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 남자의 과대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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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 남자의 과대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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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 남자의 과대망상
2022.10.28.
“그러니까, 신물을 원했던 게 더글라스 때문이 아니었다고?”
“갑자기 더글라스 님이 왜 튀어나와요?”
“혼인예물을 돌려받음으로써 사랑을 확인하려는 줄 알았지.”
“말씀드렸잖아요, 더글라스 님과는 아무 상관 없다고요!”
니콜라이는 여전히 믿지 못한다는 투였다.
내가 영매라서 그렇다는데, 왜 자꾸 사랑 타령이야?
“그게 놈을 사랑하지 않는단 증거는 아니지.”
“증거가 왜 필요한데요?”
“둘이 짜고 내게 복수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웬 과대망상? 복수? 폭군도 무섭기는 한가 보네?’
니콜라이는 무섭도록 진지했다.
그래서 더 얼떨떨했다.
“이 상황에서는 제가 가진 영적인 힘을 의심해야 정상 아니에요?”
“그대가 영매든 아니든 상관없다.”
“왜요?”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
“그대는 여전히 내 곁에 있을 거고, 나는 그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니콜라이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확신인지 신념인지 모를 강인한 빛이 그의 눈동자에 깃들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심장이 움찔거렸다.
감정을 단속하기가 힘들었다.
맹렬히 부딪혀 오는 니콜라이를 외면하는 건 더 힘들었다.
저것이 무엇일까.
타오르는 불길처럼 뜨겁고, 아가리를 벌린 늑대의 주둥이처럼 음험한 저것은.
‘소유욕.’
한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애써 고개를 저었는데 그조차도 힘에 부쳤다.
‘동요하지 마, 엘리자벳. 계약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야. 상대는 제국 제일의 바람둥이란 걸 잊지 마!’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호흡이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니콜라이는 여자의 관심을 어떻게 끄는지 알고 있었다.
여심을 사로잡는 멘트도 훤히 꿰고 있을 터였다.
가끔 숙맥인 척 굴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고도의 기술일지 몰랐다.
울렁거리는 속에 차갑게 식은 차를 흘려보냈다.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저는 폐하의 아드님을 구했어요. 그 점을 기억해주세요.”
“정말 더글라스와 작당을 하진 않았겠지?”
“그럴 틈도 없이 납치당했거든요?”
“놈의 순진한 얼굴에 속아 넘어간 게 아니란 말이지?”
니콜라이가 매섭게 물었다.
모종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모양이었다.
‘더글라스의 거역이 그토록 충격이었나?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시달리다니…….’
황제로 사는 것도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닌 듯했다.
한숨을 폭 내쉰 후 측은지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더글라스 님과 저는 친구예요. 폐하께서 상상하는 그런 관계가 전혀 아니라고요.”
대답을 재촉할 땐 언제고 니콜라이는 대꾸가 없었다.
대신 그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턱의 각도도 미묘하게 들렸다.
오만한 지배자가 대책 없는 아름다움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흡족하거나, 기분 좋을 때마다 이런 표정을 짓네. 대체 뭐가 즐거운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단두대 악몽이 아니라, 묻지 못한 질문 때문에 밤을 설치기도 했다.
당신은 어떤 남자인가요?
나에게 뭘 바라는 거예요?
당신에겐 게임이 전부인가요?
요즘 들어 나도 모르게 그의 생각을 하는 날이 부쩍 많아졌다.
하지만 지워야 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뒤로하고 나는 괜히 농담하듯 말을 건넸다.
“저란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 확인하셨죠? 그만 망설이시고, 결재하세요!”
“아직 프란츠에게 교육담당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 않나?”
“승낙이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예요.”
허세는 아니었다.
이제 프란츠는 내 손바닥 위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대처럼 부유한 여자가 재물을 원할 리 없고. 수업료로 뭘 원하지?”
니콜라이가 허세가 담긴 내 말을 농담처럼 받았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답했다.
