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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대 마음을 얻고 싶다 (12/97)


#12. 그대 마음을 얻고 싶다
2022.10.11.


프란츠가 눈물을 뚝 그쳤다.

정체가 들통났다는 사실이 믿기 힘든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지? 신발? 아니면 목소리?”

“아니. 기사들 덕분에.”

“놈들이 날 짐짝처럼 취급했어. 황태자에 대한 예우도 없었다고. 이 무엄한…….”

조금 전 나와 아웅다웅했던 것도 잊었는지 프란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기심이 서러움을 억누른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처음으로 귀엽게 보였다.


“기사들이 네 정체를 묻지도 않더라.”

“그게 어쨌는데?”

“기사들은 알고 있었다는 뜻이지. 네가 보통 시종이 아니고 제멋대로 황궁을 누벼도 괜찮다는 걸. 그런 10살짜리가 황태자 말고 누가 있겠니?”

“흐음. 제법인데? 또?”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프란츠가 대꾸했다.

나는 몇 가지 단서를 덧붙였다.


“개구멍도 막지 않았지. 막아봤자 소용없다는 뜻이야. 넌 내가 오기 전부터 여길 들락거렸으니까.”

“…….”

“더러운 제복 자체가 말이 안 돼. 청결이나 단정함도 황실 시종의 의무잖아. 네 종자들도 귀족 출신이라며?”

“그 멍청이들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프란츠가 뾰로통하게 답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지만 내 추리를 좀 더 듣고 싶은 기색이었다.


“또 다른 증거는?”

“네 싸구려 모자도 황궁과 어울리지 않아. 진짜 시종이었다면 바로 압수당했을걸?”

“내 모자가 싸구려라고?!”

“아니야? 비슷한 걸 시장에서 본 것 같은데.”

“내 보물을 모욕하지 마!”

낡아빠진 모자가 뭐라고 보물 운운하는 걸까.

속내를 알 수 없기는 아버지인 니콜라이와 똑같았다.


“식사 들이겠습니다, 엘리자벳 님.”

점심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카나리아 방문 아래에는 작고 납작한 또 다른 문이 달려 있었다.

덕분에 자물쇠를 열지 않고도, 음식이 담긴 쟁반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예전에 이 방을 썼던 사람도 갇혀 있었던 걸까?

나 때문에 급히 만든 배식구 같지는 않았다.


“오늘 메뉴는 오리 버터구이, 라벤더 젤리, 샐러드, 감자 크림수프네.”

반짝거리는 은식기에 담긴 요리는 하나같이 신선하고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좀 더 매콤한 뭔가를 먹고 싶었지만, 메뉴를 가릴 형편은 아니었다.


“밥 먹어야 하니까, 돌아가.”

2인용 식탁에 앉아 프란츠에게 말했다.

무릎에 냅킨을 덮는데 프란츠가 심통을 부렸다.


“교양 없기는. 손님에게 음식을 권하는 게 상식이잖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 그리고 넌 손님이 아니라, 버르장머리 없는 불청객일 뿐이야.”

“애를 싫어한다는 말이 진심이군!”

“기억해줘서 고마워.”

“그러고도 내 교육담당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허락 못 해!”

씩씩거리는 프란츠를 가볍게 무시했다.

양상추를 넓게 편 후 오리고기를 한 점 올려놓고, 겨자 벌꿀 소스를 얹었다.

마늘과 쌈장을 듬뿍 넣은 상추쌈과 비교할 수 없지만, 재료가 좋으니 맛도 좋았다.


“오늘따라 오리고기가 야들야들하네.”

한입 가득 양상추 쌈을 씹는데 프란츠의 뱃속에서 또렷한 소리가 들렸다.

꼬르륵.

프란츠가 눈동자를 굴리며 당황했다.

당황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프란츠. 설마 배고프니?”

“그런 거 아냐!”

“꼬르륵거리는 소리 들렸는데?”

“그냥 휘파람 같은 거야. 심심할 때 부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프란츠가 휘파람 부는 시늉했다.

다시 꼬르륵.

어설픈 휘파람보다 굶주림의 신호가 훨씬 크게 들렸다.

프란츠의 귀여운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새빨개졌다.

