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잔챙이는 확 쓸어버리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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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잔챙이는 확 쓸어버리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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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잔챙이는 확 쓸어버리면 그만
2022.11.11.
충격을 받은 시몬이 비틀거렸다.
아직 놀라긴 일렀다.
“전하의 검술 지도도 제가 직접 할 거거든요.”
“검술이 무슨 바느질이나 꽃꽂이인 줄 압니까? 잘못 훈련하면 좋은 기사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기사 못 돼도 상관없어요.”
“넷?!”
“우리 전하는 기사가 아니라 황제가 될 분이시니까.”
꿀새의 깃털처럼 부드러운 프란츠의 금발을 쓰다듬었다.
마땅한 대꾸가 떠오르지 않는 듯 시몬이 씩씩거렸다.
“이건 월권입니다!”
“폐하의 결정이라니까 월권은 무슨 월권이에요?”
가만히 듣고 있던 프란츠가 울상을 지었다.
“검술을 계속 배우면 안 돼? 브렌든 경은 좋은 스승이야.”
“들으셨겠지요? 전하께서도 절 원하시잖습니까!”
시몬이 쭈그러졌던 어깨를 폈다.
풋. 코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달라지는 건 없어요. 교육담당관은 저니까요.”
“엘리자벳 양, 왜 이렇게 생떼를 부리시는 겁니까? 여자가 막무가내로 덤빌 문제가 아닙니다.”
“일부러 심한 말을 골라서 하시는 건가요?”
“좋은 뜻으로 한 말이니,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십시오.”
온갖 격식으로 포장된 귀족들의 천박한 민낯은 고작 말 몇 마디에 고스란히 드러나곤 했다.
생떼? 여자? 막무가내?
내가 차가운 표정으로 꼬집었다.
“기분 나쁠 말인 줄 알면, 안 하는 게 맞지 않겠어요?”
시몬이 적개심과 노골적인 분노가 담긴 눈으로 날 노려봤다.
“해도 너무하시는군요.”
“브렌든 경을 생각해서 드린 말이에요.”
“엘리자벳 양이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건 저도 잘 압니다. 그래도 전하의 신임을 받는 검술 교관을 이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아……. 이해를 못 하시니 정리를 해드리죠.”
내게 선생 자질이 전혀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머리 나쁜 학생에게도 그닥 화가 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첫째. 전 폐하의 결정 사항을 전달했을 뿐이에요.”
“…….”
“둘째. 검술 지도를 하지 못할 거라 넘겨짚지 마세요. 전하께 꼭 맞는 검술 지도법을 익혔거든요.”
“누구한테 뭘 배웠다는 겁니까?”
이해력이 떨어지는 데다 인내심도 부족한 학생이 끼어들었다.
“안 끝났어요. 질문은 기다렸다 하세요.”
“!”
“셋째. 전하께는 고강도 검술 훈련보다 성장이 중요해요.”
“제 지도가 잘못됐다는 말입니까?”
“크게 잘못됐죠. 전하…… 아니, 어린 제자의 손이 이 모양이 되도록 뭐하셨어요?”
“…….”
“몰랐으면 문제고, 알았다면 더 큰 문제예요. 폐하께 말씀드린다면서요? 전하가 제국의 미래라면서요?”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만…….”
“오해는 무슨 오해요? 황태자궁이 발칵 뒤집혔는데 왜 모른 척을 하셨죠? 귀족 남자라서 점잖게 뭉개신 건가.”
매서운 기세로 시몬을 몰아붙였다.
아름다우시다느니, 여신 강림이라느니 수작을 부리던 남자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에게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참고로 검술 지도법은 폐하께서 직접 알려주셨답니다. 검을 만져본 일조차 없다 해도 얼마든지 지도할 수 있도록.”
***
프란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엘리자벳을 올려다봤다.
“뭘 하려는 거야?”
“얌전히 있어. 친구에게 특별 주문한 연고니까.”
엘리자벳이 프란츠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여자’에겐 그게 잘 안됐다.
‘이상한 여자야. 아무 때나 끼어들고, 모든 걸 다 안다는 식으로 잘난 척하고. 근데 그게 왜 안 밉지? 왜 멋져?’
그녀가 아무도 거들떠봐 주지 않던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프란츠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한테 이렇게 함부로 하면 처형당하는 거 몰라?”
