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신체 접촉은 제한하지 아니한다
(13/97)
13. 신체 접촉은 제한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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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신체 접촉은 제한하지 아니한다
2022.10.14.
니콜라이의 미간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묘한 긴장감은 사라지고, 매서운 침묵이 방을 가득 채웠다.
‘너무 건방지게 굴었나? 그래도 프란츠의 병을 알아내려면 모라신시아의 눈동자가 필요한데…….’
황제라서 그럴까. 내 인생을 좌우하는 악역이라서 그럴까.
유혹게임을 받아들였지만, 니콜라이와 함께 있을 때면 조바심이 나곤 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날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도 어색했다.
과도하리만큼 아름다운 얼굴도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보석을 사주겠다는 둥, 내 마음을 얻고 싶다는 둥, 연인에게나 할 법한 말을 할 때면 심장이 탁구공처럼 통통 튀었다.
게다가 이 모든 걸 프란츠가 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내 속을 알 리 없는 니콜라이가 꼬집어 물었다.
“그대에게는 더글라스가 그리 중요한가?”
이번엔 내가 미간을 찌푸릴 차례였다.
“더글라스 님과는 상관없는데요?”
“놈이 그대를 구하겠다며 바친 신물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혼인서약서와 함께 가져왔으니 예물이라 봐도 무방하지.”
“혼인, 뭐요?!”
“그걸 돌려달라니. 나와 시시덕거릴망정 놈을 향한 사랑은 변치 않는단 뜻인가?”
“잠깐!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그대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지조 있는 성격이라고. 아주 절개가 대단하군!”
뿌드득, 니콜라이의 어금니 사이에서 위험천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노로 활활 타오는 눈빛만으로 오금이 저렸다.
초원을 누비는 흑표가 먹잇감을 찾았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쫄지 마, 엘지자벳! 진짜 맹수가 아니라, 사람이야! 무슨 짓 할지 모르는 폭군이지만!’
연극의 막이 올랐다고 해도 배우는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었다.
니콜라이처럼 독선적이고 오만한 감독이 제 신경을 긁는 여배우를 용납할까?
심지어 니콜라이는 내가 절 우롱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귓불을 끌어당겨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당신 아들을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 그 망할 신물엔 내 영혼이 저당 잡혀 있고!’
끓어오르는 마음을 억눌렀다.
그리고 최대한 미소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 왜 화를 내시는지 통 모르겠네요.”
“나와 계약한 여자가 시시한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겠다는데, 그럼 너그러우랴?”
“더글라스 님은 시시한 남자가 아니에요.”
“가문을 지킬 능력이 없어서 약혼녀에 기생하던 놈이 시시하지 않으면?”
“적어도 더글라스 님은 뒤에서 남 욕은 안 해요. 목숨 걸고 절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려 했을 뿐이고요.”
“눈물겹네! 아주 대단해.”
니콜라이가 비아냥거리며 손뼉 쳤다.
그를 둘러싼 살기가 불미스럽게 요동쳤다.
또다시 더글라스에게 불똥이 튈까 염려스러웠다.
“그리고, 제가 누굴 사랑하든 폐하께서 무슨 상관이죠?”
“뭐?”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된다는 조항은 없었잖아요.”
톡 쏘듯 말했다.
니콜라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제 사생활에는 관심 꺼주세요. 저도 폐하가 후궁에서 황비 마마들과 뭘 하든 궁금하지 않으니까요.”
“……뭘 하든 상관없다고?”
“그게 우리 계약이잖아요?”
니콜라이의 잘생긴 얼굴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것도 잠시, 그림 같은 무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래. 잠시 잊고 있었군.”
“이제라도 기억하셔서 다행이네요.”
“내가 어리석었어.”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죠. 깨우치셨다니 다행……!”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니콜라이가 내 입술을 더듬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계약서 3조를 잊었나? 신체 접촉은 제한하지 아니한다.”
