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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또 내 가슴을 적실 테니까 (24/97)


#24. 또 내 가슴을 적실 테니까
2022.11.22.



“그대는 나를 뭐로 보는 건가?”

분노일까. 서러움일까.

북받치는 감정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니콜라이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싸구려 맥주잔을 움켜쥔 손등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도드라졌다.


“성욕의 화신? 여인만 보면 침을 질질 흘리는 난봉꾼?”

“아니신가요?”

“그대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누군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니콜라이의 녹안이 냉랭하게 가라앉았다.

말을 돌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왁자지껄한 소란 속에서 오로지 서로에게 집중하던 은밀한 즐거움도 사라졌다.

오늘따라 다정한 그와 맛난 음식에 느슨해졌던 정신을 다잡았다.


“솔직해 보이지만 저의 모든 게 비밀투성이라고 하셨지요. 그건 폐하도 마찬가지예요.”

“…….”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왜 돌변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알려주시지도 않잖아요.”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다.”

“그럼 속내를 몰라준다고 원망하기 전에 돌이켜보세요. 폐하는 얼마나 솔직하셨는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미궁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니콜라이는 원작 폭군과 너무도 달랐다.

세간에 알려진 황제와도 일치하지 않았다.

더 정중하고, 더 얄밉고, 더 위험하고. 그리고 아름다웠다.


‘처음부터 궁금했어. 왜 계약을 강요하고, 나와 같이 밥을 먹고, 내게만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지.’

흉포한 짐승의 얼굴로 내 목덜미를 움켜쥐려 했지만, 호기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날마다 몸집을 불렸다.

니콜라이는 늘 낯선 감각을 들쑤셨다.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던 감정 또한 일깨웠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남자의 품이 그토록 안락하다는 걸 몰랐겠지.

내가 단단하고 긴 손가락을 좋아한다는 것도, 맛있는 걸 사주는 사람에게 흔들린다는 사실도 알 수 없었겠지.

모든 걸 가진 남자가 안아주고 싶을 만큼 애처로워 보인다는 것 또한.


“말씀해주세요. 폐하는 어떤 분이신가요?”

물끄러미 날 바라볼 뿐 니콜라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조심스러운 질문은 뻔한 실망으로 돌아왔다.

특별하다고 느낀 건 착각인지도 몰랐다.

우린 계약에 따라 서로를 유혹하는 사이에 불과했다.

전부 내가 원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울고 싶어지는 걸까.


‘솔직할 자신도 없으면서 니콜라이한테 뭘 바라는 거야. 알면 뭐가 달라져?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진실은 털어놓는 쪽과 받아들이는 쪽 모두에게 무거웠다.

가벼이 취급당한 진실은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진실을 요구한 사람도, 고백한 사람도 벗어날 수 없는 책임.

그에 반해 비밀과 거짓말은 얼마나 편리한가.

우리는 더 좁고 견고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기름진 고기가 허옇게 굳어갈 즈음 니콜라이가 말문을 열었다.


“그대는 엘리자벳이잖아.”

“?”

“엘리자벳 엠스터는 모든 걸 다 알잖아.”

“그게 무슨 뜻이죠?”

“언제나 진실을 꿰뚫고, 늘 한 발짝 앞서는 게 그대 아니던가?”

지금껏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고?

뭔가 칭찬처럼 들리긴 했지만, 이내 씁쓸해졌다.


“폐하야말로 저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시네요.”

“그 또한 사실이지.”

“저도 매 순간 죽을힘을 다하고 있어요. 아등바등 몸부림치고 있다고요.”

“그리 보이지는 않는다.”

“거봐요. 제대로 못 보셨잖아요.”

더 이상 말하지 마, 엘리자벳.

어차피 이해받지 못해.

두려움과 외로움은 오직 네 몫이야.

그는 너의 순진함과 무지를 들여다보면서 자극하는 것뿐이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데 니콜라이가 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래도 난…… 오해를 받고 싶진 않다.”

“……네?”

“그대에게 미움받고 싶지도 않다.”

이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상처받은 아이처럼 일렁이는 초록 불꽃을.

간절한 바람을 담아 날 바라보는 저 아름다운 눈동자를.


“내가 고백한다면 그대도 모든 걸 털어놓겠는가?”

“뭐가 듣고 싶으신데요?”

“그대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싶다.”

“…….”

“뭘 두려워하는 건지. 잠결에서조차 쫓기는 이유는 뭔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대해서도.”

