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단둘이 뭘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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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단둘이 뭘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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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단둘이 뭘 하려고?
2022.11.01.
“엘리자벳 양에게 물건을 전하고, 사용법을 알려 드리려 합니다.”
“같이 듣겠다.”
“꼭 그러셔야겠습니까, 폐하?”
“왜? 뭐, 켕기는 거라도 있나?”
니콜라이가 고개를 삐딱하게 숙였다.
또다시 악역 본능을 발휘하려는 게 분명했다.
시퍼렇게 번뜩이는 녹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여인들에게 민감하고, 중요한 생필품이라서…….”
민망하다는 듯 더글라스가 말끝을 흐렸다.
‘수잔이 생리통 진통제를 보내줬나 보네. 아직 좀 남았는데.’
네틀톤 후작가는 대대로 문학보다 약학에 재능 있는 인물이 많았다.
몸이 약한 수잔은 아카데미에 진학하지 못했다.
대신 집에서 선조들이 남긴 약제술을 연구했다.
아버지의 도박 빚에 시달린 뒤부터는 고가의 약초값을 댈 수 없었다.
그때 후원을 자청한 사람이 원작 엘리자벳이었다.
수잔을 아꼈다기보다는, 그녀가 만든 약이 생리통과 숙취 해소에 놀라운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도 도움을 받고 있었다.
“폐하, 바쁘실 텐데 이만 가보셔야지요?”
꺼져달라는 말을 정중하게 건넸다.
니콜라이가 딱 잘라 거절했다.
“하나도 안 바쁘다.”
“검술 수련도 매일 하신다면서요?”
“요새 쉬는 중이다."
더글라스와 내가 뭔가 작당을 할까 미심쩍단 표정이었다.
하여간 의심병은 이렇게 무서운 거였다.
“나도 듣겠다. 여인의 생필품이라니 궁금하군.”
“어련하시겠어요.”
“엘리자벳. 내가 종일 여인 생각만 하는 줄 아느냐?”
“아니셨어요?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니콜라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침 카레스가 오지 않았다면 한바탕 입씨름을 했을 거였다.
생리통과 진통제 복용법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거나.
“폐하.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혼자 처리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널 믿는다, 카레스.”
“폐하께서 직접 들으셔야 합니다.”
“바쁜 것 안 보이느냐?”
“주치의가 자백을 했습니다.”
니콜라이가 멈칫했다.
기다렸다는 듯 더글라스가 허리를 숙였다.
“소신은 엘리자벳 양과 잠시 담소를 나누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폐하.”
그저 인사였을 뿐인데 니콜라이가 모욕당한 사람처럼 인상을 팍 구겼다.
매서운 경고도 잊지 않았다.
“용건만 간단히 해라. 네틀톤의 명운이 내 손에 있다는 걸 잊지 말고!”
“소신을 믿어주십시오.”
“내가 널 어찌 믿느냐? 또…….”
니콜라이가 또다시 걸음을 멈췄다.
카레스가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모셔라.”
기사들이 양옆에서 니콜라이의 팔짱을 꼈다.
꽤 익숙한 일 같았다.
“실례하겠습니다, 폐하.”
“놔라. 내 발로 갈 것이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기사들을 쏘아본 니콜라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내일 황태자 교육 문제를 논의하겠다. 단둘이 오찬을 함께 하며!”
밥 먹자는 말을 무슨 결투 신청처럼 하네?
더글라스는 왜 노려보는 거야?
어리둥절한 나는 그제야 전 약혼자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
“수잔이 진통제를 보냈나요?”
“폐하께 핑계를 댄 것뿐입니다.”
“왜요?”
“엘리자벳과 단둘이 있고 싶어서요.”
티 없는 얼굴로 더글라스가 웃었다.
‘순진한 오빠 사슴이 황제를 속였다고?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거야? 니콜라이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내 눈에 더글라스는 맹수의 손아귀에 든 초식동물처럼 보였다.
더글라스가 품에서 손바닥만 한 선물상자를 내밀었다.
