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애걸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14/97)
14. 애걸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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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애걸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2022.10.18.
“전임 교육담당관이 사임한 지 오래됐으니까요. 후임자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안도했답니다.”
그런 얘기였구나.
난 또 수작을 거는 줄 알았네.
“이렇게 미인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과찬이십니다.”
“빈말이 아닙니다! 순간 여신께서 강림하신 줄 알았습니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부끄러운지 시몬이 뺨을 붉혔다.
‘잘생긴 명문가 후계자가 순진한 구석도 있네. 귀족 영애들한테 인기 많겠는데?’
물론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예쁘단 칭찬도 감흥 없었다.
여신 같다는 말도 진부했다.
기분 나쁜 건 아니지만, 원래 내 얼굴도 아니고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니지 않나.
“말씀 마치셨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요?”
“말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완벽한 예법에 우아함을 더해 사과했다.
시몬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엘리자벳 양. 잠시만요!”
“왜 그러시죠?”
“혹시 이상한 점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요즘 전하께서…….”
시몬이 말끝을 흐렸다. 근심 어린 얼굴이었다.
나 말고도 프란츠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브렌든 경도 알고 계셨군요?”
“물론입니다. 엘리자벳 양께서는 무얼 보셨습니까?"
“창백한 안색으로 식은땀을 흘리셨어요. 치료도 거부하셨고요.”
“큰일이로군요. 폐하께 말씀 올려야겠습니다.”
“그래 주시겠어요? 병은 빨리 찾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맡겨주십시오. 황태자 전하는 제국의 미래 아닙니까!”
시몬이 두툼한 가슴 근육을 탕탕 쳤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니 한시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무관심한 아비라도 검술 스승의 말을 흘려듣지 않겠지.
‘시몬도 꽤 괜찮은 기사 같아. 남녀불문하고 클라우디아처럼 완벽한 기사는 드물겠지만.’
가슴 한 켠에 짜르르한 통증이 스몄다.
애독자 시절은 끝났다.
최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기쁘던 날도 사라졌다.
원작에 따르면 클라우디아는 반년 후면 혁명을 일으킨다.
그러나 나는 혁명을 막을 방도를 고민하기는커녕 황궁에 머무는 것조차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프란츠의 마음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앞으로 4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물론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프란츠를 마성으로 유혹해버리면 그만이었다.
***
황제 집무실 책상에는 오늘도 서류 더미가 쌓여 있었다.
지루한 업무를 이어가던 니콜라이가 카레스에게 물었다.
“오늘은 왜 엘리자벳의 일과를 보고하지 않지?”
“해야 합니까?”
“요즘 시키지 않아도 했었잖아.”
“그런 쓸데없는 보고를 왜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카레스는 진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지난 5일 동안 카레스는 묻지 않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엘리자벳이 프란츠를 설득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 중이며, 니콜라이가 그녀에게 얼마나 불합리한 요구를 했는지 따위를.
“엘리자벳의 대변인처럼 굴더니. 하루아침에 태도가 바뀐 이유가 뭐야?”
“엘리자벳 양보다 중하고 시급한 문제가 많습니다. 세금 징수, 병력 재배치, 긴급예산 등등.”
“황비도 아닌 여인을 꼬박꼬박 엘리자벳 님이라 불렀으면서.”
“폐하께서 원하시면 다시 엘리자벳 님이라 호칭하겠습니다.”
“됐다. 그보다 엘리자벳에게 승산이 있어 보이나?”
“비관적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그녀를 못마땅히 여기십니다. 황태자궁 출입을 금지하셨을 정도지요.”
“지나치게 솔직하고 직설적이니까. 핀치가 싫어할 만도 하지.”
엘리자벳은 프란츠의 모친인 라일라와 모든 면에서 달랐다.
생명력을 뿜어내는 선홍색 머리카락과 민들레 홀씨처럼 여리여리한 금발.
심연을 꿰뚫을 듯한 검은 눈동자와 웃을 때도 희미한 슬픔이 드리워진 푸른 눈.
