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변경의 기사와 혀가 마비된 남자 (19/97)


#19. 변경의 기사와 혀가 마비된 남자
2022.11.04.


하트만 남부 인테드 제도.

워든 왕국과 바다를 공유하는 그곳엔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교역선을 노리는 해적들도 심심치 않게 출몰했다.

여름엔 더위가 극심하고, 겨울이면 강추위가 몇 달 동안 이어지는 인테드 제도는 기사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인테드에서 살아 돌아오려면 악마와 계약하거나, 악마가 돼야 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물론 궂은 날씨와 적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헉, 헉, 헉.”

시커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연병장에 사내들의 거친 호흡이 가득했다.

불시의 습격이라도 당한 걸까.

갑옷과 철검으로 무장한 기사들의 얼굴엔 죽음의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살아남자! 포기하면 안 돼!”

“죽기 살기로 버텨라!”

흙먼지와 땀으로 엉망이 된 기사들이 검을 고쳐잡았다.

그들의 시선 끝에 은백색 광채가 번뜩였다.


“오, 온다……!”

두려움에 휩싸인 한 마디를 시작으로 비명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크악!”

“모,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최정예 기사단원들도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은백색 광채를 막을 수 없었다.

최후의 한 명이 연병장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고꾸라졌다.

은백색 찬란한 빛도 그제야 움직임을 멈췄다.


“형편없군. 아주 실망스러워.”

쓰러진 사내들을 짓밟으며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풍에 흩날리는 은발은 달빛 폭포수처럼 반짝였고, 검을 매만지는 손길은 백옥만큼 유려했다.

섬세한 이목구비에, 빈틈을 찾을 수 없이 균형 잡힌 신체.

백은의 여기사보다, 백은의 악마라 더 자주 불리는 클라우디아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20명이 한 명을 당해내지 못하다니. 이러고도 내 수하라 할 수 있겠나?”

“시, 시정하겠습니다!”

“내가 워든 왕국의 기사였으면 너희들은 다 죽은 목숨이다.”

“하오나 단장님은 보통 인간이 아니시잖습니까?”

“연병장 300바퀴 돌아라.”

“오늘 훈련은 대련으로 끝내신다면서요!”

“400바퀴.”

“그러다 저희 전부 죽습니다!”

“500바퀴.”

대원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몇몇이 용기 내어 애걸했다.


“부하들이 가엾지도 않으십니까?”

“가여운 너희들이 전사하지 않도록 단련시키는 거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훈련량이 아닙니다!”

“너희는 사람이 아니라, 조국의 국경을 지키는 기사다.”

“아아, 단장님!”

“나는 너희들을 잘못 지도한 책임을 지고 1,000바퀴 돌겠다. 기운들 내라.”

클라우디아가 먼저 연병장을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체력엔 끝이 없었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자각도 없었다.

역사에 남을 만한 천재적 재능과 성실함을 가졌음에도 그녀가 악마라 불리는 이유였다.

흙먼지투성이의 단원들이 수군거렸다.


“단장님 오늘따라 미치신 것 같지?”

“저기 나뭇더미 보이나?”

“장작 아닌가? 많이도 들여왔군.”

“단장이 오전에 박살 낸 훈련용 허수아비야. 당분간 죽었다고 생각하게.”

“자네 혹시 탈영할 계획 있나?”

“조만간 생길 것 같아.”

수하들의 불만을 뒤로하고 클라우디아는 뜀박질 속도를 점점 올렸다.

훈련에 매진하려 했지만 상념을 지우기 힘들었다.

모든 문제는 편지 한 통에서 시작했다.

-라디아, 잘 지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제국의 붉은 별』 리뷰를 보내줘서 기뻤어.

2권 출간되는 대로 주둔지로 보내줄게.

참, 전에 말했던 매운맛 후추 기억해?

그 후추를 꼭 구하고 싶어.

소중한 사람에게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진심을 전하고 싶거든.

진짜 주고 싶은 건 반지지만, 부담 주고 싶진 않아.

이번만은 용기 내고 싶다. 너의 도움이 간절해.

너의 친우 더글라스.

클라우디아는 당연히 그 ‘소중한 사람’은 자신이라 믿었다.

