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충동구매를 권해보겠습니다
(15/97)
15. 충동구매를 권해보겠습니다
(15/97)
#15. 충동구매를 권해보겠습니다
2022.10.21.
카레스에게 회심의 ‘윙크와 손 키스 곱빼기’를 날렸다.
효력이 끝났더라도 다시 유혹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금세 밝혀졌다.
“신물은 폐하의 집무실 책상 위에 있습니다. 폐하께서 대신들을 알현 중이시니, 지금이 기회입니다.”
열렬한 추종자로 돌아온 카레스가 몽롱한 눈으로 답했다.
이번엔 며칠이나 갈까?
아무래도 몇 가지 실험을 더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본궁 3층에 있는 황제 집무실은 경비가 삼엄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었다.
윙크 한 방에 기사들은 순한 양이 되었으므로.
“피곤할 텐데 쉬었다 오세요. 이걸로 보양식도 잡수시고요.”
“감사합니다, 엘리자벳 님.”
내가 건넨 돈주머니를 들고 기사들이 사라졌다.
뇌물을 받았으니 마성이 풀려도 딴소리 못 할 거였다.
처음엔 좀 놀랐지만, 효력이 사라지는 쪽이 훨씬 간편했다.
‘좀 더 자주 써도 되겠네!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까 봐 망설였는데. 나중을 생각해서 무리한 요구는 하지 말자!’
주님.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 주세요!
무신론자지만 기도가 절로 나왔다.
나는 무려 황제의 물건을 훔쳐야만 했다.
땀 때문에 미끈거리는 손바닥을 드레스 자락에 문질렀다.
황금 사자가 조각된 문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카레스의 말대로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는 책상 위에 대충 놓여 있었다.
니콜라이의 무신경이 모처럼 반가웠다.
“찾았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네!”
이것으로 프란츠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쁘면서도 마음이 급해졌다.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둑질하면서 보람을 느끼나?”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알현실에 있어야 할 니콜라이가 문에 기대 있었다.
이마에 맺혀있던 식은땀 한 방울이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폐하가 왜 거기서 나와요?”
“내가 못 올 곳에 왔나?”
“제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죠?”
“모르려야 모를 수 없지. 그대의 체취가 진동하니까.”
니콜라이가 숨을 깊이 빨아들였다. 그것만으로 내 체취를 맡을 수 있다는 듯,
나한테 냄새가 난다는 건가? 목욕을 아침저녁으로 하는데?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날 바라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분노는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위태로운 번뜩임이 느껴졌다.
니콜라이가 다가왔다.
주춤주춤 물러섰지만, 도망칠 곳은 없었다.
책상을 두 손으로 짚은 채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았다.
‘스킨십은 딴 데 가서 하라고 했는데……!’
떨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이제 나도 니콜라이의 단단한 몸에서 흘러나오는 청결하면서도 포근한 체향을 느낄 수 있었다.
교육담당이 되기 전까지 유혹게임을 재고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니콜라이는 또 내 마음을 헝클어놓았다.
그저 몇 걸음 다가오는 것만으로.
“기억해, 엘리자벳. 절대 내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어딜 가든 내가 쫓아간다는 걸.”
아슬아슬한 숨결이 흩어졌다.
시선이 고스란히 전해지지만, 못 견딜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물론 손을 뻗으면 닿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처럼 허락 없이 날 만지지 않았다.
‘추근대는 쪽보다 무심한 쪽을 선택한 거야? 아니면 무슨 새로운 작전인 건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상대는 납치와 감금을 즐기는 폭군이었다.
아들이 아프다는 보고를 받고도 모른 척하는 비정한 인간이기도 했다.
배려 같은 건 영원히 모르겠지.
“후각이 예민하시네요. 후각보다 청각이 발달하셨다면 좋았을 테지만요.”
“그건 왜지?”
“시치미 떼지 마세요. 아드님 건강 문제에 대해 보고 받으셨잖아요.”
“……프란츠가 아프다는 건가?”
니콜라이의 얼굴에 충격이 덧씌워졌다.
진심이라는 걸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놀란 기색이었다.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시네요?”