천하의 악동이라지만, 배고픈 아이를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또래보다 작고 마른 아이라면 더더욱.


“먹을래? 입맛에 맞지 않겠지만.”

진짜 먹을 줄은 몰랐다.

프란츠는 전속 요리사가 만든 최고급 요리도 쓰레기 취급하던 애 아니던가.

그런데 이게 웬걸.

프란츠가 어여쁜 연두색 눈동자를 빛내며 반색했다.


“정말 먹어?”

“어? 어. 그럼!”

“그, 그럼 조금만 먹지.”

프란츠는 식탁 앞으로 도도도 달려왔다.

목에 냅킨을 야무지게 걸고 내 몫의 식사를 먹기 시작했다.

날 그렇게 경계할 땐 언제고, 음식 하나에 신나서 달려오다니. 이렇게 보니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그 편식쟁이 맞아? 흘리지도 않고 골고루 잘 먹잖아?’

기품있는 식사 매너에서 황태자다운 귀티가 느껴졌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그다지 시장하지 않던 나도 군침이 돌 정도였다.

하얀 빵을 뜯어 먹으며 프란츠에게 물었다.


“시종들은 왜 괴롭혔니?”

“괴롭힌 적 없어.”

“옷을 벗기고, 목검으로 때렸다던데?”

“인과응보야. 놈들이 날 속였으니까.”

“뭘 속였는데?”

“…….”

“전임 선생님을 쫓아낸 이유는 뭐야?

프란츠가 말없이 날 올려다봤다.

투명한 녹안에 이글거리던 적의와 비아냥은 사라진 상태였다.

내게 허세와 독설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충고 하나 할까?”

프란츠가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소년은 대체 몇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걸까.

왜 여러 얼굴을 가져야만 했을까.

니콜라이가 카사노바 가면을 벗었을 때처럼 가슴 한구석이 선뜩했다.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안심하지 말아.”

“경험담이니?”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 네 충고에 보답으로 하는 말이야.”

내 말을 충고로 받아들였다는 게 잠시 고마웠지만, 아이답지 않은 침착함이 못내 안타까웠다.

연예인이나 재벌 걱정은 하는 게 아니랬는데.

내 주제에 황태자 걱정까지 하고 있었다.

괜한 참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프란츠는 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치료사를 불러줄까?”

“됐어.”

“이마에 홍수가 났는데? 안색도 나빠.”

“금방 괜찮아지니까 신경 쓸 거 없어.”

“그래도 진찰을 받아 봐. 큰 병이면 어쩌려고.”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프란츠가 주먹으로 식탁을 쾅, 내리쳤다.

주사를 무서워하는 아이들과는 뭔가 다른 예민한 반응이었다.

치료사를 향한 뿌리 깊은 불신과 공포마저 느껴졌다.


‘니콜라이에게 얘기해야 하나? 그 남자는 개뿔 관심도 없을 텐데. 아, 그 방법이 있지!’

묘책이 떠올라 무릎을 탁, 쳤다.

그때 문밖의 기사가 니콜라이의 등장을 예고했다.


“황제 폐하께서 곧 도착하십니다. 이번엔 깨어 있으라 명하셨습니다.”

놀란 토끼 눈으로 나와 프란츠가 마주 봤다.


‘어떻게 하지? 도망칠 시간이 없어!’

고민이 끝나기 전에 자물쇠가 열렸다.

***

엘리자벳은 오늘따라 말이 빨랐다.

들뜬 것 같기도 했고, 초조한 것 같기도 했다.


“계속 갇혀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저를 황태자 전하의 교육담당관으로 임명하시겠다면서요?”

그녀가 입술을 나풀거릴 때마다 달콤한 향이 흘러나왔다.

밤새 날 서 있던 신경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어젯밤에도 늑대는 니콜라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늑대의 손길을 기다렸던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질주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늑대는 끈질기게 니콜라이의 본능을 충동질했다.


「인생을 즐겨봐, 니키. 사는 게 좀 재미있어져.」

내색한 적은 없지만, 니콜라이는 제 안에 똬리를 튼 늑대를 두려워했다.

언젠가 그의 수작에 넘어가게 될까 두려웠다.

황비가 된 여인들은 제 미모로 황제를 사로잡았다고 확신했다.