더글라스가 드디어 엘리자벳이란 교활한 여자의 마수에서 벗어나 진실한 사랑에 눈뜬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맵기로 유명한 후추를 왜 구하겠는가.

방식이 좀 의아했지만, 상대는 더글라스였다.

파혼당한 몸으로 소꿉친구에게 고백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내 마음에 꼭 드는 선물을 주고 싶었나? 반지도 괜찮았을 텐데…….’

검을 쥘 때도, 식사할 때도, 침상에 누웠을 때도 더글라스의 온화한 미소가 아른거렸다.

클라우디아는 보급품을 대는 상인에게 부탁해 최고급 피미안타 후추를 구했다.

고백 선물로 돌려받게 될 물건이라고 생각하니, 검붉은 빛을 띠는 후추알이 루비보다 귀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모두 착각이었다.

-고마워, 라디아.

고백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네 덕에 엘리자벳이 기뻐했어.

그녀도 너처럼 매운맛을 좋아하게 됐거든. 특이하지?

잠시나마 그녀를 기쁘게 할 수 있어서 무척 행복했다.

전부 네 덕이야. 네가 내 친구란 것이 자랑스럽다.

모라신시아 여신의 가호가 늘 함께하길.

너의 친우 더글라스.

친우.

그 한 마디가 늘 클라우디아와 더글라스 사이를 가로막았다.

다정한 말로 제 연심을 난도질한다는 걸 더글라스는 영원히 모를 터였다.

절벽을 향해 내달렸다.

버림받고서도 엘리자벳에게 매달리는 더글라스도, 그를 짝사랑하는 자신도 모두 잊고 싶었다.

클라우디아가 변방에 처박혀 있는 동안 엘리자벳은 더글라스를 더 깊은 절망의 구덩이로 유혹했다.

더글라스를 어디까지 망가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황태자의 교육담당관이라는 고위직까지 꿰찼으면서.


“여기 계셨습니까, 단장님.”

부단장 제이슨이 다가왔다.

클라우디아가 턱밑으로 흐른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황궁에 심어둔 빨대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보고하게.”

“황제가 엘리자벳이란 평민 여자에게 홀려 국정을 내팽개쳤답니다. ”

“폐하의 사생활 문제는 지겹도록 들었네.”

“이번엔 좀 다릅니다. 어린 황태자까지 끌어들였다더군요.”

“황태자 전하를?”

“최근 죄 없는 황태자궁 사용인들이 무더기로 체포되었습니다.”

“이유는?”

“황태자 전하께서 독극물에 중독되었다고, 그 여자가 밀고한 모양입니다.”

클라우디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고작 10살밖에 안 된 황태자를 누가 시해한단 말인가.

황궁은 수백 명의 최정예 기사가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황실 기사단장은 클라우디아의 스승이었으므로 경비에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을 더욱 믿기 힘들었다.


“주치의는 물론 측근 시종들조차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 여자가 고집을 부렸다더군요.”

“설마 폐하께서 비전문가의 일방적인 주장만 믿고 체포하셨겠나?”

“여자들과 어린 소년들까지 고문당했답니다.”

“!”

“황궁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 여자가 교육담당관이 되었으니, 전하의 안위가 심히 염려됩니다.”

“…….”

“황제가 그 여자를 황후로 삼겠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설마!”

엘리자벳이 황후라니 상상만으로 속이 메스꺼웠다.

아주 오래전부터 클라우디아는 니콜라이를 싫어했다.

그녀가 기사서임을 받던 날도, 전우의 시체를 매장하던 날도 황제는 여자들과 노닥거리고 있었다.

황제를 둘러싼 더러운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충성맹세를 한 주군이었다.

니콜라이에게도 황제로서 마지막 양심은 있다고 믿었다.

허황된 바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겨우 무산되었답니다. 원로들이 전부 목격자입니다.”

“폐하께서 진정 이성을 잃으셨는가.”

“모두가 단장님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단장님께서 깃발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경거망동하지 말게. 대의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네.”

“폭군과 악녀의 만남입니다. 하루빨리 끌어내려야 하트만 제국을 지킬 수 있습니다.”

클라우디아의 고민이 깊어졌다.

