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흠잡을 데 없는 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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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흠잡을 데 없는 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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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흠잡을 데 없는 미모
2022.11.15.
니콜라이는 후회했다.
돌이켜봐도 프란츠를 끌어들인 건 비겁했다.
더글라스를 감시하기 위해서라지만, 밀정 노릇을 시키기엔 너무 어린아이였다.
「제게 맡겨주세요!」
프란츠는 뭐든 증명하길 원했다.
애달프도록 필사적이었다.
이복동생이 편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늘 괜찮다고 말해왔다.
그런 태도가 적통 황태자가 아니라는 프란츠의 자격지심을 키웠을지도 몰랐다.
‘엘리자벳은 세심하게 관찰하고 그 애 처지에서 생각해보라고 했지.’
그녀의 조언대로 프란츠의 연두색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열의로 반짝이는 눈빛을 마주했을 때, 자신이 너무나도 그리워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그 반짝임을.
「잘 부탁한다, 핀치. 내가 믿을 사람은……, 너밖에 없다.」
믿을 사람은 너밖에 없다니!
평소의 니콜라이라면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말이었다.
「저만 믿으세요, 폐하!」
애칭으로 불린 게 오랜만이어서일까.
믿어준다는 게 기뻤던 걸까.
프란츠의 환한 미소가 오히려 니콜라이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이 아이가 바란 것은 아주 사소한 것뿐이고,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보호자였는지 또다시 실감한 탓이었다.
‘엘리자벳을 교육담당관으로 임명한 건 최고의 선택이었어.’
니콜라이는 제 결정에 자부심을 느꼈다.
카레스의 아이디어였고, 엘리자벳 본인이 원한 일이었대도 말이다.
계약서를 수정하고 원만한 합의를 끌어낸 것도 성과였다.
그녀는 타인과 교제하지 않겠다는 요구도 받아들였다.
그 때문에 니콜라이가 흥분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것 같지만.
‘더글라스와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건 진심이었어. 하지만 조심해야 해. 유혹게임에서 이기려면 사소한 습관도 들켜선 안 돼.’
그날 이후로 니콜라이는 어딜 가나 작은 손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지녔다.
접힌 부분이 살짝 낡기 시작한 종이에서 희미한 체리블로섬 향기가 흘러나왔다.
엘리자벳과 같이 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지친 후각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물론 착각일 것이다.
영원히 핀 꽃은 없듯, 종이 표면에 묻은 체향도 진작 사라졌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니콜라이는 제 이름과 나란히 적힌 그녀의 이름을 품에 간직했다.
우스꽝스러운 집착 같지만 상관없었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였어. 맛은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지만, 구정물을 떠먹고 썩은 나무껍질을 씹는 것 같지는 않더군.’
니콜라이에게 식사는 몸이 요구하는 영양소를 쑤셔 넣는 성가신 과정에 불과했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식사가 즐겁다고 느껴진 건 즉위 이래 처음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니콜라이 혼자 즐겼다면 더 문제였다.
엘리자벳이 승리에 한 발짝 더 가까이 있다는 뜻이므로.
‘이대로는 안 돼. 하루라도 빨리 엘리자벳의 마음을 손에 넣어야 한다.’
상대의 마음을 갖고 싶다는 욕심과 상대를 유혹하려는 욕망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니콜라이는 몰랐다.
다만 초조했다.
늑대가 부추겼던 방식들은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경멸을 사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선물 공세도 통하지 않았다.
엘리자벳은 대귀족 못지않게 부유했다.
과거와 달리 사치품에 열광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평민들의 일상복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로즈 브렌든 황비께서 알현을 요청하셨습니다.”
카레스가 보고했다.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거절해. 보나마나 제 오라비 문제 때문이겠지.”
“새 검술 교관을 임명하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당분간 교육담당관의 뜻대로 하게 둬.”
“브렌든 후작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엘리자벳 님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다시 엘리자벳의 추종자로 돌아온 카레스가 말끝을 흐렸다.
“황태자가 건강을 해치는 것보단 낫다. 후작가가 반항한다면 황태자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시몬의 책임을 묻겠다 전해라.”