“드릴 게 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상자를 열어보십시오.”
빨간 리본을 풀고, 분홍색이 감도는 포장지를 뜯어보니 세공된 크리스털 병이 나왔다.
어여쁜 병 안에는 콩알보다 작은 검붉은 알갱이가 가득 들어있었다.
“피미안타 지방 특산물인 매운 후추입니다.”
“후추라고요?”
“매콤한 것이 드시고 싶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피미안타의 후추는 매운맛이 강해서 보통 사람은 입도 못 댄다더군요. 엘리자벳 입맛에 딱 맞을 겁니다.”
더글라스가 이걸 어떻게 구했지?
후추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사치품인데.
내가 뭘 염려하는지 눈치챈 더글라스가 멋쩍어했다.
“실은 『제국의 붉은 별』 인세가 들어왔습니다.”
“정말요?”
“20만 부가 팔렸답니다. 지금도 팔리고 있고요. 출판사에서 평생 만져보지도 못한 거금을 주더군요.”
“진짜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더글라스 님!”
베스트셀러 작가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원작대로라면 『제국의 붉은 별』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더글라스를 더 부유하게 만들어 줄 거였다.
내 손길이 닿자 더글라스는 소년처럼 수줍어했다.
“엘리자벳이 없었다면 완성하지 못했을 겁니다. 여주인공 엘리제도 이 세상에 없었을 테고요.”
“언제고 쓰셨을 거예요. 더글라스 님께는 재능과 열정이 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동안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지네요.”
“위장병은 어떠세요?”
“금세 나았습니다. 수잔이 만들어준 약을 먹고, 식사 관리를 했습니다.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고요.”
그마저도 내 덕분이라는 듯 더글라스가 머리를 조아렸다.
원작 더글라스는 문학과 엘리자벳밖에 모르는 전형적인 덕후 캐릭터였다.
그런 더글라스가 한 단계 성장했다고 생각하니 대견하고 흐뭇했다.
“인제 보니 어깨도 넓어지신 것 같아요.”
“폐하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네?”
“폐하께 비길만한 건장한 신체를 갖는 게 목표입니다.”
신물을 바치던 날, 더글라스는 니콜라이에게 압도당했다.
황제를 상대로 나름의 결기를 보여줬지만 제 무력함을 뼈저리게 실감했을 거였다.
내가 더글라스의 창작에 불을 질렀던 것처럼 니콜라이도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게 틀림없었다.
‘더글라스의 각성이라. 이게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까.’
게다가 니콜라이가 롤 모델이라니.
허들이 너무 높지 않을까?
켄싱 저택의 테라스에서 봤던 그림 같은 상반신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쇠망치로 수천 번 담금질한 갑옷처럼 완벽한 형태의 가슴 근육.
깎아지른 듯 가파른 복근.
많은 남자의 몸을 본 건 아니지만 니콜라이보다 아름다운 신체를 가진 남자는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잘생긴 데다가 몸까지 저러니 여자들이 내버려 두질 않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열심히 봐두는 건데…….’
내심 입맛을 다셨다.
반라의 니콜라이가 다가온다면 퍽 부담스럽고 난감할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니콜라이가 원하는 건 하룻밤 풋사랑이 아니라, 제 입맛에 맞는 여배우였다.
유혹게임에 열의를 보이는 것도 여흥이자, 오기일 게 뻔했다.
나도 그를 이용할 뿐이라고 내심 뭉갰지만, 그때마다 고래 뼈 코르셋을 입은 듯 심장이 조이고 불편했다.
“꼭 필요했던 선물이에요. 느끼한 황궁 음식에 물렸거든요.”
애써 후추 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매운맛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입안에 침이 흠뻑 고였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된답니다. 조심하십시오, 엘리자벳.”
“감사해요.”
“기뻐해 주시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나 때문에 황제에게 폭언을 듣고, 하나뿐인 여동생의 안전을 위협받았음에도 더글라스는 한결같았다.
그는 내 말 한마디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했다.
