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엘리자벳, 정의를 바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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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엘리자벳, 정의를 바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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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엘리자벳, 정의를 바로 세우다
2022.10.25.
“제 능력을 못 믿으시나 본데. 실력을 보여드리죠.”
손깍지를 끼고 우드득 소리를 냈다.
목도 두어 차례 풀었다.
다음은? 주치의란 노인네의 정체를 까발릴 차례였다.
“치료사님. 전하께 정말 특별한 문제가 없나요?”
“그렇습니다. 주치의인 제가 제일 잘 알죠. 허허.”
그런다고 속을 줄 알아?
차가운 비소를 머금은 채 주치의를 노려봤다.
“주치의는커녕 치료사 자격도 없는 돌팔이군요.”
“뭐라고요?”
“아니면 천하의 거짓말쟁이 거나요.”
“당치않은 모욕입니다!”
주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니콜라이의 시선은 내가 착용한 모노클에 닿아 있었다.
“엘리자벳. 그 신물은 언제 훔친 거지?”
“잠시 빌린 것뿐이에요.”
“도둑질 실력을 보여주려고 큰소리친 건가?”
“곧 은인이라 부르실 테니까, 두고 보세요.”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통해 프란츠를 스캔했다.
하얀빛이 이리저리 맴돌며 신체를 투명하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역시 문제가 있어. 몸 안에 붉은색 반점이 물감처럼 흩뿌려져 있잖아? 아주 옅기는 하지만……!’
모라신시아의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그것이 무언지 몰랐을 거였다.
내버려 두면 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 또한.
“황태자 전하는 중독이 되셨어요.”
“중독이라니?!”
니콜라이의 두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쏘아져 나왔다.
나는 호흡을 고른 후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미량의 독이 체내에 계속 쌓이고 있어요. 당장은 위중한 상태가 아니지만 바로 해독제를 써야 해요.”
“누군가 황태자를 시해하려고 한다는 뜻이냐?”
“안타깝게도요.”
“엘리자벳.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제국이 뒤흔들릴 대사건이다.”
니콜라이가 흉흉한 기세로 몰아붙였다.
반면 프란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 물어보세요. 눈치채고 계셨던 것 같으니까요.”
“독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시체처럼 푸르죽죽해진 주치의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대대로 황가를 모셔온 명의 가문의 후손입니다! 전하께서 중독되셨다면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누가 몰랐대요? 알고서 숨긴 거죠. 당신이 독약을 탕약에 섞었을지도 모르고요.”
“모함입니다, 폐하! 저 여인이 제게 누명을 씌고 있습니다!”
“폐하. 독 전문가를 불러주세요. 누구 말이 진실인지 금방 밝혀질 테니까요.”
“악녀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궁 밖에서 초빙해 오는 게 좋을 거예요.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허공에서 나와 니콜라이의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겠다는 듯 그는 침묵을 지켰다.
얼핏 태연자약해 보였지만, 아니었다.
나는 니콜라이의 손가락이 보일 듯 말 듯 떨리고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동요를 숨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다.
‘아들에게 무관심하다는 건 오해였어.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나은 사람일지도 몰라.’
매번 실망하면서 왜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혹시 니콜라이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걸까?
***
수도의 독 전문가들이 총출동했다.
해독 전문 치료사, 약제사, 약초꾼들로 황태자궁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들의 말은 한결같았다.
“미약하지만 중독되신 것은 틀림없습니다. 본격적인 증상은 없었을 텐데 어떻게 찾아내셨습니까?”
“알 것 없다. 억만금을 써도 좋으니 황태자를 해독하라. 최대한 빨리. 완전무결하게.”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전문가들이 물러가고 니콜라이가 근위대를 소집했다.
“주치의의 제자, 가족, 사용인 모두를 체포하라. 황태자궁을 드나든 모든 인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조사토록 하라!”
“예!”
“단, 고문에 의한 자백은 용서치 않는다. 어린 시종들과 여인들이 놀라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알아들었느냐?”
“존명!”
니콜라이에게 이런 섬세한 면이 있었다고?
아이와 여자를 배려하는 그가 새삼 달라 보였다.