“일단 이것부터 주세요.”
티테이블에 놓여 있던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니콜라이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줬다가 뺏는 것이냐?”
“나중에 폐하의 건강도 살펴드릴게요.”
“관심 없다.”
“혹 아나요? 변비라도 있으실지.”
“이봐!”
니콜라이가 벌컥 목소리를 높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폭군의 뺨이 붉어지는 걸 본 사람은 아주 드물 것 같았다.
***
“검술 선생과 교수들만으로 충분해요. 교육담당관은 쓸모없다고요.”
프란츠의 고집은 여전했다.
엘리자벳이 프란츠 옆으로 바짝 붙었다.
“전하. 잠깐 귀 좀 빌려주세요.”
니콜라이는 팔짱을 끼고 엘리자벳의 귓속말을 지켜봤다.
프란츠의 태도가 바뀐 건 그때였다.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엘리자벳 선생님.”
심지어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우리 앞으로 잘해봐요. 호호.”
엘리자벳이 프란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니콜라이의 손길도 피하던 프란츠는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신비로운 힘이 있다는 게 사실인가? 엘리자벳이 시키는 대로 하면 핀치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사그라들었던 희망이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 또한 낯선 감촉이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엘리자벳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 마음도 엘리자벳 뜻대로 움직이고 있어.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사람을 홀리는 악녀일지도 몰라. 어쩌면 마녀일 수도.’
프란츠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모든 것이 제 잘못이었다.
니콜라이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예측해야 했다.
그가 프란츠를 제대로 보호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핀치를 지켜줘. 그게 나의 마지막 소원이야.」
라일라의 목소리가 죄책감을 들쑤셨다.
조급했고, 당황했다.
참기 힘든 분노가 목구멍을 꽉 채우고 안구 안쪽까지 뜨겁게 달구었다.
모조리 죽여야 한다.
본능 앞에서 이성은 소용없었다.
만약 엘리자벳이 곁에 없었다면, 그녀의 가녀린 몸에서 흘러나오는 체리블로섬 향기가 그를 달래지 않았다면 망설임 없이 패도를 택했을 것이다.
죽음과 공포를 흩뿌리며 제 소중한 것을 해친 무리를 멸살했을 터였다.
실제로 니콜라이는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을 저질렀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런 짓을 했다면 엘리자벳이 날 경멸했겠지. 이기적인 척 굴지만 죄 없는 사람들이 핍박당하는 걸 못 견디는 여인이니까.’
니콜라이가 침착함을 가장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엘리자벳 때문이었다.
저 대신 프란츠의 변화를 감지해준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엘리자벳의 빨갛고 도톰한 입술에 이끌렸을 때처럼.
「새장에 가둔 여자를 희롱하는 게 폐하의 수법인가요? 그렇다면 폐하는 영원히 승리하지 못할 거예요.」
도도한 목소리였으나 그녀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엘리자벳은 니콜라이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여인들과 달랐다.
여느 여인들의 모습에 익숙해 있던 니콜라이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보다, 엘리자벳에게 거절당했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이었다.
앞으로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을까 봐, 그녀의 달콤함을 맛볼 수 없을까 봐 조바심이 들끓었다.
엘리자벳을 완벽히 소유하는 방법은 유혹게임에서 승리하는 것뿐이었다.
달리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면 이해가 우선이에요. 대충 넘어가면 안 되는 단계죠.」
니콜라이는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었던 도전을 시작할 참이었다.
엘리자벳을 이해하기 위한 고민,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첫 단계를 밟기로 한 거였다.
그때 시종이 니콜라이가 기다리던 소식을 가져왔다.
‘하늘도 내 편이군.’
니콜라이의 입가에 그림 같은 미소가 걸렸다.
엘리자벳에게 완전히 넘어간 페이스를 되찾아올 차례였다.
“교육담당관이 된 것을 축하한다, 엘리자벳.”
