 불편이 없었다.

테라스엔 작은 정원까지 딸려 있었다.

감옥처럼 빽빽한 호랑가시나무 울타리로 사방이 막혀 있었지만.


“기사들이 밤낮으로 지킬 겁니다. 걱정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기사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공손해졌다.

그래봤자 감옥을 지키는 간수에 불과했지만.

문밖에서 철컥, 자물쇠가 잠겼다.


“빌어먹을 폭군 같으니. 날 어쩌려는 거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나는 물론 더글라스와 수잔의 미래까지 걸린 문제였다.

넋을 잃은 채 끌려가던 더글라스의 허망한 뒷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죄책감이 치솟았다.

그 모습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니콜라이의 무표정한 얼굴.

이토록 맹렬한 적의를 느낀 적이 있었을까?

원작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놈이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괜찮은 남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후회스러웠다.

그에게 키스했던 것도, 손등 키스를 당한 것도 못 견디게 수치스러웠다.


“일단 상황을 정리해보자.”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나에겐 할 일이 많았다.

이대로 니콜라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수만은 없었다.

분노와 좌절을 꾹꾹 누르며 써 내려갔다.

1. 놈은 완전히 미쳤다.

(안타깝지만 머리는 좋은 듯?)

2. 놈은 날 이용하려 한다.

(반항하는 귀족을 찾아내려는 건가?)

3. 놈에겐 자비가 없다.

(더글라스와 수잔을 구할 방법은?)

쓰면 쓸수록 암담했다.


‘혹시 몰라서 작은 술수를 부려놓았지만…… 도움 된다는 보장은 없어.’

두 번째 특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니콜라이에게 들키면 골수까지 빨아 먹힐 것 같았다.

새로운 신물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언제 영혼이 소멸할지도 몰랐다.

펜대를 까드득 씹고 있는데, 정원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울타리 노릇을 하던 호랑가시 나뭇잎이 사락사락 흔들렸다.

고양이인가? 아니면 쥐?

창가로 다가가 고개를 쭉 뺐다.


“거기, 누구세요?”

바람이었을까. 대답은 없었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뒤통수에 닿는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아. 내가 착각했나 보네.”

일부러 목소리를 돋웠다.

딴청을 피우다가, 상대가 방심했을 즈음 테라스 밖으로 몸을 날렸다.

여자 방을 훔쳐보는 스토커를 놔줘선 안 되니까!


“으아악!”

스토커가 비명을 질렀다.

하마터면 나도 소리를 지를뻔했다.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다른 인물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



“폐하. 이제라도 황명을 거두셔야 합니다.”

충신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도 니콜라이는 태연했다.


“자네도 황후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엘리자벳 양을 불쏘시개로 쓰련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훌륭한 불쏘시개 아닌가? 다들 재미난 표정을 짓더군. 특히 4대 가문 영감들이.”

즐겁다는 투로 니콜라이가 말했다.

물론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납치하듯 입궁시킨 것도, 황후 운운하며 도발한 것도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낯선 초조함은 종종 충동을 일으킨다.

그 충동을 다스리지 못했다.

한시라도 빨리 엘리자벳을 소유하겠다는 욕심 때문인 걸까.


“쥐 쫓는 연기를 피우는 게 아니라, 탄약고를 터뜨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엘리자벳 양도 고초를 당할 테고요.”

“언제부터 그녀를 걱정했지?”

“볼수록 훌륭한 분입니다.”

“……뭐?”

“악의적인 소문으로 오해했습니다만 가까이서 보니 엘리자벳 양만큼 아름답고, 우아한 분은 뵌 적이 없습니다.”

“뭘 좀 잘못 먹은 것 같은데. 괜찮나?”

니콜라이가 카레스의 말을 잘랐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는 듯 카레스가 가볍게 묵례했다.


“소신은 멀쩡합니다. 엘리자벳 양에 대해 말씀을 좀 더 올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만둬라.”

“폐하께서도 그분의 진가를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카레스의 뺨에 은은한 홍조가 피어올랐다.


‘일밖에 모르는 카레스가 왜 이러는 거지? 여자는커녕 사적인 감정은 꺼낸 법이 없는데.’

헛소리를 늘어놓는 충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니콜라이가 황금 종을 흔들었다.


“찾으셨습니까, 폐하?”

시종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궁정 치료사를 불러라. 내무대신이 크게 아프다.”

“네?”

“아마도 머리를 다친 것 같다. 서둘러라.”

“당장 데려오겠습니다!”

시종이 물러갔다.

카레스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자벳 양을 이용해 4대 명문가를 분열시키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황후 책봉을 강행하신다면 그들은 분열하기는커녕 똘똘 뭉쳐 저항할 겁니다.”

“이득은 적고 위험은 크단 뜻이냐?”

“더 위험한 짓을 꾸밀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예비 황후 암살을 시도한다면 어쩌시렵니까?”

니콜라이의 초록색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하물며 자신을 호랑이라 믿는 쥐라면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지도 몰랐다.


‘엘리자벳이 나 때문에 암살을 당해? 누군가 내 황궁에서, 내 것의 목숨을 빼앗는다고?’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가 엄습했다.

니콜라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나는 엘리자벳을 황비로 봉하지 않겠노라 말했다.”

“신물을 받으셨으니 약조를 지키셔야지요.”

“출궁시킬 수도 없다. 그녀는 이미 내 것이다.”

“황비가 아닌 엘리자벳 양을 황궁에 머물게 할 묘수가 있다면요?”

“황후와도 상관없겠지?”

“당연합니다.”

카레스가 눈을 반짝였다.

어딘가 홀린 듯한 표정이었지만 니콜라이는 충신이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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