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널 대신할 여자는 널렸어 (10/97)


#10. 널 대신할 여자는 널렸어
2022.10.04.



“정신 차리지 못해?”

니콜라이가 침대 시트를 확 끌어당겼다.

시트 위에 누워 있던 엘리자벳이 옆으로 데구루루 굴렀다.

침대 밑으로 떨어지기 직전, 니콜라이는 엘리자벳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우리 밖으로 도망치려는 햄스터를 포획하듯.


“꺅! 남의 방에서 뭐 하는 짓이에요?”

잠에서 깬 엘리자벳이 눈을 치떴다.

별처럼 반짝이는 이 검은 눈동자.

가다듬어지지 않은 노여움과 짜증에 가까운 당혹스러움이 함께 번뜩였다.

그녀를 둘러싼 향기는 한층 더 강렬했고 이윽고 니콜라이는 악취를 완벽히 잊었다.


‘이래서 오기 싫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지만.’

폭풍우가 물러가고 맑게 갠 하늘처럼 청명한 공기.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과 나른함.

그 모든 것이 니콜라이의 이성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즉위 이래 처음으로 살아난 감각은 더 많은 자극을 원했다.

여신의 늑대 역시 난생처음 만난 향기에 탐욕스레 침을 흘리고 있었다.


“이 방도 내 방이다. 이 나라가 내 것이듯.”

니콜라이가 차갑게 말했다.

엘리자벳이 무표정한 얼굴로 비꼬았다.


“폐하한테 상식을 기대한 제가 멍청했네요.”

“내가 몰상식하단 말인가?”

“그럼 여자 방에 노크 없이 들어오는 게 상식인가요?”

“감옥이라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후작 가문의 당주를 종으로 삼는 건요?”

이번엔 니콜라이도 대답을 찾지 못했다.

엘리자벳이 목소리를 높였다.


“충성을 맹세하는 신하의 여동생을 희롱하겠다는 선언은요?”

“난 아무도 희롱하지 않는다.”

“그걸 누가 믿어요? 황비들이 득실거리는데 새 여자를 들이지 못해서 안달이 나셨잖아요.”

제 말이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엘리자벳이 깜짝 놀랐다.

그마저도 니콜라이의 속을 뒤집으려는 수작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어머! 죄송해서 어쩌나. 또 황제모독죄를 저질러 버렸네요.”

“살려달라고 벌벌 떨 땐 언제고. 또 무슨 바람이 분 거지?”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엘리자벳.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니콜라이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엘리자벳은 새빨간 머리카락을 요염하게 뒤로 넘기며 대꾸했다.


“죽이고 싶으면 죽이세요.”

“!”

“하지만 그럴 수 없겠죠. 재미난 연극을 시작하셨으니까.”

“모르는가? 배우는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

니콜라이가 엘리자벳의 귓가에 입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 작은 분홍색 귀에 속삭였다.


“널 대신할 여자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

조금은 움찔할 줄 알았다.

그런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태연자약했다.

마치 이 모든 걸 예상했다는 투였다.


“그랬다면 진작 처리하셨어야죠. 예쁘장한 감옥에 가둘 게 아니라.”

“…….”

“말해볼까요?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엘리자벳이 검지로 니콜라이의 가슴께를 쿡, 찔렀다.

영혼이 찔린 듯했다.

태연하려 했고, 무심하고 싶던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허락 없이 옥체에 손대면 죽는다는 걸 모르나? 이 여자는 겁이 없는 건가? 아니면 날 가지고 노는 걸까?’

그보다 먼저 결정해야 할 것이 있었다.


‘다룰 수 없다면 죽여야 한다. 살릴까. 아니면 죽일까?’

니콜라이가 자신의 희고 가느다란 목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자벳이 말을 이었다.


“폐하의 연극은 막이 올랐어요. 원로들을 불러놓고 한바탕 푸닥거리도 하셨지요.”

