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남자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
(9/97)
9. 남자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
(9/97)
#9. 남자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
2022.09.30.
호랑가시나무 울타리로 파고든 건 스토커도, 스파이도 아니었다.
고작 10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누구니, 넌?”
“…….”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 거 몰라? 기사 아저씨들이 이노옴, 안 했어?”
낡은 헌팅캡을 눌러쓴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햇빛을 받으면 거의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연두색 눈으로 날 올려다볼 뿐이었다.
반항적인 눈빛이었지만 소년은 라파엘로의 명화 속 천사 만큼 어여뻤다.
두 뺨은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속눈썹은 인형처럼 길고 가지런했다.
귀공자 같은 외모와 달리 소년은 하급 시종들이나 입는 옥색 재킷과 팬츠를 걸치고 있었다.
선배에게 물려 입은 걸까?
헐렁한 소맷부리엔 검은 잉크가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그보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소년의 상처투성이 손이었다.
빨갛게 부르튼 작은 손.
‘시종 견습생인가? 매를 맞거나, 따돌림이라도 당한 걸까?’
빈말로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너희 엄마 아빠 바람둥이라더라? 너 버리고 도망갔다며?」
「우리 엄마가 너 같은 애랑 놀지 말래!」
「잘난 척하지 마. 고아 주제에!」
아이들에게 악의가 없다고?
몰라서 그러는 거라고?
다 헛소리였다.
애들은 어른들이 믿는 것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누가 부자고, 누가 가난한지.
누굴 괴롭혀도 되는지, 어떻게 괴롭히면 더 재미있는지 잘 알았다.
경험담이니 믿어도 좋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꼬마야.”
과거의 날 닮은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꼬마라고 불린 것이 못마땅한지 소년의 눈매가 앙칼졌다.
“너는 웬 여자냐?”
“대뜸 반말이네? 어른한테 인사는 못 할망정.”
“헛소리 집어치우고 대답이나 해.”
“너 그러다 혼난다?”
점잖게 타일렀음에도 소년은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버르장머리 없는 말본새도 바뀌지 않았다.
“대답해, 여자. 어디서 왔고 네 아비는 뭐 하는 사람이냐?”
“꼬마야. 원한 건 아니지만 여긴 내 숙소고, 넌 불청객이야. 내가 왜 이 무례한 질문에 대답해야 돼?”
“생긴 대로 멍청하군. 당연히 대답해야지. 내가 물으니까.”
“뭐?”
“여자. 대체 누구 허락으로 이 카나리아 방에 있는 거야?”
순간적으로 뒷골이 확 당겼다.
하지만 어린애를 상대로 진지하게 화내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참교육이지!
나는 두 손으로 건방진 소년의 양 볼을 붙잡았다.
“이거 못 놔?!”
살집이 부족했지만, 찹쌀떡처럼 쫀득쫀득하고 말랑말랑한 촉감이었다.
옆으로 쭉 늘이기엔 아주 그만이었다.
소년이 눈물을 찔끔 흘리며 버둥거렸다.
“아프다고!”
“꼬마야. 이럴 땐 사과부터 하는 거야. 빌거나.”
“이 천한 여자가 누굴 가르치려 들어!”
나도 부모 없이 자랐지만, ‘부모 얼굴이 궁금하다’라는 말이 어쩌다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꼬마야. 너 친구 없지?”
소년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턱을 괬다.
또 볼을 꼬집힐까 경계하던 소년이 어깨를 움찔했다.
“처음 본 사람한테도 이렇게 못되게 구는데, 누가 너랑 놀아주겠니?”
“나 친구 많아!”
“거. 짓. 말.”
소년의 연두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제야 좀 또래 아이처럼 보였다.
“같이 논다고 다 친구는 아니야. 진짜 힘들 때 도와주는 사람. 한결같이 곁에 있는 사람이 진짜 친구거든.”
“뭐라는 거야?”
“친구가 없으니까, 개구멍이나 파고 들어와서 시비 거는 거잖아?”
“누가 개구멍을 팠다는 거야? 여긴 원래 내가……!”