“너도 반말하잖아.”
“나는 황태자잖아. 너는 평민 출신 교육담당이고.”
“쩨쩨하게 구네. 엘리자벳 선생님 언제까지 기다려요? 하면서 어리광을 떨 땐 언제고.”
다시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 엘리자벳이 프란츠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프란츠가 분홍색 입술을 앙다물었다.
‘형님이 부탁하셔서 그런 것뿐이야. 문학 교수와 엘리자벳의 대화가 길어지지 않도록 감시하랬으니까!’
니콜라이가 왜 그런 부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존경해마지않는 형님이 제 도움을 원한다는 것만으로 뛸 듯이 기뻤다.
영영 멀어진 듯 했던 둘의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전부 엘리자벳이 온 뒤 생긴 일이었다.
「사실 아빠한테 잘 보이고 싶지? 날 교육담당관으로 임명하면 황제 폐하를 제국에서 제일가는 아들 바보로 만들어줄게.」
엘리자벳의 귓속말을 다시금 떠올랐다.
그녀는 프란츠가 니콜라이의 친아들이 아니란 사실을 몰랐다.
프란츠도 ‘아들 바보’가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단어는 울컥, 왠지 모를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남몰래 숨겨왔던 수줍은 소망을 건드리기도 했다.
‘다들 내가 형님을 싫어하는 줄 알지만, 난 세상에서 형님이 제일 좋아. 형님은 내 우상이니까. 엘리자벳은 그걸 어떻게 알았지?’
6년 전 모친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란츠는 모친과 함께 카나리아 방에서 살았다.
자물쇠로 잠긴 카나리아 방에 찾아오는 손님은 이복형 니콜라이가 전부였다.
승하하기 전까지 부황은 어린 애첩에게 황비 자격을 주지 않았다.
4살 난 프란츠도 황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차별 덕에 니콜라이의 아들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일까.
승냥이 떼가 득실대는 황궁에서 프란츠는 늘 혼자였다.
외로울 때마다 카나리아 방을 찾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 방에서 혹시 남아있을지 모르는 엄마의 체취를 더듬었다.
줄곧 비어 있었던 카나리아 방에 새로운 주인이 등장했다.
그날의 충격과 배신감은 이루 설명할 수 없었다.
‘형님의 권력을 탐하는 천박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엘리자벳의 정체는 뭘까?’
아주 어릴 때부터 프란츠의 주변엔 봉록을 받는 사용인과 출세를 원하는 아첨꾼뿐이었다.
웃는 얼굴 뒤에 칼을 감춘 암살자도 있었다.
그걸 찾아낸 사람도, 프란츠를 위해 목소리를 높인 사람도 이 뻔뻔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처음이었다.
“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고맙다는 인사 안 해?”
“흥. 내가 왜 폐하께 숨긴 줄 알아?”
“범인을 찾아서 입증하고 싶었겠지. 프란츠 롭 예브레이가 이렇게 유능하고 현명한 황태자라는 걸.”
“그것뿐일까?”
“골골대는 모습도 보여주기 싫었을 거야. 사랑해 마지않는 폐하께는 더더욱.”
이번에도 엘리자벳이 맞았다.
그러나 프란츠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겨우 그 정도로 목숨을 걸 만큼 어리석지 않아.”
“다른 이유가 뭔데?”
“폐하께서도 놈들의 배후를 밝히지 못하셨어. 여러 명이 자백을 했는데도. 이게 무슨 뜻이겠어?”
“네가 암살자들한테 인기가 많은 타입이라는 거?”
“그게 10살짜리한테 할 말이야?!”
프란츠가 발끈했다.
엘리자벳이 피식 웃으며 프란츠의 볼을 꼬집었다.
“저 편할 때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애늙은이를 어린애 취급해줄 줄 알고?”
엘리자벳의 손을 탁, 쳐내며 프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킥킥 웃는 그녀가 또래 친구처럼 느껴진다는 건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만만치 않다는 거야. 나는 놈들이 실수하길 기다린 거고. 그래야 배후를 제대로 잡아낼 수 있으니까.”
프란츠가 잘난척했다.
엘리자벳이 혀를 찼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우매한 녀석이로다. 쯧쯧.”
방금까지 친구 같던 그녀가 허연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네처럼 보였다.