“과연 그럴까.”

“어이없는 계약서. 막무가내 황비 책봉. 네틀톤 후작에 대한 협박……. 모든 번거로움을 감수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에요.”

“그 이유가 뭔데?”

“저야 모르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엘리자벳이 어깨를 으쓱했다.


“중요한 건 폐하가 소문처럼 문란한 카사노바만은 아니란 거예요.”

“!”

니콜라이가 내심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귀족들도 눈치채지 못한 비밀을 엘리자벳이 꿰뚫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연기가 어설펐던 걸까.

아니면 엘리자벳이 뭔가 특별한 걸까.

원치 않으나 써야만 했던 가면을 그녀가 알아봤다는 것이 고통스러울 만큼 기뻤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채근할 뻔했다.

반쯤은 감격 때문에.


“내로라하는 미녀들을 모아놓고 재미를 보셨을 수도 있죠.”

“뭐라?”

“하지만 폐하는 국정을 팽개치지 않았어요. 하트만의 국력은 성군이라 불리던 선황제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더군요.”

“그래서?”

“황제가 여자들이나 끼고 놀기 바쁜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귀족들은 제 잇속 채우기 바빠 보이던데.”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계약서 다시 쓰시죠. 이번엔 제대로. 서로 윈윈하는 방향으로.”

엘리자벳이 눈매를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볼수록 황당하고 기이한 여자였다.


‘이 여자가 술독에 빠져 파티를 즐기던 팜므파탈이라고? 웬만한 영주나 국왕보다도 훨씬 영리하다! 통찰력도 뛰어나고 놀랍도록 대담해.’

감탄을 숨기기 힘들었다.

여느 귀족 영애였다면 황제의 발밑에 엎드려 눈물로 애걸하는 것이 고작이었을 거였다.

연약함을 강조하거나, 제가 가진 재산을 내세우며 비위를 맞추려 했겠지.

그전에 황제가 정한 운명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것이 법이며 다른 길은 없다는 걸 모를 수 없으므로.

아니, 황후란 이름에 군침부터 흘렸을지도 모른다.

대륙을 호령하는 제국의 안주인.

하트만의 심장이 되고 싶지 않은 여인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엘리자벳은 달랐다.

니콜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향기를 제외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움과 달리 영원히 빛을 잃지 않는 지혜와,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를 향한 지조 같은 것들을.


“말도 안 되게 불공정하지만, 이런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저예요. 전부 물러 달라고 할 만큼 뻔뻔하진 않아요.”

“뻔뻔함은 이미 도를 넘었는데.”

“폐하가 원하는 대로 황궁에 남겠어요.”

“…….”

“하지만 황비는 안 돼요. 황후는 더더욱 안되고요. 물론 하녀도 싫어요.”

“그 정도로 더글라스가 좋은가?”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엘리자벳이 한숨을 내쉬었다.


“파혼했지만 잊을 수 없는 남자라는 뜻이군.”

“맘대로 생각하세요.”

“다시 그와 혼인해야 하니 황비는 될 수 없다는 말 아닌가?”

“저 때문에 더글라스와 수잔에게 피해줄 수 없어요. 그 두 사람은 건드리지 마세요.”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

“제 조건을 받아주신다면, 유혹게임을 받아들이지요. 폐하의 연극에도 기꺼이 동참해드리고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엘리자벳의 협조를 얻는다면 적국과 내통하는 자를 색출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터였다.

어떤 감정도 주지 않고, 그녀를 사용하겠다는 니콜라이의 의도와도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내키지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엘리자벳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분홍 머리칼의 기생오라비 때문이었다.


“먼저 유혹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패자는 무조건 승자의 뜻에 따라야 하고요.”

“지나치게 자신만만하군.”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죠?”

매혹적인 미소와 함께 엘리자벳이 작은 손을 내밀었다.


‘개차반 폭군이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는 잘해보자? 아주 들었다 놨다 하는군.’