‘폭군이면 모조리 잡아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침착하고 체계적이잖아? 뭐부터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야. 덕분에 큰 소란이 벌어지진 않겠어.’
니콜라이는 흥분하는 대신 빠르게 사태를 수습했다.
프란츠를 탓하거나 몰아세우지도 않았다.
원작과 달리 정서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유능한 황제 같았다.
“저는 죄가 없습니다!”
“살려주십시오, 폐하!”
몇몇이 거칠게 저항했지만, 대부분은 기사들을 순순히 따라나섰다.
나는 체포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팝콘과 콜라가 있었다면 더 즐거웠을 것 같았다.
‘배후가 얼른 잡혔으면 좋겠다. 어린애에게 독약을 쓴 놈은 죽어 마땅해!’
내가 일부일처제만큼 열광하는 게 권선징악이었다.
착한 사람이 성공하고, 나쁜 놈들이 망하는 게 당연한 이치건만 현실은 달랐다.
악하고 못된 놈일수록 뻔뻔하게 잘살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니콜라이처럼 집요한 남자가 범인을 놓칠 리 없었다.
정의로운 일을 한 것 같아서 보람되었다.
니콜라이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대는 나와 갈 곳이 있다.”
벗어날 수 없지만, 고통스럽지 않은 압력이었다.
잠시 남녀칠세부동석과 남녀유별을 잊기로 했다.
커다란 손을 가진 남자가 내 취향이라는 걸 방금 깨달았으므로.
***
니콜라이가 데려간 곳은 황태자궁 후원이었다.
각양각색의 꽃나무가 화사하고도 달콤한 향기를 내뿜었다.
꽃나무에 둘러싸인 퍼걸러는 최고급 가구와 비단 쿠션으로 안락하게 꾸며져 있었다.
동화 속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광경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시종들이 차를 내왔다.
모든 걸 털어놓으라는 듯 니콜라이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깍지낀 손 너머로 신비로운 녹안이 예리하게 빛났다.
“주치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어떻게 알긴, 모라신시아의 눈이 똑똑히 보여준 걸 하도 아니라고 우겨대니 알았지.
하지만 모든 걸 다 털어놓긴 일렀다.
“전하께서 치료를 극구 거부하는 게 좀 이상했어요.”
“그것뿐이냐?”
“전하께서 시종들 옷을 벗기고, 전임 교육담당관 입에 은수저를 집어넣었다는 이야기 들으셨어요?”
“모른다.”
“다들 전하의 괴팍한 성품 때문이라고 말하더군요.”
“핀치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니콜라이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프란츠를 오해할까 봐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쁘다더니.
황제의 인간적인 면모에 웃음이 났다.
“알아요. 제가 본 전하는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분이셨어요.”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피는 못 속인다고, 말버릇은 고약하지만…… 전하께서 무슨 행동을 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프란츠가 혼자 범인을 찾았다는 것이냐?”
“전하는 황금 접시에 담긴 요리는 드시지 않았지만, 은접시에 담긴 요리는 잘 드셨어요. 그게 무슨 의미일까요?”
“황태자궁 사람들을 믿지 못한다는 뜻인가?”
“저에게도 조심하라고 충고하셨지요.”
“프란츠가 그런 말을 했다고?”
“교육담당자들을 쫓아낸 이유도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자신 때문에 그들도 중독될까 봐.”
일주일 동안 나는 프란츠를 설득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였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마성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접근법을 달리했다.
‘설득보다 프란츠를 이해하는 게 먼저야. 프란츠는 무슨 생각을 할까? 무얼 제일 두려워할까? 프란츠의 행동에 실마리가 있을 거야.’
프란츠가 했던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
「살고 싶으면 당장 도망치라고 전해.」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안전하지 않으니까.」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진실이 어슴푸레 드러날 듯했다.
그것으로 부족했다.
황궁 사용인들을 통해 프란츠의 정보를 모았다.
다들 입 여는 걸 두려워했으나, 마성과 뇌물 앞에서 끝까지 버티는 사람은 없었다.
“전하께서 극도로 날카로워진 건 1년 전부터로 알아요.”