잠시 숨을 멈췄다.

켜켜이 쌓인 비밀의 끝자락을 조금 밟혔을 뿐인데 어지러웠다.


‘니콜라이는 어디까지 아는 걸까? 조금만 털어놓을까? 아니야. 충동적으로 행동하면 안 돼. 치밀한 계략일지도 몰라.’

망설임이 길어졌다.

계약은 있지만 믿음은 없는 사이였다.

나는 그것이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껄끄러웠다.


“역시 대답하지 않는군.”

예상했다는 듯 씁쓸한 어조였다.


“실망하신 건가요?”

“아니. 쉬우면 실망했겠지.”

의외의 대답에 눈꺼풀을 깜빡였다.

니콜라이의 입매가 느른한 호선을 그렸다.

내내 날이 서 있던 눈매도 살짝 내려앉았다.


“말하지 않았나. 그대는 어떤 요새보다 공략하기 어렵다고.”

“……!”

“그런 여자라 가치 있는 거지만.”

 

 
그가 엄지로 내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았다.

얼굴을 붉히긴 일렀다.

니콜라이가 엄지로 닦아낸 소스를 혀로 할짝였다.

두 눈만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육감적인 입술 사이로 촉촉한 분홍색 혀가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맥이 풀리고, 입이 바짝 말랐다.

술기운이라도 빌리고 싶었다.

그의 손에서 통나무 맥주잔을 낚아챘다.


“저도 한 모금 주세요.”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려는데 니콜라이가 도로 맥주잔을 가져갔다.


“술은 허락하지 않는다.”

“왜요?”

“또 내 가슴을 적실 것 아닌가.”

니콜라이가 셔츠 앞섶을 만지작거렸다.

눈물 콧물로 더럽혀졌던 옷 이야기를 하는 건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숨겨둔 마음 어딘가를 깨물린 것 같았다.


“술은 안돼. 우는 것도 안 된다.”

“황명인가요?”

“애걸이다.”

이 남자는 요물이다.

여자를 홀린다는 소문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유혹게임에서 앞서가는 건 언제나 니콜라이였다.

맥박이 날뛰는데 그가 새로운 방식으로 날 궁지에 몰았다.


“클라우디아 로즈로이스 경을 소환했다.”

“!”

“그대도 만나보겠는가?”

 

***

시몬은 곰팡내 나는 지하실에 무릎 꿇려졌다.

반투명한 베일 뒤로 비밀스러운 여인이 읊조렸다.


“실망시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시몬.”

“제 탓이 아닙니다! 엘리자벳이란 계집이 저를……!”

“징징대지 마라. 얼마 안 남은 정, 다 떨어질 것 같으니까.”

“황제는 미쳤습니다. 그 계집의 치마폭에 휩싸여 사리 분별을 못합니다.”

“6년 동안 원로들도 너와 똑같은 말을 했지. 하지만 제국은 여전히 멀쩡해.”

여인의 음성이 매서워졌다.

시몬은 잠시 침묵을 택했다.


“시몬. 황태자에게 독을 쓴 게 너냐?”

“절대 아닙니다! 마마께서 하신 게 아니었습니까?”

“내가 그리 얄팍한 수를 썼을 것 같으냐?”

“그럼 누가 황태자를 해치려 했을까요?”

“글쎄. 분수도 모르고 하트만의 심장을 노리는 벌레들이 너무 많아서.”

“다른 황비 중 한 명이 그랬단 말씀이시군요.”

“내무대신이 탈탈 털고 있으니 뭐라도 나올 것이다.”

“우리 쪽에서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반역이라도 하자는 것이냐? 고작 검술 교관 잘렸다고?”

시몬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비웃음을 섞어 여인이 답했다.


“혁명엔 명분이 필요하다. 백성들 모두가 인정할 만한 치명적인 사건이 있어야 해.”

“방탕한 사생활로는 부족하다는 거군요.”

“우매한 백성들은 황제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아. 배부르고, 등 따시면 나라야 누가 다스리건 관심 없어.”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주랴는 듯 여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당분간 황태자는 건드릴 수 없다. 너도 이젠 전처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고.”

“변명으로 들리시겠지만, 엘리자벳은 보통 계집이 아닙니다. 독사의 혀를 가졌습니다.”

“그 계집이 두려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분간 날 찾지 말라. 내무대신의 수족들이 곳곳에 깔렸으니.”

“저를…… 내치시는 겁니까?”

