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그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20/97)


#20. 그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2022.11.08.


잠시 뜸을 들이다,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은 밝힐 때가 아니었다.


“저도 알려 드리고 싶지만 어렵겠네요.”

“어째서?”

“입장 바꿔 생각해보세요. 폐하께서 제게 마음을 겨우 조금 여셨어요. 그런데 우리 대화 내용을 제가 더글라스 님에게 속닥거리면 기분 좋으시겠어요?”

“아비가 자식 걱정을 하는데 더글라스가 왜 튀어나오나?”

니콜라이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비유일 뿐이잖아요.”

“그만 둬. 도발하려는 게 아니라면.”

“더글라스 님을 왜 그렇게 싫어하시는 거예요?”

“그대야말로 더글라스를 왜 자꾸 들먹이는가? 그저 친구 사이일 뿐이라면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더글라스가 건네준 후추 병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심장 부근이 아릿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초록색 눈동자가 날 꿰뚫었다.


“뭔가 있군.”

“……서로 감정은 터치하지 않기로 정한 것 아니었어요?”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겠어. 추가된 계약서 조항에 대해서.”

니콜라이가 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걸 항상 지니고 다니는 거예요?”

“내가? 설마.”

“방금 움찔하셨거든요?”

“이깟 종잇조각이 뭐라고 지니겠는가?”

“저야 모르죠.”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천천히 읽어보도록.”

익숙한 계약서를 건네받았다.

유려한 글씨체로 이런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다.

-본 계약과 무관한 타인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

첫 번째 추가 조항은 익숙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이성과의 교제를 불허한다. 마음을 빼앗기는 것 또한 교제로 간주한다.

마치 더글라스에게 잠시 흔들렸던 나를 보면서 작성한 듯한 내용이었다.

뜨끔한 날 보고 니콜라이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각각 하나씩 추가했다. 불만 있나?”

“계약 파기 조건도 변경되었네요?”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예로 팔려 가는 것보다 낫지 않나?”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거나 조항을 어기면 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렇게까지 이기고 싶으세요?”

“내가 승부욕이 좀 있는 편이다.”

“사랑도 연애도 하지 말라는 건데 괜찮으시겠어요?”

후궁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누가 카사노바 아니랄까 봐 니콜라이는 무덤덤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빼앗긴 적 없다.”

“에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대가 진짜 영매이거든 내 진심을 들여다보도록.”

하늘을 우러러 한 치의 부끄럼이 없다는 듯 당당한 태도였다.


‘그럼 그 많은 여자가 전부 육체관계란 거야? 하여간 짐승! 체력도 좋네!’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멋대로 날뛰려는 상상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니콜라이가 악수를 청했다.


“어때 받아들이겠는가?”

그 손의 감촉과 온도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무르기 없기예요.”

“물론이다.”

악수를 나눴다.

니콜라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입꼬리만 비틀어지는 비소가 아닌, 얼굴 전체가 환해지는 햇살 같은 웃음이었다.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웃는 얼굴이 무척 예쁜 사람이구나. 원작 악역이라는 게 잊힐 만큼.’

나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니콜라이가 구미가 당길만한 말을 하지 않았다면 한동안 그랬을 거였다.


“재계약 선물로 수사 진행 상황을 말해주지.”

“황태자 전하를 해하려 한 인간이 누구죠?”

“알 수 없다.”

“주치의가 자백했다면서요?”

“일가족이 협박당해서 할 수 없이 약에 독을 탔다고 한다. 독은 익명의 우편으로 받았고. 게다가 프란츠에게 독을 쓴 건 주치의뿐만이 아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니콜라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읊조렸다.


“요리사와 어린 종자들도 자백했다. 식사와 차에 극미량의 독을 탔다고 한다.”

“그럴 수가!”

“내가 보기엔, 최소 둘 이상의 암수가 프란츠를 노리고 있다.”

“왜죠? 폐하의 하나뿐인 후계자시잖아요!”

“바로 그 때문이다.”

“!”

“프란츠는 돌봐줄 모후도, 뒤를 봐 줄 명문가 외척도 없다.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잦아서 새로운 후계자가 필요하다는 말이 많았지.”

“그게 전하에겐 콤플렉스였을 테고요.”

“그대가 중독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면 프란츠는 시름시름 앓다가 쓰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차마 제 입으로 말할 수 없었는지, 니콜라이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꾹꾹 억누르고 있지만, 숨길 수 없는 분노가 그의 몸에서 비어져 나왔다.

하지만 분노보다 그를 괴롭히는 건 죄책감 같았다.


“전임 교육담당자들에게 협박과 회유가 이어졌겠군요.”

“내 손바닥 위에서 황태자를 노릴 줄은 몰랐다. 모두 내 탓이다.”

“맞아요, 전부 폐하 때문이에요.”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는지 니콜라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어린 아들을 혼자 두셨어요?”

“프란츠가 나와 함께 있는 걸 불편해했다.”

“이유가 있겠죠! 아빠가 돼서 그걸 못 참아요?”

“…….”

“살갑게 애교를 부리면 곁에 두고, 불편해하면 멀리하시겠다는 거예요? 애완동물도 그렇게 키우면 비뚤어져요.”

뭐라 항변하려다 말고 니콜라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왠지 주인에게 크게 혼나는 대형견처럼 보였다.

슬쩍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그대 말이 맞다. 나는 정말 쓸모없는 아비다.”

“자책하지 마세요.”

“내 탓이랄 땐 언제고?”

“자책이 도움 된다면 백 번, 천 번 하셔도 돼요. 하지만 지금은 폐하의 자책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그래서?”

“황태자 전하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작전을 짜보자고요.”

