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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 여자를 네 것으로 만들어 (11/97)


#11. 그 여자를 네 것으로 만들어
2022.10.07.



“여기서 뭣들 하는 짓이냐?”

카레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세 명의 소년이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10살에서 13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들은 아랫도리 속옷만 겨우 걸치고 있었다.


“너희는 황태자 전하의 종자가 아니냐?”

“그, 그렇습니다, 카레스 님.”

“지엄한 궁에서 소란을 벌인 이유가 무엇이냐?”

“전하께서 갑자기 옷을 빼앗으시더니, 목검으로 마구 때리셨습니다!”

가장 어린 소년이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눈물을 보였다.

짐작했다는 듯 카레스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잘 모셨어야지.”

“카레스 님도 아시잖아요? 전하께서 저희에게 화풀이를 하신다는 걸요. 흑흑.”

“전하의 심기를 보살피는 것도 너희가 할 일 아니냐.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서 분발하거라.”

소년들은 보통 시종이 아니라, 차기 황제의 측근을 꿈꾸며 입궁한 귀족 자손이었다.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는 차남이나 삼남은 이런 방식으로 앞날을 모색한다고 들었다.


‘다들 좋은 집에서 곱게 자란 아이들일 텐데…… 이런 건 아동학대 아닌가? 위계에 의한 폭력?’

어느 쪽이든 황태자는 보통 악동이 아니었다.

악동이란 표현도 너무 너그러웠다.

그간 아무도 황태자의 폭거를 막지 않았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카레스. 전임 교육담당관은 뭘 하셨죠?”

“건강 문제로 사임했습니다.”

“도망친 건 아니고요?”

카레스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소년들이 앞다투어 일러바쳤다.


“전임 선생님은 한 달도 못 버티셨어요. 전하께서 죽은 쥐를 방석에 넣으셨거든요!”

“손등에 뜨거운 홍차를 부어버리신 적도 있어요.”

“은수저로 입술을 찌르셨어요. 선생님은 떠나는 날까지 전하를 두려워하셨고요.”

카레스가 소년들을 엄하게 꾸짖었다.


“이놈들! 비밀 엄수 서약을 잊은 것이더냐? 계속 떠들면 매를 쳐 쫓아내겠다!”

한숨을 내쉬며 카레스를 노려봤다.

마성의 힘에 무릎 꿇은 카레스가 날 위해 지혜를 발휘한 줄 알았다.

아무도 원치 않는 극한직업을 알선했을 줄이야.


“카레스. 이거, 뭐라고 말 좀 해보시죠?”

“대륙 최고 수준의 봉록을 드리지요. 피복비, 품위 유지비, 휴가비도 챙겨드리겠습니다.”

“잊으셨나 본데, 저 엘리자벳 엠스터예요. 수도에서 돈 제일 많은 여자!”

“흠흠. 과목별 가정교사는 따로 있습니다. 엘리자벳 님께서는 전반적인 생활 관리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게 제일 어려운 거잖아요? 아무도 안 하려고 할 만큼.”

귀족도 아니고, 평판도 좋지 않은 여자를 무려 황태자의 교육담당관으로 임명했다.

귀족원의 반발은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한 일이었다.

제 자식들이 당할 고초를 내가 당하게 생겼으니까.


“나한테 이런 쓰레기를 먹으라는 거야? 당장 꺼져!”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쨍그랑,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풍스러운 떡갈나무 문이 열렸다.

황태자의 침전 안에서 황금 접시를 든 요리장과 시녀들이 헐레벌떡 튀어나왔다.

나는 처참하게 망가진 요리를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왜 스테이크에 발자국이 찍혀 있죠? 샐러드 위엔 드레싱 대신 잉크가 뿌려져 있네요?”

“전하의 편식이 심해지셨나 보군요.”

“이게 편식으로 보여요?”

“전하께서는 아직 어리십니다. 외롭게 자라기도 하셨고요.”

“그런 이유로 오냐오냐했겠지요. 방치한 거나 다름없겠지만요!”

잠시 침묵하던 카레스가 황태자를 두둔했다.


“요리야 또 만들면 됩니다.”

“폐하께 말씀드려서라도 훈육을 해야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왜요?”

“폐하께서 듣고 싶지 않아 하십니다.”

“네?”

“황태자 전하와 관련된 일은 모두 교육담당관이 알아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깡패 같은 황태자에, 아들에게 관심조차 없는 황제라니!

아비가 그 모양이니, 교육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짜증을 터뜨리기 직전, 카레스가 노크했다.


“전하, 내무대신입니다.”

“꺼져.”

“새로운 교육담당관이 왔습니다. 만나보시지요.”

