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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위험한 짐승, 본색을 드러내다 (23/97)


#23. 위험한 짐승, 본색을 드러내다
2022.11.18.


안 보고 넘어갈 수 없는 턱선.

감탄이 절로 나오는 콧날.

자신이 잘생겼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오만한 눈매.

오늘도 니콜라이는 세계관 최고 미남의 존재감을 과시 중이었다.


“폐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지나가다 들렀다.”

“그럴 리 없을 텐데요.”

“어떻게 확신하지?”

“폐하의 주 생활공간은 본궁 1층 알현실, 2층 집무실, 연무장이에요. 어느 곳도 여기와 동선이 겹치지 않아요.”

“조사 많이 했군.”

돈도 좀 썼다.

마성의 매력도 아끼지 않았고.


“내가 여자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다는 것도 알았을 텐데?”

바람둥이 취급이 불쾌한 듯 니콜라이의 말투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솔직히 놀랐어요. 하루 대부분을 후궁에서 보내시는 줄 알았는데.”

“그대 입으로도 말하지 않았나? 내가 소문처럼 문란한 카사노바는 아닌 것 같다고.”

“가끔 폐하의 행동을 보면 그 소문을 다시 믿고 싶어지거든요.”

“그날 일을 아직도 담아두는 건가?”

그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더듬고, 키스하려던 그날.

갑작스러운 선공에 몹시 당황했다.

떨림 역시 주체하기 힘들었다.

놀랐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방어적으로 굴었다.

줄곧 후회했다.


‘키스부터 하자고 할 때는 언제고. 세상 조신한 숙녀처럼 굴었으니 니콜라이도 황당했겠지.’

엘리자벳에 빙의한 후에도 유교걸의 근본은 변치 않았다.

이성 문제에 있어서 지나치게 고지식했고, 자주 경계심이 발동했다.

그게 나였다.

한국에서 김예나로 살 땐 아무 문제 없었다.

오히려 그런 내가 좋았다.

문제는 폭군을 유혹하는 데 큰 걸림돌이라는 거였다.


‘원작 엘리자벳이라면 더 대담하고 적극적이었을 거야. 이기려면 그쪽이 훨씬 더 유리할 텐데. 팜므파탈이 됐는데 왜 써먹질 못하니.’

교육담당관 자리를 꿰찼지만, 유혹게임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머지않아 클라우디아가 돌아온다.

원작보다 빨리 돌아올지도 몰랐다.

유교걸의 전생을 벗어나 진정한 팜므파탈로 거듭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일단 연습 좀 해 볼까?


“그날을 마음에 담고 있는 건 제가 아니라, 폐하인 것 같은데요?”

눈매를 사르르 접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몇 번의 심호흡과 마인드컨트롤이 필요했지만 내 몸은 엘리자벳의 교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 승리할 수 없을 거라며?”

“조언이었을 뿐이에요. 거슬리면 흘려들으세요.”

“그럴 수야. 난 전과 다른 방식으로 그대를 공략하려 한다.”

니콜라이가 책장에 팔을 기대고 내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내렸다.

그의 녹안에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황제가 아닌 사내의 눈빛이었다.

아니,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일까.

공기가 희박해지는 걸 느끼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공략이라니. 난공불락의 성이 된 기분이네요.”

“적국의 요새보다 그대를 함락시키는 게 더 어렵다.”

“칭찬인가요?”

“투정일지도.”

공략에 함락까지.

이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말을 하는지 알까?

한 마디, 한 마디가 명치 언저리를 아찔하게 내려친다는 걸.


“그대는 솔직해 보이지만 모든 게 비밀투성이지. 다가가는 것도, 만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아.”

“…….”

“그대처럼 황제를 곤란하게 하는 여인이 또 있을까?”

니콜라이가 커다란 손을 뻗었다.

내 얼굴에 다섯 손가락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심장박동이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으나 신체 어느 부분도 맞닿지 않았다.

그런데 온몸의 솜털이 오소소 곤두섰다.

터질듯한 긴장감이 뱃속 깊은 곳에서 바글바글 끓어올랐다.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이대로 주도권을 빼앗길 수 없었다.


“우는소리 하지 마세요. 제 상대도 무척 까다로우니까요.”

은밀한 미소와 함께 오른손으로 그의 턱선을 감쌌다.