“따르겠습니다.”
“엘리자벳이 잘 해낼 것이다. 내가 직접 지도했으니.”
엘리자벳이 초보자용 검술 훈련법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의 질문이 묘하게 선정적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핀치는 기질적으로 검과 맞지 않아. 아무리 피땀 흘려 노력한대도 원하는 성취는 이룰 수 없을 거야.’
알고 있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프란츠의 열의를 꺾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프란츠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었다.
「어휴! 10살짜리가 뭐 대단한 포부가 있다고 죽을 둥 살 둥 훈련했겠어요? 다들 그래야 한다니까 매달린 거죠. 칭찬받고 싶어서,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버림받기 싫어서.」
엘리자벳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고작 며칠 만에 엘리자벳은 프란츠의 모든 걸 꿰뚫었다.
니콜라이 자신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폐하. 네틀톤 후작을 꼭 문학 교사로 임명하셔야 했습니까?”
“뭐가 문제지?”
“세간의 이목이 엘리자벳 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전 약혼자 때문에 괜한 구설에 휘말릴지도 모릅니다.”
“구설 따위에 흔들릴 여인이 아니다.”
“원로들은 네틀톤 후작가가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를 거라 믿는 듯합니다.”
“긴장하고 경계하겠지. 자기들이 가진 권력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테고.”
“더 노골적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뭐, 이를테면 역모 같은?”
니콜라이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카레스는 지나치게 태연한 주군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반역. 황위 찬탈. 피. 죽음.
어느 하나 입에 쉽게 올릴 말이 아님에도 거침없었다.
하지만 모른 척 외면할 수도 없었다.
“쥐새끼가 두려워 숨을까? 내가 그런 황제가 되길 바라나?”
“폐하.”
“내 걱정 집어치우고, 프란츠를 노린 자들이나 찾아와. 곱게 죽이지 않을 테니.”
무능함을 사죄하듯 카레스가 머리를 조아렸다.
니콜라이도 충신을 더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워든 쪽 동향은?”
“워든 왕비가 국정을 장악했다는 소식입니다. 이제 국왕은 왕비의 꼭두각시일 뿐이라더군요.”
“감시를 게을리하지 마라. 하트만의 폐황후가 적국 왕비로 즉위했으니.”
“끔찍한 여자입니다. 그 누구보다 폐하를 증오하고 있고요.”
니콜라이가 피식 웃었다.
증오라는 말로 페넬로페의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분노나 복수심이란 단어조차 중립적이고 모호하게 느껴졌다.
황궁에서 쫓겨나기 전 페넬로페는 이런 말을 남겼다.
「영혼을 걸고 널 파멸시킬 것이다, 니콜라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네 살을 갈기갈기 찢고, 철철 흐르는 네 피를 마시기 위함이다! 울부짖어라, 니콜라이. 널 기다리는 종말을 향해!」
페넬로페란 이름을 발음할 때마다 두개골이 쪼개질 듯한 두통과 메스꺼움이 동시에 일었다.
니콜라이가 12살 무렵, 20살의 페넬로페는 부황의 옆자리를 차지하며 그의 계모가 되었다.
제국 제일미로 추앙받던 명문가 여식이었다.
황후즉위식 날 어린 니콜라이조차 새어머니의 아름다운 자태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 주위엔 늘 죽음이 떠돌고, 결국 제 손으로 쫓아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워든과 내통하는 놈이 있다면 페넬로페와 끈이 닿아 있을 확률이 높다.”
“워든 왕비를 황태자 전하 시해의 배후로 보십니까?”
“그 여자가 프란츠를 노렸다면, 그 애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악녀지요.”
“두 달 후 대대적인 병력이동이 있다. 워든에 빌미를 주지 않도록 주둔 단장에게 전하라.”
“클라우디아 로즈로이스 경 말씀입니까?”
니콜라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엘리자벳이 잠결에 웅얼거렸던 한 마디가 떠오른 탓이었다.
「난 또 라디아인 줄 알았네.」
엘리자벳 주변을 모조리 조사했지만, 라디아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애칭이었다면?