“프란츠. 자백한 놈들은 끄나풀 중에서도 맨 끄트머리 끄나풀이야. 실수해봤자 우두머리까지는 밝혀낼 수 없어.”
“하지만…….”
“넌 위험을 자초했어. 악동 이미지라도 없었다면 놈들은 네가 뭔가 꾸민다는 걸 눈치챘겠지. 그 뒤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입막음 당했을 거란 뜻이야?”
“황태자에게 독을 쓴 놈들이 뭔 짓은 못했겠니? 네가 혼자 해결하려고 허세를 부리는 동안 진짜 큰일이 날 뻔했다고.”
프란츠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그 사실을 들킨 게 몹시 분했다.
하지만 상대는 엘리자벳이었다.
호기를 부려봤자 소용 없다는 걸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해.”
“어머! 뭐라고 하셨어요, 황태자 전하? 잘 안 들리는데요?”
“고, 고맙다고!”
프란츠가 왈칵 목소리를 높였다.
또 볼을 꼬집을 줄 알았던 엘리자벳이 프란츠의 금발을 푸스스 흐트러뜨렸다.
“착하네. 감사 인사도 할 줄 알고.”
따스한 온기가 더해진 다정한 한마디.
눈물이 핑 돌았다.
제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안도감이 목구멍을 꽉 막았다.
어쩌면 프란츠는 그저 착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줄 어른이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때론 꾸짖어주고, 때론 쓰다듬어 주는 믿을 만한 어른.
“그래도 브렌든 경을 쫓아낸 건 심했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미안하지만 그 사람은 네 생각처럼 훌륭한 스승이 아니야, 프란츠.”
“좋은 기사가 될 수 있다고 응원해 준 건 브렌든 경뿐이야.”
“전형적인 희망 고문이지.”
“신랄하네.”
“인정해, 프란츠. 넌 검술 쪽엔 재능이 없어.”
니콜라이는 황제이자, 최강의 기사들과 겨뤄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검사였다.
어릴 때부터 빼어난 실력을 자랑했다고 수없이 들었다.
그런 형님처럼 강한 남자가 되고 싶었다.
이를 악물고 고된 훈련을 버텼다.
‘친아들도, 친형제도 아니지만 내게도 형님과 같은 피가 흐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 내가 황제의 핏줄이란 걸.’
좋아하는 분야가 따로 있음에도 프란츠는 검술에만 매달렸다.
그럴수록 몸과 마음의 상처는 깊어갔다.
다른 교과목 성적은 더 떨어졌고, 자괴감도 나날이 커졌다.
“폐하께서도 말씀하셨잖아. 죽을힘을 다할 필요 없다고.”
엘리자벳이 다시 한번 프란츠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원로들은 날 폐위시키고 새로운 황태자를 세우길 원해. 나 같은 약골은 황제가 될 수 없다구…….”
“폐하가 그런 잔챙이들한테 휘둘릴 것 같아?”
“명문가 당주들이 잔챙이라고?”
“너도 신경 쓸 거 없어. 그까짓 것들 확 쓸어버리면 그만이야.”
“!”
“폐하께 부탁하면 멀리 유배를 보내 버릴지도 몰라. 한번 실험해볼까?”
검은 진주처럼 반짝이는 엘리자벳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깃들었다.
프란츠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폭군이 되라는 거야? 제국은 황제 혼자서 꾸려갈 수 없어. 귀족들 설득하는 것도 제왕의 몫이라고.”
“폐하께서 널 후계자로 삼은 이유를 알겠다.”
“뭐?”
“나라도 너처럼 영리한 애가 뒤를 이어주길 바랄 것 같아. 피 한 방울 안 섞였대도.”
알고 한 소리는 아니겠지만 울컥했다.
벅차오르는 기쁨과 간질거리는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픽 돌렸다.
“엘리자벳. 정말 나한테 검술을 가르칠 수 있어?”
“폐하께 지도법을 배우긴 했지만 대충할 셈이야.”
“대충?”
“그 시간에 우리가 따로 할 게 있거든.”
엘리자벳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잘 익은 사과처럼 붉은 머릿결도 어머니의 금발처럼 아름답다고 프란츠는 생각했다.
그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그건 또 뭔데?”
호기심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 또한 엘리자벳의 계획이라는 건 몰랐다.
알았대도 못 이기는 척 따랐을지도 모른다.
엘리자벳에겐 늘 그런 마력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