일순 니콜라이의 동공이 확 커졌다가 좁아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무언가가 그의 내부에서 뚝 끊어진 것만 같았다.


‘내 쪽에서 먼저 건드릴 줄은 몰랐지? 당하느니, 범하는 게 훨씬 나아.’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엘리자벳.”

신음과도 흡사한, 낮게 갈라진 음성.

천천히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

가지런한 치열 양옆으로 유난히 날카로워 보이는 송곳니가 드러났다.


“역시 넌 재미있어.”

 

 
낯선 말투가 튀어나왔다.

니콜라이는 지금껏 한 번도 날 ‘너’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번들거리는 탐욕을 내비친 적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밑도 끝도 없는 확신이 날 사로잡았다.


‘이건 니콜라이가 아니야……!’

더 거칠고, 더 충동적이고, 더 야성적인 무언가.

머릿속에 새빨간 경고등이 요란하게 번쩍댔다.

막다른 골목에서 굶주린 짐승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당장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얼어붙은 다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조차 제대로 내뱉을 수 없었다.

생존본능에 기대어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폐, 폐하?”

“……!”

“제가 아는 폐하 맞아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니콜라이가 어깨를 퍼뜩 튕겼다.

무릎을 반쯤 굽히며, 책장에 등을 기댔다.

한층 가빠지는 그의 숨소리가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하아. 하아…….”

니콜라이는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다

날카롭고 꺼림칙한 무언가를 억지로 삼키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무얼까.

뭔데 이를 악물고 몸부림치는 걸까.


“……이제 괜찮다.”

괜찮지 않아 보였다.

창백한 얼굴은 알 수 없는 열패감으로 얼룩졌고, 이마엔 식은땀이 촘촘히 맺혔다.

그래도 내게 익숙한 니콜라이였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쥐고 있던 손수건에서 그제야 힘을 풀었다.


“땀을 많이 흘리셨어요.”

니콜라이의 손수건으로 그의 이마를 톡톡 닦아냈다.

그는 몹시 지친 기색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까지 니콜라이는 몇 번이나 가면을 바꿔썼다.

냉혹한 황제.

퇴폐적인 바람둥이.

어설픈 순진남.

어떤 얼굴은 거짓이고, 어떤 얼굴은 진실일 터였다.

어쩌면 거짓에도 진실의 파편이 섞이고, 진실에도 거짓의 얼룩이 묻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얼굴과도 달랐다.

광포한 짐승이 본색을 드러낸 것만 같았다.

어떤 얼굴이 진짜 니콜라이일까.

지금 이 남자는 어째서 이토록 짙은 슬픔과 외로움을 거리낌 없이 내비치고 있을까.


“바람을 쐬셔야 할 것 같아요. 찬물로 세수도 하시고요.”

일부러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배려라는 걸 니콜라이가 눈치챘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손을 내밀었다.


“함께 가겠는가?”

니콜라이는 몰랐다.

언제부턴가 그가 내민 손을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나 역시 알 수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이 떨림이 어디서 시작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이왕이면 좋은 곳에 데려가 주세요.”

겨우 엘리자벳의 요염한 미소를 흉내 냈다.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니콜라이는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 모습은 왜 또 애달플까.

천하를 다 가진 남자가 뭐 불쌍하다고.

***



“여기가 좋은 곳이에요?”

답답한 후드 자락을 걷어 올렸다.

역시 후드를 쓴 니콜라이가 기름때로 끈적끈적한 테이블에 턱을 괬다.


“편견을 버리고 즐겨봐.”

술꾼들의 왁자한 웃음소리 탓에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니콜라이에게 바짝 귀를 붙였다.


“뭐라고요?”

“즐. 기. 라. 고.”

담배 연기와 매캐한 숯 냄새, 상한 채소 냄새가 좁은 실내를 꽉 채웠다.

발밑에는 온갖 쓰레기가 뒹굴었고, 주방을 기웃거리는 살찐 쥐도 보였다.


“술주정뱅이, 도박꾼, 쥐 사이에서 뭘 즐기라는 거예요?”

“꽤 즐길만 해. 어릴 때부터 즐겨 찾던 곳이지.”

“취향 한번 고급지시네요.”

“별말씀을.”

“혼자 오지 그러셨어요. 저분들도 반겨주셨을 텐데.”