“슬픈 표정 짓지 말아라, 시몬.”

“어찌하면 마마의 신임을 다시 얻을 수 있습니까?”

간절한 어조로 시몬이 물었다.

여인의 즉답이 돌아왔다.


“그 계집의 목을 가져오너라.”

“!”

“내 안뜰에서 그런 게 날뛰는 꼴은 두고 볼 수가 없다.”

잠시 흔들리던 시몬의 눈빛에 섬뜩한 기운이 깃들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서두르지 마라. 네 말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신중, 또 신중하겠습니다.”

“남부 국경에선 답신이 왔느냐?”

“순조롭습니다.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그래야 할 것이다. 계속 나를 보고 싶다면.”

“소인께는 마마뿐이옵니다.”

“나는 무능한 남자를 곁에 두지 않는다. 특별한 재미라도 선사한다면 모를까.”

여인이 베일 밖으로 구두코를 내밀었다.

세상에서 제일 값진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시몬이 여인의 발치로 기어갔다.

모처럼 쓸모를 증명할 수 있게 된 시몬이 떨리는 목소리로 맹세했다.


“저를 모욕하고, 마마의 심기를 건드린 엘리자벳의 목을 바치겠습니다.”

 

***

꼬치구이집을 나선 뒤에도 엘리자벳은 조용했다.


‘엘리자벳을 너무 몰아세웠다. 욕심부리지 말 것을. 그저 잠자코 있을 것을.’

니콜라이는 달빛에 비친 그녀의 옆얼굴을 두 눈에 담았다.

동그스름한 이마에서 이어지는 콧대와 입술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맥주를 한 모금 먹다 말았을 뿐인데 두 뺨은 장밋빛으로 달아 올라 있었다.

한 올 한 올 그린 듯한 눈썹도, 부챗살처럼 가지런하게 내뻗은 속눈썹도 짙은 선홍색이었다.

니콜라이의 심장을 멋대로 휘젓고 남몰래 물들이는 매혹적인 색깔이었다.


‘이해받고 싶었고, 이해하고 싶었어. 그런데 이번에도 서툴렀나 보군.’

클라우디아의 이름이 튀어나오자마자 엘리자벳은 딱딱하게 굳었다.

탁하게 침잠하는 검은 눈동자. 파르르 떨리는 석륫빛 입술.

그녀가 굵은 눈물을 떨어뜨릴까 봐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찬란하게 웃었다.


「저도 만나보고 싶어요. 로즈로이스 경이 입궁하면 꼭 불러주세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발랄한 목소리를 꾸며내야 했을 만큼, 엘리자벳은 동요했다.

니콜라이는 여전히 그 까닭을 알지 못한 채, 안타까움만 곱씹을 뿐이었다.


“인적 드문 곳으로 가자. 황제의 마차는 너무 눈에 띈다.”

“호위 기사들은요?”

“숨어 있으라 했는데 그대에겐 이미 들킨 모양이군.”

“넘겨짚은 거예요. 폐하께서 혼자 움직이실 리 없으니까요.”

“역시 그대는 영리하다.”

“이제라도 알아봐 주시니 황공합니다.”

엘리자벳이 우아한 동작으로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렸다.


‘칭찬은 거리낌 없이 해도 된다는 뜻일까?’

니콜라이는 몇 가지 연습을 하고 있었다.

제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여전히 서툴렀다.

뼈아픈 실수를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자물쇠를 풀려면 열쇠가 필요했다.

엘리자벳이 열쇠를 쉬 내줄리 없으므로 니콜라이는 두드리고, 또 두드릴 참이었다.

일 년이 지나고 십 년이 흐른대도 괜찮았다.

인내심만큼은 자신 있었다.


“원하는 곳이 있다면 환궁하기 전에 둘러봐도 좋다.”

“폐하와 함께요?”

“그대가 괜찮다면.”

“맛있는 것도 사주시고, 에스코트도 해주신다니. 가문의 영광이에요.”

“알아주니 다행이다.”

“그러잖아도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같이 가 주실래요?”

숨길 겨를도 없이 니콜라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엘리자벳이 그에게 기회를 주려는 거였다.

그녀의 손을 덥석 붙들뻔했다.

사실 한 팔로 여린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니키. 저승꽃 냄새가 난다.」

늑대가 속삭였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 앞에서 저주받은 사슬이 니콜라이의 목을 휘감았다.

황제의 관을 쓴 운명의 노예.

니콜라이는 처음으로 반항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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