시선을 사로잡는 빼어난 미인이라는 점은 똑같았지만, 감정 표현에 있어서는 극과 극이었다.
「바람둥이 짓은 딴 여자들과 하시죠.」
엘리자벳의 목소리가 아직도 옷깃을 파고드는 서리처럼 차가웠다.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니콜라이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본심 어딘가를 깊이 찔렸다.
쉬 흔들리고 가벼이 분노하는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했다.
모든 면에서 예측을 벗어나는 솔직한 여인.
반면, 라일라가 제 감정을 털어놓은 건 딱 한 번뿐이었다.
「내가 사랑한 남자는 오직 너뿐이야, 니키.」
목숨을 잃기 하루 전날 밤.
라일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백했다.
그녀를 간호하던 니콜라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스물두 살의 그는 그녀를 잃고 혼자 남겨질 현실을 감당하는 것만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황태자 전하의 근황을 들으시겠습니까?”
“보고하지 말라고 명했을 텐데.”
“겨우 10살이십니다. 유모도 없고, 교육담당관도 두 달째 공석이지요.”
“핀치는 강한 아이야. 독립심도 빼어나지.”
그런 면은 날 빼닮았어.
니콜라이는 입안에 맴도는 말을 삼켰다.
프란츠는 그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프란츠도 그걸 알고 있었다.
니콜라이를 불편해하는 것도, 일주일에 한 번뿐인 만찬에서 침묵을 지키던 것도 결과적으로는 그 때문이리라.
어미 뒤를 쫓는 새끼 오리처럼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기는 소년이 되었다.
그리워해서도 아쉬워해서도 안 됐다.
니콜라이는 프란츠와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것이 프란츠가 바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핀치의 소식을 듣는다면 더 보고 싶어지겠지. 서툴게 그 애의 마음을 열려다간 상황이 더 나빠질 거야.’
제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까르르 웃던 아기는 이제 없다.
니콜라이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참견도 멈출 수 없었다.
프란츠가 가짜 아비를 피하는 게 당연했다.
“엘리자벳 양이 전하를 설득하지 못하면 출궁시키실 겁니까?”
“그럴 리가.”
“어찌하시려는 겁니까?”
“한 번쯤 그녀가 애걸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네?”
“제발 봐달라고 내 발밑에 엎드려 싹싹 빌었으면 좋겠다. 여느 신민들처럼.”
엘리자벳이 니콜라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건 딱 한 번뿐이었다.
카멜리아 파티에서 처음 만나던 날 테라스에서.
니콜라이가 저에게 반하지 않았던 걸 깨닫고는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었다.
‘벌벌 떠는 모습이 햄스터 같았지. 그 모습이 참 귀여웠는데.’
니콜라이의 미간에 조각칼로 새긴 듯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귀엽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를 지울 수 있다는 듯.
‘건방지고, 분수를 모르는 여인일 뿐이다. 귀엽다니. 말도 안 돼. 게다가 혼인을 약속한 사내도 있었지.’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신물을 흘낏 바라봤다.
더글라스란 놈을 떠올릴 때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 자리에서 엘리자벳과 혼인하겠습니다!」
그보다 참기 힘든 건 엘리자벳의 두둔이었다.
「더글라스 님은 시시한 남자가 아니에요. 목숨 걸고 절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려 했을 뿐이고요.」
와드득.
니콜라이가 쥐고 있던 만년필이 두 동강 났다.
검은 잉크가 손등을 타고 흐르는데도 엘리자벳의 행동을 곱씹기 바빴다.
‘감히 내 앞에서 놈을 감싸? 그렇게 사랑하면 왜 파혼한 거야? 둘이 수작을 부리는 건가?’
니콜라이는 엘리자벳의 모든 걸 조사했다.
엘리자벳이 더글라스를 무참히 버렸다는 것도, 더글라스가 일방적으로 그녀를 쫓아다녔다는 것도 확인했다.
하지만 니콜라이의 머릿속은 ‘찰싹 달라붙어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으로 가득 찼다.