“자세히 말해. 핀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니콜라이가 내 팔을 붙들었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그의 팔을 뿌리치며 대꾸했다.
“협박하지 않아도 말할 거예요.”
“아, 미안.”
니콜라이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날 붙잡았다는 것조차 몰랐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또 다른 가면을 쓴 것 같지도, 부성애를 연기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될까 봐 겁에 질린 사람의 눈빛은 결코 꾸며낼 수 없었다.
“당장 황태자의 주치의를 호출하겠다. 나머지는 가면서 듣지.”
“진작 그러는 게 좋았어요. 황태자 전하께서 계속 진료를 거부하셨거든요.”
“왜 그런 짓을 했지?”
“교육담당관도 아닌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아버지도 모르는걸.”
니콜라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죄책감을 견디기 힘든 표정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니콜라이는 프란츠에 관한 보고를 일절 거부했다.
두 사람이 만나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고 들었다.
아이를 방치하는 전형적인 나쁜 부모인 줄 알았는데, 니콜라이의 반응은 달랐다.
대체 니콜라이와 프란츠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사용인들은 아무 말도 못 했을 거야. 프란츠에게 입막음을 당했을 테니까. 하지만 시몬은? 프란츠가 제국의 미래라며?’
저만 믿어 달라던 시몬의 번드르르한 낯짝을 구둣발로 밟아주고 싶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니콜라이가 내게 손을 뻗었다.
“서둘러야겠어, 엘리자벳.”
그 손을 맞잡고 싶었던 건 그를 만난 후 처음이었다.
서로에게 의지한 채 어딘가로 달려가고 싶었던 건 엘리자벳으로 빙의한 후 처음일지도 몰랐다.
나는 크고 뜨거운 손을 가진 남자를 새삼 바라봤다.
***
“시몬. 남쪽 국경에 서찰을 보냈느냐?”
후드를 눌러쓴 여인이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달빛을 받은 자태는 더없이 우아했다.
시몬이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곧 좋은 소식이 당도할 겁니다, 마마.”
“황태자는 철저히 고립시키고 있겠지?”
“염려 마십시오. 황태자가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엘리자벳이란 계집은 어떻더냐?”
“평민이 주제넘게 굴더군요. 잘난 미모를 믿고 설치는 천박한 여자입니다.”
“아주 예쁜가 보구나.”
여인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여 있음에도 시몬은 서둘러 변명했다.
“진귀한 다이아몬드와 시정잡배가 가지고 놀던 구슬을 어찌 비교하겠습니까? 마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싸구려에 불과합니다.”
“다시는 그 계집과 날 비교하지 말아라.”
“송, 송구합니다!”
“미남을 밝힌다던데. 시몬, 너라면 유혹할 수 있겠지?”
“밑밥을 좀 던져두었습니다. 하오나 폐하께서 눈독 들인 계집을 건드리면 꼬리를 밟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두렵다는 것이냐?”
서릿발처럼 매서운 말투였다.
여인의 분노를 사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걸까.
시몬의 낯빛이 퍼렇게 질렸다.
“두렵지 않습니다! 부디 맡겨주십시오!”
“날 실망시키지 말아라, 시몬.”
“황태자는 어찌할까요?”
“없애버리는 게 제일 좋지.”
“!”
“그래야 폐하께서 날 취하실 것 아니냐? 제국엔 새로운 후계자가 필요해. 폐하의 고귀한 혈통을 이은 진짜 후계자가.”
여인이 즐겁다는 듯 재잘거렸다.
시몬이 좌우를 살피며 마른침을 삼켰다.
비밀 정원을 찾아올 사람은 없지만, 발각당한다면 죽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 계집이 폐하의 총애를 받게 된다면 아주 골치 아파진단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알겠습니다, 마마.”
“황태자를 당장 처리할 필요는 없다. 언제든 목을 꺾을 수 있도록 준비하거라.”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여신도, 가문도, 아버지도 믿지 않아. 내가 믿는 건 오직 너뿐이다, 시몬.”
여인이 흰 손으로 시몬의 턱을 더듬었다.