턱짓으로 요란한 화장을 한 여인들을 가리켰다.

속살이 비치는 드레스인지, 드레스처럼 보이는 속옷인지를 걸친 그녀들은 익숙한 솜씨로 상대를 찾고 있었다.


“잘생긴 오빠! 나랑 술 한잔해요.”

여인들은 노골적인 몸짓으로 사내들을 유혹했다.

이 가게에 얼굴이 빨개지는 정상인은 나 하나뿐이었다.


“벌건 대낮에 저래도 되는 거예요?!”

“서로 좋아들 하잖나.”

용병이 한 여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여인이 허리를 뒤로 꺾으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곧이어 두 남녀의 진득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유교걸의 영혼은 잠시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흠흠. 저런 걸 보여주려고 데려온 건 아니다.”

쏟아지는 휘파람 사이로 니콜라이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민망해하는 걸 보니 약간의 상식은 남은 모양이었다.


“그럼 왜 데려오셨는데요?”

“꼬치구이가 아주 맛있는 집이다.”

“꼬치구이요?”

“그대에게 맛보여주고 싶었다. 옛날엔 나도 맛있게 먹었으니까.”

얼른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마다 꼬치구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새우, 돼지고기, 닭 날개, 버섯 등등 숯불에 구운 꼬치는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니콜라이가 더러운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에게 손짓했다.


“하나씩 전부 가져와.”

“그렇게 많이는 못 먹어요!”

겸손을 떨었던 것이 고작 10분 전이었다.

나는 빈 꼬치를 집어 던지는 동시에 새 꼬치를 움켜잡았다.

쪽쪽, 손가락을 빨아가며 입안에 가득 터지는 육즙을 음미했다.


“여기 진짜 맛집이네요!”

“많이 못 먹는다던 사람은 대체 어디 간 거지?”

“숯불에 구운 고기를 어떻게 참아요? 특히 돼지고기가 환상이에요!”

아아, 삼겹살이다.

눈물겹도록 그리운 고향의 맛!

고추장과 청양고추가 있었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오랜만에 마음껏 먹었다.

니콜라이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나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황궁 조리장이 만든 요리는 왜 안 먹었지?”

“솔직하게 말해요, 예법에 맞게 말해요?”

“엘리자벳과 예법이라니 어울리지 않는군.”

“그럼 속 시원히 말씀드리지요.”

삼겹살 꼬치를 내려놓고, 지저분한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역대급 최악이었어요. 짜고, 달고, 시고, 느끼하고. 입안에서 각종 양념이 서로 으르렁대는 것 같달까요?”

“그 정도였나.”

“폐하는 그런 걸 어떻게 드세요?”

“살아야 하니까.”

“뭐예요. 미각이 마비된 사람도 아니고.”

“마비됐지. 꽤 오래전부터.”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내가 더 놀랐다.

기계처럼 씹더라니, 정말 맛을 못 느낄 줄이야.

온갖 양념을 퍼부어야 했던 조리장의 고뇌도 느껴졌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미각이 사라지기도 한다던데. 황제로 사는 것도 제법 팍팍한 모양이야.’

약간의 동정심에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초콜릿케이크를 제일 좋아하셨군요.”

“그건 어떻게 알았지?”

“뭘요?”

“내가 초콜릿케이크를 즐긴다는 건 최측근 몇 명밖에 모른다. 누가 알려준 건가?”

“글쎄요. 어디서 우연히 봤거나 들었겠죠?”

즉흥적인 변명으로 니콜라이를 설득할 수 없었다.


“우리가 식사를 같이 한 건 한 번뿐이고, 그날은 초콜릿케이크를 먹지 않았어. 들이지도 말라 했으니 요리사도 굽지 않았겠지. 그런데 우연히 들었다고?”

“원래 상인은 정보에 빠른 법이에요.”

“그대는 엠스터 상단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상단의 돈은 펑펑 써댔지만.”

차라리 영매 핑계를 댈 걸 그랬나?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을까?


“먹는 즐거움을 모르시니 사는 재미가 정말 없겠네요.”

“말 돌리지 마라, 엘리자벳”

“인간의 3대 욕구인 식욕, 수면욕, 성욕 중에서도 식욕이 최고라고요.”

“나는 식욕을 느껴본 적 없다.”

“아! 그래서 모든 욕구가 죄다 성욕으로 쏠린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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