“살고 싶다면 당장 도망치라고 전해.”

아비를 꼭 닮은 냉담한 목소리였다.

카레스가 씁쓸한 얼굴로 날 돌아봤다.


“황태자 전하를 부탁드립니다. 믿을 분은 엘리자벳 님뿐입니다. 아니, 오직 엘리자벳 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리 황태자라도 용납할 수 없어요! 못 돼먹은 버르장머리를 싹 뜯어 고쳐드리죠! 제가 이렇게 나올 줄 아셨어요?”

“……아닙니까?”

“훗. 허튼 꿈을 야무지게 꾸셨네요.”

카레스는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레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전 이만 꺼질게요. 반기지 않는 사람과 얽히는 건 딱 질색이라서요.”

“엘리자벳 님!”

“폐하의 귀한 아드님은 알아서들 해보세요.”

 

***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먹구름 아래로 북풍이 불었다.

봄이 코앞이건만 황궁은 스산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초대형 분수, 잡초 한 올 섞이지 않은 잔디 광장, 칼로 자른 듯 반듯한 정원수도 황궁에 드리운 음산한 그림자를 지우지 못했다.

니콜라이는 등불을 든 시종과 호위 기사들을 물렸다.

홀로 걸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뭘 바라는 거냐?”

혼잣말은 아니었다.

여신의 늑대는 니콜라이가 말 걸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궁으로 가자, 니키.」

“악취를 풍기는 여인들이 그리 좋더냐?”

「그 향기로운 여자에게 가면 더 좋지.」

“엘리자벳은 황비가 아니다.”

「하지만 네 것이잖아?」

“내 것도 아니다.”

「6년이나 함께한 친구를 속이려 하지 마, 니키.」

“날 그렇게 부르지 마라, 늑대.”

니콜라이가 씹어뱉듯 말했다.

하지만 늑대는 큭큭, 낮은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좀 더 솔직해져 봐. 넌 그 여자를 원해. 나보다 더.」

“주둥이 다물고 네 할 일이나 해.”

「너도 의무를 다해야지. 내게 먹이 바치는 걸 빼먹지 말라고.」

“…….”

「누군 좋아서 킁킁대는 줄 알아? 나도 신선한 다른 향기를 먹고 싶다고.」

“…….”

「하지만 어쩌겠어. 이렇게 만들어졌는데. 너는 이런 나와 공존해야 하고.」

늑대는 니콜라이가 뜻대로 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였다.

굶주린 늑대에게 황제의 권위 따위는 하찮은 것이었다.


「충고 하나 할까? 그 여자의 달콤한 향기는 후각을 마비시켜. 저승꽃을 찾는 데 방해될지도 몰라.」

“충고 따위도 집어치워라, 늑대.”

가까스로 분노를 다스린 니콜라이가 화제를 바꾸었다.


“신전에서 연통이 왔다. 남쪽에서 불길한 움직임이 포착된다고.”

「낌새가 안 좋아. 젊은 여자들만 발병하는 건 정말 이상해. 역마는 그렇게 정교한 족속이 아냐.」

“일단은 하루빨리 찾아서 격리해야 한다.”

「저승꽃이 창궐한다는 소문이 돌면 귀족들부터 도피를 시작하겠지. 나라 구석구석까지 병을 퍼뜨린다는 것도 모르고. 도망칠 수 없는 자들은 빽빽이 모여 울부짖고 고함치며 신에게 빌겠지? 지겨운 어리석음이로다.」

저승꽃이 처음 나타나던 때, 치료사와 약제사들은 무력했다.

백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두려움과 맞섰다.

민간처방도, 신앙심도 아무 쓸모없었다.

역병은 들불처럼 번졌다.

위험 자체를 부정하는 자들이 하나둘 생겨나면서 저승꽃은 걷잡을 수 없이 창궐했다.

니콜라이는 아픈 과거를 결코 되풀이할 수 없었다.


“서둘러야 해. 남쪽. 인테드 제도 국경이야.”

「니키. 먹이도 주지 않고 부려 먹겠다는 거야? 당장 후궁으로 가.」

“…….”

「뭘 망설이는 거야? 나는 그저 체취를 들이마실 뿐인데.」

“기억해라. 그 이상은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나야 상관없지만. 네 손길을 기다리는 여자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오늘따라 악취가 진동을 한다.”

「그럼 향기로운 것을 취하면 되잖아. 네 것이 아니면, 네 것으로 만들어.」

 

 


“난 너 같은 짐승이 아니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이 괴로울 때가 있었다.

이성과 자제력이 손발을 짓누르는 족쇄 같았다.

엘리자벳과 함께 있을 때면 더 그랬다.