폭군의 부름을 받고, 위험천만한 황궁에 들어왔다.
나를 다시 볼 수 있음에 감사하며.
‘이렇게 착하고 투명한 남자를 가지고 놀다니. 험한 꼴 당해도 싸네, 엘리자벳.’
후추 농장 정도는 가볍게 사들일 재력을 가졌지만, 가끔은 돈보다 날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든든했다.
더글라스는 살아남을 궁리에 바쁜 내겐 너무 과분한 남자였다.
나는 그의 사랑을 받아줄 수 없었다. 보답할 방법도 몰랐다.
‘나도 원작 엘리자벳처럼 더글라스의 선의를 이용하는 것 아닐까?’
더글라스를 이용하고 싶지 않지만, 그와 영영 멀어지는 건 싫었다.
더글라스가 떠나면 내 일상은 더 외롭고 고단해질 거였다.
전 약혼자와 좋은 친구가 되는 건 불가능할까?
나는 서투름과 형편을 핑계로 이기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처음 발견한 이중성에 당혹스럽기도 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큼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것도 어렵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닌데.
“인세를 받으면 엘리자벳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생각해 주셔서 고마워요.”
“사실 목걸이나 귀걸이 같은 귀금속을 사고 싶었는데 수잔이 말리더군요. 제 능력으로는 엘리자벳의 취향을 맞출 수 없다고요.”
“취향도 바뀌더라고요. 요즘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편해요.”
원작 엘리자벳의 보석 컬렉션이 카나리아 방으로 옮겨졌지만 나는 흔한 펜던트 하나 걸지 않았다.
꾸미고 나갈 데도 없고, 보여주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괜히 돈 많은 티 내면 도둑이 꾈 수도 있어요. 그냥 귀찮아서 안 하는 거지만.”
“정말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더글라스가 새삼스레 말했다.
뜨끔한 내색을 숨기며 요염하게 웃었다.
“죽다 살아났으니까요.”
“예전의 엘리자벳도 무척 매력적이었지만, 지금의 엘리자벳은 정말 누가 봐도 멋지십니다.”
너무 직접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더글라스가 뺨을 붉혔다.
내 얼굴도 후끈 달아올랐다.
더글라스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취향이 바뀌셨다는 말에 용기 내도 될까요?”
“네?”
“엘리자벳도 알다시피 저는 어리석고 답답한 남자입니다.”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왔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상처 주지 않고 거절할 방법은 없을까.
똑똑.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친 기색의 프란츠가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엘리자벳 선생님.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요?”
“오늘은 쉬는 것 아니셨어요?”
“전 멀쩡한걸요.”
“잠깐만요. 금방 갈게요.”
내가 황태자의 교육담당관이 되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후추 정말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다음엔 더 좋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그때도 받아주시길."
더글라스의 눈빛이 묘하게 촉촉해졌다.
여전히 정중했으나 착한 남자 특유의 머뭇거림은 사라졌다.
손바닥에 진땀이 맺혔다.
‘니콜라이가 롤모델이라더니……. 더글라스가 달라졌어!’
심장이 빠르게 두방망이질 쳤다.
내버려 뒀다간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연애 경험 없고, 이성을 대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여자들이 으레 그러듯 어색하게 딴청을 피웠다.
“후추를 어느 상인에게 사셨어요? 나중에 연락해보려고요.”
“친구를 통해 구했습니다. 그 친구도 매운 걸 좋아하거든요.”
“특이하시네요. 어떤 친구분이시죠?”
“인테드 제도에 주둔 중인 클라우디아 로즈로이스 경입니다.”
“!”
간밤에도 날 괴롭혔던 단두대 악몽이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기습은 방심을 틈타 찾아오곤 한다.
절망은 희망을 짓밟으며 등장한다.
더글라스는 이 순간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를 것이다.
악의 없이 내 등에 칼을 꽂는 해맑은 구애자.
그가 다시 한번 보이지 않는 칼날을 꺼냈다.
“소개해 드릴까요? 왠지 두 분은 꼭 만나야만 할 운명처럼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