욕망에 사로잡혀 나라를 망치는 황제는 처형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혁명에는 피의 대가가 필요했다.

클라우디아는 자신의 정의로움이, 백성들이 원하는 정의로움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걸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녀에게 힘이 있고, 충성스러운 기사단이 있고, 후원자와 지지자가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내 망설임 때문에 백성들이 더 고통받을지도 모른다. 엘리자벳의 악한 본성은 내가 잘 알아. 혁명을 서둘러야 할지도…….’

클라우디아는 끓어오르는 조바심을 내리찍었다.

더글라스를 향한 연심과 엘리자벳을 향한 분노를 지우지 못한다면 감히 백성과 혁명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었다.

클라우디아가 제이슨에게 명령했다.


“한시라도 빨리 수도로 귀환할 방도를 알아보게. 모든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한 뒤 판단하겠네.”

 

***

황제는 꼭 이렇게 호화스런 방에서 밥을 먹어야 할까?

값비싼 거울이 벽면을 가득 채운 오찬실에 앉아 볼을 긁적였다.

천장은 아기 천사 조각과 크리스털 샹들리에로 장식되어 있었고, 시선이 닿는 곳마다 넝쿨 장식의 황금 촛대가 반짝반짝 빛났다.

8인용 테이블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새하얀 테이블보가 깔려 있었다.


‘김칫국물이라도 튀면 장난 아니겠다.’

소스 한 방울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니콜라이를 바라봤다.


“들지.”

그게 전부였다.

프란츠의 교육 문제를 논의하자더니 그는 묵묵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껄끄러운 고요 속에서 나도 은스푼을 들었다.


‘웩! 왜 이렇게 짜?’

하마터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완두콩 수프를 쏟을 뻔했다.

니콜라이는 짠맛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스푼을 입으로 옮기고 있었다.

내 착각일까?

하지만 송아지찜, 샐러드 소스도, 파이의 간도 엉망 그 자체였다.


‘향과 모양만 그럴싸했지, 맛은 끔찍하잖아? 소금, 식초, 설탕을 몽땅 때려 부어서 만든 것 같아. 니콜라이 성격에 요리사를 살려둔 게 신기하네.’

기괴한 맛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다.

아니, 거칠게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음식 타박은 밥상머리 예법이 아니었다.

더 먹을 용기는 내지 못하고, 니콜라이를 관찰했다.

혀가 마비된 건가?

의심스러울 만큼 니콜라이는 동요 없이 음식을 해치웠다.

맛을 음미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영혼 없는 기계처럼 제 몫의 접시를 비울 뿐이었다.

최악의 음식과 불편한 적막.

차가운 물로 입을 씻은 후 탁, 소리 나도록 물잔을 내려놓았다.


“폐하. 원래 식사 중에 말씀 안 하세요?”

“해야 하나?”

“밥 먹으며 이야기하자고 하셨잖아요.”

“식사 후에 하려고 했다.”

반쯤 썩은 내 표정과 그대로 남은 음식을 번갈아 보던 니콜라이가 되물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건가?”

“손님을 초대했으면 적절히 대화를 이끄는 게 호스트의 예의죠.”

“잊고 있었다. 누군가와 식사를 같이한 게 하도 오랜만이라.”

“수십 명의 황비가 있는데 혼자 드신다고요?”

“오랜 습관이다.”

니콜라이가 내게 오찬을 권했을 때 깜짝 놀라던 카레스가 떠올랐다.

특별대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럼 우리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화를 나눠보죠.”

“그대는 제대로 먹지 않은 것 같은데.”

“제 입맛엔 좀 맞지 않아서요. 제가 먼저 여쭤도 될까요?”

“그리 해라.”

니콜라이가 깔끔한 입가를 냅킨으로 톡톡 두드렸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황태자 전하를 독살하려던 범인이 누구죠?”

“기밀이야.”

“하지만 저는 교육담당관이자, 관계 개선 훈련관이잖아요. 퍽 유능한 영매기도 하고요.”

재미있다는 듯 니콜라이가 쿡 웃었다.

그것도 잠깐, 그의 표정이 무섭도록 진지해졌다.


“그대가 내 질문에 답하면 알려주지.”

“질문이 뭔데요?”

“프란츠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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