소년이 입을 다물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거나, 더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창백해진 안색의 소년이 턱을 치켜들었다.
“친구 따윈 필요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그만 가줄래?”
“지금 날 쫓아내는 거냐?”
“원래 어린애 별로 안 좋아하거든. 너처럼 버릇없는 꼬마는 더더욱.”
내가 싱긋 웃었다.
소년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너처럼 무식하게 솔직한 여자는 처음 봤다. 보통 애가 싫어도 겉으론 귀여워하는 척하잖아? 욕먹기 싫어서.”
“꼬마가 별걸 다 아는구나. 어쨌든 그만 꺼져줄래?”
“여기서 뭘 하든 내 맘이야. 아무도 날 거스를 수 없어.”
소년이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 대꾸했다.
그 모습이 시종이 아니라, 어린 폭군 같았다.
“풋. 너 내가 아는 남자랑 엄청 똑같아.”
“누군데?”
“성격 못되고, 말버릇 고약하고, 남 괴롭히길 좋아하는 악당 중의 악당.”
“날 그런 놈과 비교하다니. 용서 못 한다!”
소년이 나를 향해 작은 주먹을 휘둘렀다.
말투완 달리 고양이 앞발보다 허약한 주먹질이었다.
헌팅캡 밑으로 송골송골 맺힌 땀이 보였다.
‘날씨도 선선한데 왜 땀을 흘리는 거지? 그러고 보니 안색도 창백하네.’
손을 뻗어 소년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었고, 오히려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낮은 체온이 마음에 걸렸다.
소년이 내 손을 확 뿌리쳤다.
“남자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
“나…… 남자?”
“혼인하지 않은 남녀는 거리를 둬야 하는 법이야. 그것도 몰라?”
멋모르고 떠드는 말이겠지만 잠시 감동받았다.
‘이 세계에도 유교 사상은 살아 있구나. 브라보, 남녀칠세부동석!’
오랜만에 고향의 향수를 느끼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알았으니까 이만 가. 안 가면 사람 부를 거야.”
“지금 협박하는 거냐?”
“보아하니 할 일도 내팽개치고 도망친 것 같은데. 들켜도 괜찮겠어?”
소년이 또다시 움찔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난 여기 있을 권리가 있어. 네게 물을 것도 남았고!”
나는 번거로운 입씨름을 관두고,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목청 높여 외쳤다.
“여보세요오, 기사님들! 여기 침입자가 있어요오!”
“조용히 하지 못해?!”
“어맛, 여기 개구멍도 있네? 아이, 무서워라!”
“하지 말라니까!”
소년이 울상을 지으며 내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건방진 코알라를 떼어냈다.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겠다, 여자!”
기사들에게 들려가면서도 소년이 바락바락 외쳤다.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가웠고, 다신 보지 말자.”
소년이 떠난 후 개구멍을 살폈다.
아쉽게도 내가 드나들 수 있는 크기는 아니었다.
“이건 뭐지? 쓰레기인가?”
개구멍에서 찢어진 종잇조각을 발견했다.
짜 맞춰 보니 검은 잉크로 그린 괴수 그림이었다.
흉악한 이빨과 부리부리한 눈을 정교하게 묘사한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찢어지긴 했어도 버려지기엔 왠지 아까운 그림이었다.
조각난 그림을 챙겨 방으로 돌아왔다.
소년과의 인연은 이걸로 끝인 줄만 알았다.
***
이틀 뒤.
카레스의 묘수를 받아들이기로 한 니콜라이가 엘리자벳을 찾았다.
카나리아 방 문고리엔 예전처럼 청동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니콜라이는 갈 곳 잃은 분노와 헤아릴 수 없는 그리움을 동시에 느꼈다.
이 문을 열면 라일라가 절 반겨줄 듯했다.
몇 번이나 비슷한 꿈을 꾸기도 했다.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실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니키. 약속해줘, 날 잊지 않겠다고. 우리 핀치를 지켜주겠다고.」
죽어가던 라일라의 목소리가 귓가에 잠시 내려앉았다 자취를 감췄다.