부르르 떨던 시몬이 감격에 차 대꾸했다.
“하트만의 심장을 가질 수 있는 여인은 오직 마마뿐입니다.”
“나도 그리 생각한단다. 하지만 폐하께서 날 황후로 삼지 않으신다면 어찌하겠느냐?”
“새 황제를 옹립할 수밖에 없겠지요.”
“아니, 내가 선택한 남자가 새 황제가 될 것이다. 네가 되지 말란 법도 없지!”
“마마!”
요사스런 웃음을 남기고 여인이 떠났다.
시몬은 달뜬 얼굴로 여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황궁에 핏빛 태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
프란츠를 살피던 늙은 주치의가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별다른 이상은 없으십니다. 피로가 쌓이신 모양입니다.”
격렬하게 저항하던 프란츠는 불퉁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틈틈이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날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아무래도 교육담당관이 되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탕약을 드시면 금방 쾌차하실 겁니다.”
“한 시도 눈을 떼지 말고 황태자를 살펴라. 그리고 내게 직접 보고하도록.”
니콜라이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도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 아들 앞이라고 센 척하기는.
참다못한 프란츠가 항변했다.
“약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건 내가 판단한다.”
“폐하는 절 믿지 못하시는군요.”
“못 믿다니?”
“걸핏하면 쓰러지는 나약한 아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런 적 없다.”
“그럼 약 먹으란 명을 거둬주세요.”
대화 내내 프란츠와 니콜라이는 서로를 마주 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떨군 소년과 무심한 척 체통을 지키는 황제를 유심히 관찰했다.
“내 뒤를 이을 황태자를 걱정하는 것뿐이다.”
“좀 더 믿음직한 후계자를 원하셨을 텐데 죄송해요.”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둬라.”
“죽을힘을 다해서 노력할게요.”
“하지 않아도 된다.”
프란츠의 얼굴이 부쩍 어두워졌다.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니콜라이의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제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프란츠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다.
‘두 사람 다 글러 먹었어. 내버려 두면 반대 방향으로 땅을 팔 거야. 그리고 영영 만나지 못하겠지.’
한숨을 푹 내쉰 후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싫어했다면 이런 식으로 끼어들지 않았을 거였다.
“실례지만 좀 끼어들어도 될까요?”
니콜라이와 프란츠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돼.”
누가 부자지간 아니랄까 봐.
뭐, 그런다고 그만둘 내가 아니지만.
“방금 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너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니까 얌전히 있어’로 들려요.”
“그럴 리가.”
“폐하의 선의를 전달하려면 ‘지금 이대로 충분하니까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라.’라고 하시는 게 좋아요.”
“…….”
“프란츠, 네가 걱정되어서 죽을 뻔했다는 말을 덧붙이면 더 좋고요.”
니콜라이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충고했다.
못마땅한 듯 니콜라이가 입가를 실룩였다.
프란츠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전하도 의심 좀 그만하세요. 폐하의 걱정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시라고요.”
“의, 의심한 적 없어!”
“그럼 자격지심이겠네요. 폐하께서 무슨 말을 하든 꼬아 듣는 걸 보니.”
“!”
“두 분은 특훈을 받아야 해요. 서로를 이해하고 한 걸음 다가가기 위해서!”
프란츠가 연두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콜라이의 청록색 눈동자는 예리하게 빛났다.
둘 다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대로가 좋다면 참견하지 않을게요.”
“…….”
“하지만 두 분이 원하신다면 관계 개선을 도와드리죠. 어쩌실래요?”
“무슨 특훈을 하겠다는 거지?”
“궁금하면 수업료부터 내세요.”
“수업료?”
니콜라이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언제고 이 말을 돌려주고 싶었다.
“설마 공짜인 줄 아셨어요?”
니콜라이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손가락을 불안하게 까딱거리기도 했다.
충동구매를 망설이는 고객들이 흔히 보이는 증상이었다.
‘미끼를 물었네? 그럼 몰아붙여야지!’
나는 니콜라이가 지갑을 활짝 열도록 돕기로 했다.
모처럼의 횡재를 놓칠 수야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