‘그녀가 꿈속에서도 두려워하는 존재가 클라우디아 로즈로이스 경인가? 하지만 왜? 전 약혼자의 소꿉친구일 뿐인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이어졌다.
마지막에 남는 건 언제나 엘리자벳과 그녀 위로 드리워진 더글라스의 그림자였다.
미친 듯이 엘리자벳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더글라스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그저 친구 사이일 뿐이라는 걸 거듭 확인하고 싶었다.
엘리자벳은 몰라도 너무 몰랐다.
황제와 몰락한 후작가 당주의 압도적 차이를 직접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로맨스 소설 나부랭이나 쓰는 남자와 자신을 저울질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은가?
니콜라이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훑어내렸다.
‘오늘도 훌륭하군. 흠잡을 데가 없어.’
남녀노소 모두가 침이 마르게 칭송하는 미모를 왜 엘리자벳만 몰라보는 걸까?
미남이라면 볼만큼 봤다 이건가?
‘더글라스는 간사한 혀와 교묘한 글줄로 사람의 심리를 조종하는 놈이다. 내 눈으로 감시해야 해.’
아드득, 니콜라이의 어금니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종종 더글라스의 흐리멍덩한 매력에 빠진 엘리자벳이 제 등에 칼을 꽂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더글라스가 저 몰래 향기로운 입술을 취하고, 한 줌도 되지 않는 허리를 감싸 안는 상상도 이어졌다.
한시라도 빨리 이 게임에서 이겨야 했다.
그녀가 다른 곳에 한눈팔지 않도록.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도록.
“서둘러야 한다.”
저도 모르게 니콜라이가 읊조렸다.
카레스는 달리 이해했다.
“바로 인테드 제도에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그 일도 서둘러야지.”
“네?”
“전령은 늦다. 클라우디아 로즈로이스를 황궁으로 소환하라. 친히 명하겠다.”
계획에 없었지만, 클라우디아를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
황궁 도서관은 오늘도 텅 비어 있었다.
경비병은 문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사서도 책상에 머리를 박고 뭔가 끼적이기 바빴다.
집중할 시간이 필요한 내게 퍽 이로운 일이었다.
“도저히 엄두가 안 나네. 두 번째 신물을 찾아야 하는데.”
황궁 도서관의 장서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았다.
최고급 참나무로 만들어진 책장이 얼마나 높은지 올려다보면 고개가 아플 지경이었다.
막막함도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프란츠가 흥미로워할 어린이용 신학 교재도 골라야지.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검술 훈련은 기초 체육으로 바꾸고, 예술 수업과 신학 수업을 늘릴 계획이었다.
기뻐할 줄 알았던 프란츠가 입을 뾰로통 내밀었다.
「신학은 나중에 해도 된다고 폐하께서 말씀하셨어.」
「서둘러서 나쁠 건 없지. 모라신시아 신학부터 시작하자. 」
「그건 더 싫어.」
「왜?」
「어쨌든 싫어. 신관이 될 것도 아닌데 뭐하러 배워?」
왜냐고? 당연히 두 번째 신물을 찾기 위해서지!
하지만 어떻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나 혼자는 제약이 따르니, 황태자의 고사리손을 이용하겠다고.
「위대한 치유의 여신이잖아. 선황께서 여신의 힘을 빌려 돌림병을 무찔렀다던데?」
「전부 거짓말이야. 난 안 믿어.」
「지루한 이론 공부는 안 해. 여신의 전설과 비밀을 파헤칠 거야. 흥미진진하지?」
「전혀.」
「신전도 탐험하고! 신관들도 취재하고! 얼마나 유익하겠니?」
날 빤히 바라보던 프란츠가 불쑥 물었다.
「엘리자벳.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지?」
누가 니콜라이 아들 아니랄까 봐, 프란츠는 정곡을 찔렀다.
눈물을 머금고 계획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책장에서 두툼한 신학 서적 한 권을 빼냈다.
“너희들도 고생이다. 황제는 여자들이랑 노느라 바쁘고, 황태자는 싫다고 난리인데.”
책등에 쌓인 뽀얀 먼지 때문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 콜록.”
그때 눈앞으로 반듯하게 접힌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서 누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