그 손을 니콜라이가 잡은 적 있다는 걸 그녀는 몰랐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터였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니콜라이가 엘리자벳의 손을 맞잡았다.


“각오해라. 난 지는 게임은 절대 하지 않으니까.”

 

 

***

유혹게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니콜라이는 내게 ‘황태자의 교육담당’이란 자리를 제안했다.

카레스의 아이디어라고 했다.


「그대의 열렬한 팬이 되었던데. 내 수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니콜라이의 말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레스를 따라 황태자 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성이 통해서 다행이네. 니콜라이의 최측근이라니까 유용할 거야. 앞으로 잘 굴려줘야지.’

특별히 애쓸 필요는 없었다.

윙크 한 번으로 카레스는 이미 굴려지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가 되었으니까.


“쉬운 자리는 아니지만, 엘리자벳 양에게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시녀도 아니고, 황비도 아닌 미혼 여성이 황궁에 머무는 예는 드무니까요.”

“고마워요, 카레스 님.”

“그냥 카레스라고 불러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카레스가 촉촉히 젖은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내무대신이자 황제의 오른팔, 최고의 엘리트, 카레스 백작이 일개 평민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고 있었다.

죄책감 따위는 말아먹었다.

유혹게임에서 승리하려면 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었다.


‘내가 이기면 계획대로 니콜라이를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어. 클라우디아를 막고, 황제의 권력을 이용해 두 번째 신물을 찾아내야지!’

마성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고 해도 엘리자벳의 미모, 몸매, 재력이라면 승산이 있었다.

황태자 교육담당관도 나쁘지 않았다.

애 보기는 질색이지만, 황궁 도서관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는 점이 기대됐다.

카레스의 귀띔에 따르면 황궁 도서관엔 대신전보다 많은 신학 서적이 있다고 했다.

모라신시아의 신물에 대한 실마리가 그곳에 있을 게 틀림없다.


“좋아요, 카레스. 황태자 전하는 어떤 분이시죠?”

“활달하시고 기운이 넘치는 분이지요.”

“10살이면 한창 그럴 나이겠네요.”

“가끔 지나치게 활달하고, 기운이 넘쳐서 문제가 되긴 합니다. 그래도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의미죠? 왠지 불길한데요.”

“제가 말씀드리기보다 직접 만나 뵙는 편이 빠를 겁니다.”

카레스가 서둘러 화제를 바꾸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약간 찜찜했다.


‘황태자는 원작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야. 어찌나 보안에 철저한지 정보원들도 아는 게 별로 없었지. 10살 금발 소년이라던데. 어떤 애일까?’

니콜라이는 검은 비단처럼 윤이 흐르는 흑발의 소유자였다.

어떤 관리를 받는지, 머릿결이 매우 훌륭했다.

한번 매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프란츠의 생모는 6년 전, 니콜라이가 즉위하던 즈음 사망했다고 한다.

숱한 소문이 떠돌았고, 황태자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사람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황제의 분노를 사서 모조리 죽었지만.

덕분에 황궁 사용인들 사이에서 황태자에 대해 입을 잘못 놀렸다간 처형당한다는 인식이 박인 것 같았다.


‘프란츠 엄마는 금발의 연상녀겠지. 니콜라이의 첫사랑이었을 테고.’

니콜라이는 올해 28살이었다.

프란츠가 10살이랬으니까, 첫사랑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긴 건 18살이란 소리였다.


‘생물학적으로야 안 될 건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르잖아? 이 세계에선 다들 이래?’

대책 없는 난봉꾼은 아니라 하더라도 겉으로 보이는 니콜라이의 사생활은 교육적인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가 대체 뭘 보고 배우겠는가?

끌끌, 혀를 차며 황태자 궁에 도착했다.

나를 기다리는 건 황태자 프란츠가 아니라, 벌거벗은 채 울고 있는 소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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