“성심을 다해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새로 온 국어 교수 겸 궁정 문학가를 소개하지.”
“황궁에 그런 분이 계셨나요?”
“만나보면 알게 된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엘리자벳 님.”
더글라스가 수줍게 웃었다.
핑크뮬리를 연상시키는 분홍색 머리칼도, 갓 구워낸 빵처럼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도 그대로였다.
함께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특유의 분위기도 변치 않았다.
눈물이 찔끔 날만큼 반가웠지만, 걱정이 앞섰다.
“살이 빠지셨어요, 더글라스 님.”
“엘리자벳은 건강해 보이십니다. 이제야 마음 놓이는군요.”
“황궁엔 왜 왔어요?”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의 국어 교수로 임명하셨습니다. 궁정 문학가의 소임도 맡겨주셨고요.”
“맹수가 부른다고 제 발로 찾아오는 사슴이 어디 있어요?”
“하하. 제가 사슴인가요?”
더글라스가 눈매를 접으며 웃음지었다.
니콜라이가 바로 발끈했다.
“누가 맹수라는 건가?”
“폐하. 더글라스 님을 끌어들인 목적이 뭐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엘리자벳 님. 폐하께선 기회를 주신 것뿐입니다.”
더글라스가 날 말렸다.
내가 니콜라이의 노여움을 사게 될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더글라스 님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신 분이에요. 그런 폐하가 무슨 기회를 줬다는 거죠?”
“그건…….”
더글라스가 입을 열었다.
그새를 못 참고 니콜라이가 끼어들었다.
“황태자의 스승이 되는 건 굉장한 영광이다. 존경받을 만한 교양과 학식을 가졌다는 증명이니까.”
“송구하고 황공합니다, 폐하.”
“진흙탕을 뒹구는 후작가의 명예를 되찾을 기회를 준 거지. 반역죄로 처단해 마땅할 죄인에게 은혜를 베푼 거야.”
“잊지 않겠습니다, 폐하.”
“앞으로 주제넘은 짓 하지 말아 주게, 네틀톤 후작.”
니콜라이가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더글라스는 진짜 황은을 입었다고 믿는 듯했다.
“더글라스 님.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저는 이렇게 엘리자벳 님을 만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폐하의 시커먼 속셈을 몰라서 그래요!”
무척 억울하다는 듯 니콜라이가 어깨를 움츠렸다.
“누구 속이 검다는 거지? 본 적도 없으면서.”
그 모습이 어찌나 뺀질뺀질한지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니콜라이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폐하. 잠깐 저 좀 봐요.”
“밀회 요청인가?”
“그럴 리가요!”
입맛을 다시는 니콜라이를 더글라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데려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니콜라이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폐하. 계약 잊으신 거예요?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대도 계약서를 고쳤으니, 나도 고치려 한다.”
“네?”
“싫으면 계약을 파기하던지.”
니콜라이가 내 쪽으로 얼굴을 바짝 붙였다.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요 여우 같은 남자가 눈치를 챘어. 내가 유혹게임을 그만둘 수 없다는 걸. 날 압박하려고 더글라스를 부른 거야!’
니콜라이를 탓할 수만은 없었다.
유리한 방향으로 계약서를 고친 건 내 쪽이 먼저였다.
“어떻게 고쳤다는 거죠?”
“한 가지 조항을 추가했을 뿐이다.”
“그게 뭔데요?”
“쉽게 가르쳐주면 재미없지.”
씩씩거리는 날 내려다보며 니콜라이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폐하. 엘리자벳 양과 단둘이 대화할 수 있을까요?”
더글라스가 물었다.
순간 니콜라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싸악 걷혔다.
밥통에서 증기가 배출되듯 그가 응축된 검은 아우라를 내뿜었다.
“단둘이? 단둘이 뭘 하려고?”
니콜라이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사람이 변한 걸까?
폭군의 살기등등한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더글라스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