감탄 어린 시선으로 날 응시하던 니콜라이가 물었다.


“그대는 프란츠 일에 왜 이렇게 적극적인 거지?”

“녹봉을 두둑이 받잖아요. 밥값 해야죠.”

“뭘 더 뜯어내려고?”

“폐하의 심장을 달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니콜라이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심장 한 조각을 이미 빼앗긴 사람처럼 보이기도.


“제 작전이기도 해요. 아들을 돕는 게 그 아버지를 유혹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거든요.”

“그렇게까지 나를 이기고 싶나?”

“승부욕이라면 저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죠.”

“좋다. 누가 이기나 해보지.”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어요.”

“또 뭔데?”

그만 좀 하라는 투로 니콜라이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둘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은밀히 목소리를 낮췄다.


“최대한 자세하고 정확히 알려주셔야 해요. 그 방면에 아무런 경험이 없는 초심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요.”

“대체 뭘 물으려는 거지?”

“그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니콜라이가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토했다.

폭군도 당황하면 저러는구나.

거울에 비친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고 있었다.

내 눈에도 무척 음흉해 보였다.

***

프란츠의 서재에 들렀다가 연무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늘도 프란츠는 목검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검술 교관 시몬이 힘차게 응원했다.


“훌륭하십니다, 전하! 기합을 크게 넣으십시오!”

“하압!”

“전하께서도 폐하처럼 최고의 기사가 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프란츠의 목검은 짚단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맞추지 못하고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미안하지만 글러 먹었어. 프란츠에겐 검술 재능이 없다고.’

헛된 희망이 사람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시몬은 알까.

필사적으로 검술을 익히고 싶어 하는 프란츠의 간절함을.

간절함만으로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없었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격차가 엄연히 존재했다.

때로는 포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수 있었다.


‘나도 최애 손에 죽는 운명을 못 피할지도 몰라. 원작을 비틀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보다 포기하는 편이 나을지도. 적어도 남은 인생을 즐길 수는 있잖아?’

후추를 구해준 사람이 클라우디아란 걸 알았을 때 내 가슴은 또 한번 무너져내렸다.

무력감이 해일처럼 날 덮쳤다.

매 순간 필사적이었기에 더 그랬다.

꽉 쥐고 있던 모든 걸 그만 놓아버리고 싶었다.

‘존버가 승리한다’는 말 따위는 위로가 되지 않았으니까.


‘피똥 싸며 노력해도 족족 망하는 게 현실이야. 노력하는 놈이 재능 있는 놈 못 따라가고, 재능 있는 놈이 운 좋은 놈 못 따라간다고.’

재능 없고, 운 없는 사람은 포기해야 할까?

그것도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얻는 건 뭔데?

신의 착각인지 실수인지 몰라도 나는 새 인생을 손에 넣었다.

운명이 내 발목을 끌고 지옥으로 간다 해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발버둥 쳐 보기로 작정했다.

단두대의 시퍼런 칼날이 떨어지기 전까지,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선택은 바뀌지 않을 거였다.


“간식 가져왔어요. 잠시 쉬었다 하세요!”

손을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시몬이 밝은 미소로 날 맞았다.


“오셨군요, 엘리자벳 양!”

“찾아오지 말라니까. 방해되게스리.”

프란츠는 툴툴거리면서도 반가운 기색이었다.

시종이 손 씻을 물과 수건을 대령했다.

나는 피크닉 매트를 깔고 은식기를 세팅했다.


“햄샌드위치와 사과당근 주스예요. 제가 직접 만든 거니까 많이 드세요.”

“요리도 할 줄 알아?”

“조심하세요. 너무 맛있어서 기절하실지도 모르니까요.”

“두 개 먹어도 돼?”

“세 개 드셔도 돼요.”

“고마워, 엘리자벳!”

프란츠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프란츠는 포크와 나이프 대신, 빨갛게 물집이 잡힌 손으로 샌드위치를 움켜잡았다.

완벽한 식사 예절을 선보일 때는 언제고, 조그만 볼이 빵빵해지도록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상황에 따라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쓰는구나. 호칭도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고. 날 어떻게 대할지 아직 못 정했나 보지?’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해결할 일이 있었다.


“죄송하지만 제 몫은 없습니까?”

입맛을 다시던 시몬이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샌드위치 양은 넉넉했지만, 은식기는 딱 2인용뿐이었다.

접시도 두 개, 냅킨도 두 장, 주스도 두 병이었다.

투명인간 취급당한 시몬에게 화사한 미소를 선보였다.


“브렌든 경 몫은 없어요.”

“네?”

“당신은 오늘부로 해고됐거든요.”

큰 충격을 받았는지 시몬이 비틀거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가 살벌한 어조로 물었다.


“저는 폐하께서 임명하신 검술 교관입니다. 엘리자벳 양이 맘대로 흔들 수 있는 위치가 아니란 뜻입니다.”

“그 폐하께서 명하셨답니다. 당신 자르라고.”

시몬의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본색을 좀 더 드러내길 기대했는데, 시몬이 화를 억눌렀다.


“제가 브렌든 후작가의 장자라는 건 아십니까?”

“알지만, 중요한가요?”

“저를 쫓아내시면 아무도 황태자 전하를 지도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가문을 등에 업고 협박하시는 건가요?”

“귀족 생리를 모르시는 것 같아서 조언을 드리는 겁니다.”

비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냥 지껄이고 싶은 것뿐이면서 꼭 ‘널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인간들이 있었다.

그런 인간들에겐 돌직구가 제격이지!


“어쩌죠? 귀족 생리 따위는 알고 싶지 않은데.”

“뭐라고요?!”

“그리고 새 검술 교관은 필요하지 않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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