가끔 짐승이고 싶다면, 미친 걸까?


「사는 재미도 없고, 살아야 하는 목적도 없지. 목줄에 끌려다니는 개보다 가엾은 니키.」

“닥쳐라, 늑대.”

「배고파서 미칠 것 같아. 나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이제 다 왔다.”

「좋아, 친구. 벌써 느껴져.」

니콜라이는 짙고 긴 그림자를 끌고 후궁으로 향했다.

저승꽃이 존재하고, 여신의 늑대가 함께하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의무였다.

***

기사들은 뭘 하는 걸까? 개구멍 하나 막지 못하고.

부스럭거리는 호랑가시나무 울타리를 향해 한숨을 쉬었다.


“하아…… 또 너니?”

개구멍에서 기어 나온 소년이 입을 삐죽거렸다.

오늘도 건방진 말투는 변함없었다.


“못 배워먹은 여자군. 사람을 보면 인사부터 하는 거 몰라?”

“너나 잘해. 귀찮게 하지 말고.”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점심 전까지 제국 건국사를 마저 읽고 싶었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정원을 왔다 갔다 하던 소년이 톡 쏘듯 물었다.


“어이, 여자. 너 황제 폐하의 애첩이라며?”

“남의 일에 관심 끄렴. 나도 네 일에 관심 없으니까.”

“어젯밤엔 어땠어? 폐하께서도 흡족해 하시더냐?”

“요 쪼그만 놈이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나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소년은 내 반응을 끌어낸 것이 퍽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장난감 수준이겠지. 폐하께서 너 같은 여자를 진짜로 좋아하실 리가 있겠어?”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선 넘는 꼬마를 너그럽게 이해해줄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볼 꼬집기는 너무 싱겁잖아?


“너, 정말 가엾은 아이로구나.”

무표정한 얼굴로 읊조렸다.

잘난 척하던 소년이 인상을 찡그렸다.


“너 같은 애들 잘 알아. 어른 말투를 흉내 내면서 센 척하는 나약한 애들 말이야.”

“내가 가엾고, 나약하다고?”

“아무렴. 친구도 없고, 돌봐주는 가족도 없잖아.”

“!”

“네가 잘난 줄 알겠지만 천만의 말씀. 넌 외로움을 감당하지 못해서 삐뚤어진 꼬마애에 불과해. 사사건건 시비나 걸면서 관심을 구걸하는 거지.”

정곡을 찔렸기 때문일까.

소년의 연두색 눈동자가 왈칵 뒤집혔다.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지만, 팩트는 원래 아픈 법이다.

소년도 알아야 했다.

세상의 중심은 자신이 아니고, 언젠가 맨몸으로 홀로 견뎌야 할 때가 온다는 걸.

그때 필요한 건 고집이나 허세가 아니라, 부족함을 인정하는 용기라는 걸.


“외로워, 나 좀 바라봐줘, 제발 사랑해줘. 그만 좀 앵앵거려.”

“난 그런 적 없어!”

“차라리 솔직하면 동정이라도 받을 텐데, 넌 그럴 용기도 없어. 왜? 떠들어봤자 거들떠 봐주는 사람이 없거든.”

“함부로 넘겨짚지 말라고!”

“너도 눈치챘잖아? 매달릴수록 사람들이 널 더 싫어한다는 걸. 하지만 다른 방법을 모르겠지. 배운 적 없으니까.”

“!”

“그래서 가엾고 나약하다는 거야.”

거기까지 말했을 때, 소년의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가, 감히 누구한테…….”

분을 참지 못하고 소년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렇게 보니 너무 작은 아이였다.

바르르 떠는 어깨가 두 뼘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네가 뭔데 나를 가르쳐?”

“나도 남의 인생에 참견하는 건 질색이란다. 그러게 막말도 상대를 봐가며 했어야지.”

“닥쳐!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소년이 소매로 눈물을 벅벅 닦았다.

내 앞에서 운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모양이었다.

소년의 손에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은 상처가 남아있었다.

지금껏 소년은 난폭한 행동과 독설로 자신을 간신히 지켜왔을 거였다.


‘매일 밤 울었을지도 몰라. 나도 그랬으니까.’

어느 세계나 버려진 아이들이 있었다.

강한 척하지 않으면, 무시당했다.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짓밟혔다.

그렇다고 소년이 저지른 행위들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외롭다고 누군가를 괴롭힐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나는 무릎을 굽혀 소년과 눈을 맞췄다.

더러운 시종 제복과 어울리지 않는 최고급 구두에 정오의 햇살이 반짝였다.


“나도 좀 알지. 네가 황태자 프란츠란 것 정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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