상상 속 더글라스는 비리비리한 소설가가 아니라, 복수를 꿈꾸는 야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5대 명문가에서 제외된 것이 억울하겠지. 놈이 엘리자벳을 이용하는 걸지도 몰라. 맹하고 순진한 얼굴로!’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황제가 선택한 여자와 혼인을 하겠다는 망발이 어떻게 가능한가?
생각할수록 괘씸한 놈이었다.
엘리자벳은 주변인을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조항을 추가해달라고 요구했다.
니콜라이라고 계약서를 수정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너도 했지? 나도 한다.’
카레스가 부러진 만년필 조각을 치우자마자 니콜라이는 신물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구리로 만든 낡은 모노클이 기이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네틀톤 후작을 소환하라. 응하지 않으면 체포해도 좋다.”
***
내일이면 니콜라이가 준 일주일도 끝이었다.
아직도 프란츠는 날 피하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으리라 다짐했다.
손을 더럽히는 것도, 악녀로 사는 것도 피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프란츠에게 마성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10살 꼬마에게 윙크하고 손 키스를 날리라고? 내 관심을 구걸하는 프란츠를 어떻게 봐?! 한 아이의 인생을 망칠 수는 없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허울뿐이라도 나는 프란츠의 교육담당관이 되려는 중이었다.
사악한 꼼수를 쓰면서 무슨 선생 노릇을 하겠는가?
유교걸의 마지막 양심을 무너뜨리기 힘들었다.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을 때 시종이 찾아왔다.
“황태자 전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쓰러져요? 많이 아픈가요?”
“다행히 곧 의식을 되찾으셨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받지 않으시겠답니다.”
“억지로라도 안 될까요?”
“또 집기를 때려 부수실 겁니다. 치료사들을 협박하실 수도 있고요.”
“시몬 경께서 주청했을 텐데. 폐하께서 또 무시하셨나 보군요!”
어떻게 아픈 아이를 이렇게 방치할 수 있을까?
그러고도 아비, 아니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무슨 병인지만 알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을 텐데.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다가 본궁으로 달렸다.
***
“네틀톤 후작가의 신물을 훔쳐달라고요?”
어이없다는 듯 카레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장 서둘러야 해요!”
“내무대신인 제가 왜 도둑질을 합니까?”
“잠깐 빌리는 것뿐이라니까요?”
“범죄 공모는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카레스. 제 부탁을 거절하시는 거예요?”
“거북하군요.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말씀드린 기억은 있습니다만.”
무뚝뚝하다 못해 쌀쌀맞은 반응이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카레스는 기쁘게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해줬다.
지금의 카레스는 너무 이성적이었고 냉철했다.
‘마성의 효력에 기한이 있는 걸까?!’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유혹하는 것만 생각했지, 그 이후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원작에도 엘리자벳의 능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악역 조연의 설정이니까 그러려니 했을 뿐이었다.
돌이켜보니 의아한 부분도 있었다.
‘원작 엘리자벳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성을 사용했을 거야. 모두 유혹당했다면 어떻게 나쁜 소문이 날 수가 있지? 주위에 추종자만 가득했을 텐데?’
시간이 지나 저절로 마성이 풀렸다면?
그들도 카레스처럼 의아하고 불쾌했을 거였다.
의지와 상관없이 엘리자벳에게 꼬리를 흔들었을 테니까.
‘그래서 매일 밤 파티에 갔던 건가? 마성의 효력이 떨어지기 전에 다시 유혹하려고!’
원작 엘리자벳은 타인의 사랑을 손쉽게 얻었다.
인간관계의 복잡한 문제를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더글라스나 수잔처럼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은 드물었다.
반면에 그녀를 피하거나,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을 거였다.
마성을 쓸수록 엘리자벳은 공허해졌을 테고, 더 많은 관심을 원했을 거였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지금 중요한 건 원작 설정이 아니었다.
“신물이 어디 있는지만 가르쳐줘요, 카레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