“강제로 막 이래도 된다는 조항은 없어요!”
“어디가 강제라는 거지? 이렇게 신사적인데.”
‘어떤 신사가 여자의 입술에 손을 대? 손 소독제도 없는 세상에서!’
발끈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민감한 감각이 움찔거렸다.
프란츠가 숨었던 식탁 아래를 곁눈질로 살폈다.
프란츠는 보이지 않았다. 소란을 틈타 도망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찌릿한 전류가 니콜라이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무례한 태도와는 달리 꽃잎처럼 보드라운 손이었다.
불이라도 붙은 듯 두 뺨이 홧홧, 달아올랐다.
익숙한 공기에 섞여든 니콜라이의 체취가 날 몽롱하게 했다.
고집스레 주름 잡힌 미간, 에메랄드처럼 고귀하게 빛나는 눈동자, 살짝 깨문 입술이 내게 뭔가 갈구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허락한 적 없었던 무언가를.
“엘리자벳.”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어지러웠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를 밀어내고 싶은데 마비라도 된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니콜라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내뱉은 숨결이 피부를 간지럽혔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낙하했다. 그가 뭘 원하는지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두 손을 꾹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때 가까스로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이런 식으로 여자들을 유혹하시나 보죠?”
유혹하는 건 그가 아니라, 나여야 했다.
마성이 닿지 않는다면 경멸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잠시 흔들렸다는 것도 숨겨야 했다.
이 게임에서 질 수 없으니.
“지금까지 통했을지 몰라도 저한테는 아니에요. 바람둥이 짓은 딴 여자들과 하세요.”
니콜라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화난 사람처럼 보였는데, 당황했다는 걸 숨기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이번엔 제가 묻죠. 새장에 가둔 여자를 희롱하는 게 폐하의 수법인가요?”
“…….”
“그렇다면 폐하는 영원히 승리하지 못할 거예요.”
무거운 침묵이 공기를 짓눌렀다.
차라리 니콜라이가 평소처럼 황제모독죄를 거들먹거렸다면 마음이 이토록 불편하지는 않았을 거였다.
불편한 적막 끝에 니콜라이가 말했다.
“계약에 대해 다시 고려해보겠다.”
“유혹게임을 그만두시겠다는 건가요?”
“그대가 황태자의 교육담당이 되지 못하면, 계약은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뒤늦게 계약서 1조를 되새겼다.
‘니콜라이 롭 예브레이와 엘리자벳 엠스터는 승패가 결정되는 시점까지 함께 생활하며 서로를 유혹한다.’
황비도, 하녀도 거부한 내가 황궁에 머물려면 프란츠의 마음부터 사로잡아야 했다.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되찾아야 해. 다른 신물에 대한 정보도 얻어야 하고. 황궁에 있어야 클라우디아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어. 게임에서 승리해야 사망 엔딩도 피할 수 있고.’
결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혹게임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불공정 계약이라며 도망치던 때와 정반대 상황이 되어버렸다.
“일주일 주겠다. 그 안에 자력으로 교육담당자가 되도록.”
니콜라이가 내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던졌다.
작은 쇠붙이는 카나리아 방의 열쇠였다.
***
프란츠를 설득하는 게 간단할 줄 알았다.
그러나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프란츠는 날 찾지 않았다.
잠잠한 개구멍 앞을 맴돌았다.
‘카나리아 방에서 프란츠는 어디까지 목격한 걸까. 만일 아빠가 내게 대놓고 찝쩍거리는 걸 봤다면 충격을 받았을텐데.’
걱정과 함께, 아까운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황태자궁으로 달려갔다.
니콜라이가 붙인 호위 기사 두 명이 내 뒤를 그림자처럼 쫓았다.
니콜라이는 기사들을 이용해 날 감시 중이었다.
혹을 달고 어렵사리 찾아왔건만 프란츠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우는 얼굴 보여줬으면 다 보여준 거 아냐? 내 밥까지 빼앗아 먹고, 이럴 수 있어?’