“사춘기가 빨리 온 거라 하더군.”
“그럴 수도 있지만, 그 시점에 뭔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그게 뭘까?”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중독 사건 배후도 찾고, 전하의 마음도 열어야 하잖아요?”
“핀치는 왜 나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해결하려 했을까…….”
못내 안타깝다는 듯 니콜라이가 중얼거렸다.
어린 아들이 혼자 전전긍긍했을 걸 상상하니 속이 쓰린 모양이었다.
“엘리자벳. 짐작 가는 바가 있나?”
“대충은요.”
“당장 말하거라. 공로에 걸맞은 상을 내리겠다.”
니콜라이가 반색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의 열쇠로 자물쇠를 열어봤자 소용없어요. 새로운 자물쇠가 또 생길 테니까요.”
“한시가 급하지 않은가.”
“급할수록 돌아가란 말도 있어요.”
“…….”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면 이해가 우선이에요. 대충 넘어가면 안 되는 단계죠. 많이 고민해보세요.”
“이게 그 특훈이라는 건가?”
니콜라이가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미간을 구겼다.
“아무에게나 공개하지 않는 특별훈련법이랍니다.”
여유를 부려봤지만 소용없었다.
니콜라이는 더 많은 진실을 원하고 있었다.
“그대가 내 생각보다 똑똑하다는 건 잘 알았다.”
“감사해야 하나요?”
“관찰력, 논리력, 행동력 모두 나쁘지 않아.”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데.”
“그것만으로 설명이 안 돼. 프란츠가 중독됐다는 걸 어떻게 확신했지? 초능력이라도 가진 것이냐?”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면 물러서지 않을 남자였다.
찻잔을 입가로 옮겼다.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인 후 준비한 답을 꺼냈다.
“황궁에 오기 전, 제가 몹시 아팠던 건 아시나요?”
“열병을 앓고 개과천선했다는 것도 안다.”
“그때 이후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보여요.”
“?”
“때때로 그 무언가가 말을 걸어요. 그럼 저는 치료사에 빙의한 것처럼 사람들의 병을 찾아내고…….”
“영매라도 되었다는 뜻이냐?”
미심쩍다는 듯 니콜라이가 되물었다.
“바로 그거예요!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요.”
“못 믿겠는데.”
“저도 못 믿겠어요. 믿고 싶지도 않고요.”
“흐음.”
“나 살기도 바쁜데 남이 어디 아픈지 알아서 뭐 해요? 모르고 싶은데 막 보이니까 저도 미치겠다니까요?”
약간의 거짓을 섞었지만 대부분 진실이었다.
니콜라이는 내 말을 믿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내밀었다.
“신물은 돌려드릴게요. 폐하의 아드님을 위해 빌린 것뿐이니까요.”
“신물이 왜 필요했지?”
“이것을 지니면 영기가 더 강해져요. 요 신물 덕분에 중독 사실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어요.”
내가 모라신시아의 눈동자에 대해 털어놓지 않은 건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1. 말해봤자 믿지 않을 테니까.
2. 나도 제대로 아는 게 없으니까.
3. 이용당하거나 실험대상이 될 수 있으니까.
4. 괜히 주목받고 싶지 않으니까.
영매가 됐다는 말도 의심받는 마당에, 말해봤자 믿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나 역시 제대로 아는 것이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괜히 주목을 받아 귀찮아지는 건 피하고 싶었다.
의학 기술 발달 전까지 주술사, 무당, 종교인이 치료사 대접을 받았다.
사람들은 병을 신의 노여움이라 믿었다.
위험하고도 불결한 미신과 주술행위에 의지하기도 했다.
이 세계의 치료사는 의료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청결 관념이 조금씩 자리 잡는 정도랄까?
아직도 평민들은 값비싼 치료사를 찾지 않고 신전으로 달려가 기도를 올렸다.
치유의 여신 신물이 등장했다는 것과 내가 그 사용자란 것이 밝혀지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게 뻔했다.
어쩌면 이용당하거나 실험대상이 될 수도 있고.
‘아직도 의심하나 보네. 어떻게 넘겨야 하지?’
니콜라이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의 관심은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