니콜라이가 가까스로 악취를 견딘다는 걸,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이 시간을 끔찍하게 여긴다는 걸 몰랐다.

절 더듬는 여인들 틈바구니에서 카나리아 방으로 달려가고 싶은 걸 참았다.

엘리자벳이 보고 싶었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참고 또 참다가 결국 황궁 시찰을 핑계로 찾아왔다.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이런 것도 인생을 즐기는 것에 속할까? 좀 거북하고 혼란스럽긴 하지만.’

물론 괴롭기만 한 건 아니었다.

엘리자벳과 실랑이할 때마다 낯이 뜨끈거렸다.

기꺼운 내색을 숨기는 게 퍽 어렵기 때문이었다.


“교육담당관에겐 혜택이 주어진다. 자유로운 황궁 출입도 그중 하나지. 그대가 진짜 교육담당이 되리란 보장은 없지만.”

“먼저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으란 뜻이네요.”

“그대에겐 쉽겠지? 황제를 유혹하겠노라 천명한 몸 아닌가.”

“!”

“오늘은 어떤 작전인가, 엘리자벳?”

니콜라이가 엘리자벳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늑대도 이렇게 사소한 몸짓으로 여인들을 달뜨게 하곤 했다.

니콜라이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엘리자벳은 보일 듯 말 듯 흠칫거렸다.

엘리자벳의 검은 눈동자가 남자를 모르는 시골 아가씨처럼 잘게 떨렸다.

태연한 척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 니콜라이를 더 자극하는 걸 모르는 듯했다.


‘후궁에 있는 여자들관 달라. 계속 건드리고 싶어. 머리칼도, 목덜미도, 입술도.’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엘리자벳이 최대한 입술을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런 말씀은 나중에 하세요.”

“지금 하면 안 되는 이유는?”

“벌건 대낮이잖아요. 누가…… 들을지도 모르고요.”

“얌전한 척하는 게 새로운 작전인가 보지?”

“원래 조신한 성격이에요.”

엘리자벳 엠스터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알려지면 모두가 비웃을 터였다.

관심을 독차지하는 것, 잘생긴 남자를 희롱하는 것, 연심을 이용해 제 허영을 채우는 것.

그 모든 것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던 엘리자벳과 이 여인은 완전히 달랐다.

열병 이후에 사람이 바뀌었다는 말이 과연 사실일까.

하나로 대충 묶은 선홍빛 머리카락도, 소박한 원피스도 일부러 연출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처럼 화려한 외모와 달리 자연스럽고 청초했다.

그것이 본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는 건 여인에 무지한 니콜라이도 모를 수 없었다.


“왜 그런 걸 입고 있나? 엠스터 저택에서 마차로 옷을 실어 왔다던데.”

“야하고, 꽉 끼고, 불편한 파티용 드레스뿐이더군요. 재단사를 불러야겠어요.”

“제국에서 제일 뛰어난 장인을 대령하지. 최고급 비단도 사주지. 보석도 맘대로 고르도록 해.”

“저 돈 많아요.”

“하게 해줘. 나도 그대의 마음을 얻고 싶으니까.”

 

 
엘리자벳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도톰한 입술 사이로 보이는 자그맣고 새하얀 치아가 니콜라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듭 깜빡이는 눈꺼풀도, 그때마다 사락사락 소리가 날 것 같은 긴 속눈썹도 마찬가지였다.

유혹게임을 제안받았을 때 니콜라이는 유치한 시간 낭비라고 일축했다.

계약서를 썼지만, 신비로운 향기를 소유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승부욕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자꾸 진지해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게임에서 승리하면 엘리자벳의 모든 걸 소유할 수 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지. 충동이든 호기심이든 승자에겐 상관없으니까.’

니콜라이는 남녀 사이의 만남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이란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모호한 감정놀음보다 계약이 훨씬 간편하고 유익하게 느껴졌다.

마음을 얻어야 승리하는 게임이라면 이기면 그만이었다.


‘승리를 위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지 않은가? 계약만 지킨다면.’

그것이 어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니콜라이는 짐작조차 못 했다.

엘리자벳이 불쑥 이런 요구를 하리라는 것도.


“제 마음을 원하신다면, 네틀톤 가문의 신물을 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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