황태자궁 정문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프란츠가 나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버틸 작정이었다.
두 시간쯤 지났을 때 황태자궁 시종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나타났다.
“계속 거기 계시면 곤란합니다. 기다리셔도 소용없고요.”
“황태자 전하를 꼭 만나야 해요.”
“쉬 마음을 돌리실 분이 아닙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시종장께서 좀 도와주실래요?”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시종장이 딱 잘라 거절했다.
내가 눈매를 접으며 미소 지었다.
“도와주고 싶어질걸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코웃음을 치던 시종장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벌어졌다.
찡끗, 마성의 윙크를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때요. 마음이 바뀌셨나요?”
주위를 둘러보던 시종장이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비밀입니다만, 황태자 전하께선 현재 연무장에 계십니다.”
“나오는 거 못 봤는데요?”
“개구멍. 아니,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그게 어디 있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물론 비밀이지만요.”
***
시종장의 도움으로 호위 기사들을 따돌리고 황태자 전용 연무장에 숨어들 수 있었다.
프란츠는 제 키보다 커다란 목검을 들고 나무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었다.
어설픈 몸짓이지만, 훈련 태도만큼은 성실했다.
반짝이는 금발과 훈련복이 땀에 흠뻑 젖었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무리하는 거 같은데. 괜찮으려나?’
숨어서 프란츠의 훈련을 훔쳐봤다.
검술 선생은 말끔한 기사 제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였다.
카레스가 준 정보에 따르면, 그는 4대 명문가 중 하나인 브렌든 후작가의 장남 시몬이었다.
황비 로즈 브렌든의 오빠이기도 했다.
“좀 더 빨리!”
“하압!”
“잘하고 계십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아무리 봐도 열등생 같은데 시몬은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스승의 응원에 힘입어 프란츠가 다시 검을 세웠다.
보기 안쓰러울 만큼 휘청거리고 있는데 시몬은 제자가 대견한 모양이었다.
“체력이 붙으면 목검도 지금보다 가벼워질 겁니다.”
“나도 안다.”
“쉬고 싶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쉬지 않겠다.”
“역시 훌륭하십니다! 전하의 노력과 열정을 폐하께 전하겠습니다.”
프란츠의 얼굴이 잠시 밝아졌다.
하지만 훈련을 계속하기엔 너무 피로해 보였다.
어쩐지 손이 상처투성이더라니.
저러다 애 잡는 거 아닐까.
“프란츠. 물 마시고 해!”
이럴 줄 알고 시종장에게 시원한 물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프란츠에게 점수를 딸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프란츠는 크리스털 물병을 든 나를 반기기는커녕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시몬이 내게 다가와 인사했다.
“저는 황태자 전하의 검술 지도자인 시몬 브렌든이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황궁 제2 기사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거들먹거리지 않는 태도가 썩 마음에 들었다.
치맛자락을 들고 가볍게 묵례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브렌든 경. 전하의 교육담당관이 된 엘리자벳 엠스터라고 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엘리자벳 양.”
시몬이 악수를 청했다.
그 손을 맞잡으려는데 프란츠가 내 앞을 막아섰다.
“누가 내 교육담당이라는 거야? 난 허락한 적 없어.”
“프란츠?”
“감히 황태자의 이름을 부르다니. 죽고 싶어?”
“하지만…….”
“다시 날 찾아오지 마. 이건 마지막 경고야.”
아이답지 않은 살벌한 눈빛이었다.
약간은 친해진 줄 알았는데.
그날의 눈물도 충고도 잊은 것 같았다.
내가 잠시 착각했을 뿐 이게 프란츠의 본모습일지도 몰랐다.
시몬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 지치신 모양입니다. 대신 사과드립니다.”
“갑자기 찾아온 제 잘못이지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사실 엘리자벳 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