가슴뼈 아래부터 저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자신이 프란츠를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는 걸 알면 라일라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념을 지우며 자물쇠를 열었다.
“엘리자벳?”
엘리자벳은 등을 돌린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문이 열리는 기척을 들었을 텐데도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납치당한 것도 모자라, 마지막 희망인 네틀톤 후작과의 혼인도 물거품이 됐다.
니콜라이는 그녀 앞에서 약혼자를 황실의 종으로, 그 동생을 첩으로 삼겠노라 으름장을 놓았다.
‘화를 내지 않으면 이상하지. 경멸당해도 어쩔 수 없다.’
멸시받는 것엔 익숙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피하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변명하고 싶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노라고.
그러나 황제는 이해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명령하는 존재였다.
비합리적이고, 독선적이더라도 니콜라이의 말은 곧 법이 되었다.
그런데 왜 자꾸 입안이 마르는 걸까.
점점 짙어지는 체리블로섬 향기 덕분에 긴장감이 배가 되는 기분이었다.
“황궁 생활엔 좀 익숙해졌나?”
무미건조하게 묻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엘리자벳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니콜라이를 철저히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그게 뭐라고 가슴이 철렁했다.
“언제까지 모른 척할 셈이지?”
엘리자벳의 어깨를 붙들려다 멈칫했다.
그녀가 잠들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웅크린 엘리자벳이 미간을 찌푸렸다.
악몽이라도 꾸는 걸까?
눈꺼풀 아래 숨겨진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결 고운 속눈썹은 그보다 섬세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통, 공포, 불안. 그 모든 것을 합친 것 이상의 절박함.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고, 반쯤 뭉개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이러지 마. 제발 한 번만…….”
살려줘.
분명 그런 입 모양이었다.
“……안 돼! 그만!”
엘리자벳이 신음을 내뱉으며 가느다란 팔로 허공을 휘저었다.
니콜라이는 그녀의 손목에 남은 붉은 멍 자국을 발견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제 기사들이 낸 상처였다. 고로 자신이 낸 상처나 다름없었다.
엘리자벳을 함부로 다룬 기사들을 쳐 죽이고 싶었다.
어쩌면 거의 그럴 뻔했다.
죄책감이란 말로는 요약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일었다.
엘리자벳을 만난 후로 낯설고도 불쾌한 진동이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불쾌하기만 했다면 이토록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니콜라이가 정처 없이 헤매는 엘리자벳의 손을 붙잡았다.
작고 부드럽고 뜨거웠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읊조리고 말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있는 한 아무도 널 해칠 수 없다.”
제국과 황실을 위해 엘리자벳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니콜라이는 그녀를 보호해야 마땅했다.
그러니까 그녀의 두려움을 모조리 거둬 불살라버리고 싶은 마음도, 불안의 근원을 찾아내 없애고 싶은 마음도 자연스러우리라.
아무리 포장해봤자 기만에 불과했지만.
‘엘리자벳의 약혼자를 모욕하고, 그녀를 잘 꾸며진 감옥에 가둔 것이 나지. 이 여인이 두려워하는 인간이 나고, 이 여인을 해치는 것도 나야.’
니콜라이가 쓰디쓴 비소를 삼켰다.
다행히 엘리자벳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니콜라이가 손뼉을 짝, 쳤다.
“아악!”
엘리자벳이 용수철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투박하게 깨워 미안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엘리자벳이 니콜라이를 올려봤다.
잠이 덜 깬 나른한 얼굴에 봄 햇살 머금은 꽃이 피듯 고운 미소가 걸렸다.
니콜라이의 가슴에 낙인처럼 새겨질 미소였으나, 원치 않은 그녀의 속마음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뭐야? 개차반 폭군이잖아?”
“?!”
“난 또 라디아인 줄 알았네.”
쩝. 입맛을 다시며 다시 잠을 청하는 엘리자벳.
니콜라이의 짙은 눈썹이 가파르게 휘어 올라갔다.
차마 더는 참아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