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먼저 꼬실 때는 언제고? (25/97)


#25. 먼저 꼬실 때는 언제고?
2022.11.25.



-기다려.

「바로 가야 한다. 어느 때보다 강한 기운이야.」

늑대가 재촉했다.

니콜라이가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쇠 맛이 혀끝에 맺혔다가 익숙한 쓴맛으로 바뀌었다.


-기다리라고.

「저 향기로운 여자에게 단단히 홀렸군.」

-닥쳐.

「항상 널 지켜보는 날 속이지 마. 너보다 네 욕망을 잘 아니까.」

-두 번 다시 멋대로 튀어나오지 마라. 용납하지 않겠다.

공허하고 씁쓸한 경고였다.

용납하지 않으면 어쩌겠단 말인가?

제국엔 늑대가 필요했다.

황제는 늑대와 공존해야 했다.

아니, 늑대의 눈치를 보고 놈이 원하는 먹잇감을 제때 던져줘야 했다.

늑대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았고, 틈만 나면 이용하려 들었다.


「도서관에서의 일 말인가?」

-뻔뻔한 놈.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너도 알잖아? 이 여자의 체취는 나도 미치게 만든다고.」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지금도 엘리자벳의 달콤한 향기가 생각나서 미칠 지경이야. 너처럼 말이지.」

니콜라이와 똑같은 얼굴을 한 늑대가 혀를 날름거렸다.

낯선 충동이 끓어올랐다.

제국과 백성들이 어찌 되건, 몸 안에 똬리를 튼 늑대를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었다.

그마저도 늑대에게 들키고 말았다.


「날 죽여도 괜찮겠어? 제국에 저승꽃이 다시 만발할 텐데.」

-…….

「이봐, 니키. 이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지 몰라?」

늑대가 조롱했다.

준엄한 척했지만, 결과는 매번 똑같았다.

늑대가 원하는 대로, 늑대가 이끄는 대로.

사슬에 묶인 짐승은 늑대가 아니라 니콜라이였다.

하지만 오늘만은 엘리자벳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곳에, 그녀를 데려다주고 싶었다.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엘리자벳이 올려다봤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요.”

“거기가 어디지?”

“가면서 말씀드릴게요.”

“…….”

“긴히 드릴 말도 있어요. 폐하께서 듣고 싶으시다면.”

별빛을 담은 엘리자벳의 검은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어쩌면 굳게 닫힌 마음 한쪽을 내주려는 걸지도 몰랐다.


‘밤새도록 그대에게 귀 기울이고 싶다. 시답지 않은 농담도 좋다. 나는 이미 그대의 체취에 취해 있을 테니까. 취기를 빌어 이 밤이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여신께 빌 것이다. 여신이 나를 비웃는 동안 나는 꿈을 꿀 것이다. 그대도 나와 같은 기도를 올리는 감미롭고 허황된 꿈을.’

하지만 늑대는 무엇도 허락하지 않았다.


「니키. 선황의 유언 따위는 잊었어?」

목에 감긴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니콜라이는 다시 운명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만 돌아가야 한다.”

“같이 가 주신다면서요?”

“바삐 해야 할 일을 잊었다.”

“진짜 잠깐이면 되는데…….”

엘리자벳이 소심하게 니콜라이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절 올려다보는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이 밤이 아니면 하지 못할 말들이 그녀의 뺨과 입술에 준비되어 있었다.

쓰라린 갈등 끝에 니콜라이는 반드시 후회할 말을 내뱉었다.

작은 손도 뿌리쳤다.


“바쁘다지 않느냐. 안 그래도 성가신데!”

겨우 시선을 피했지만, 엘리자벳을 둘러싼 반짝임이 하나둘 꺼지는 게 느껴졌다.

싹텄을지도 모를 믿음 하나.

잠시 보드라워진 눈빛 하나.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용기 하나.

그렇게 니콜라이는 자신의 마지막 구원과 멀어져야 했다.


「장하다, 니키. 이번에도 인내했어. 역시 넌 훌륭한 황제야.」

적막 속에서 늑대의 빈정거림이 오래 맴돌았다.

니콜라이는 오랜만에 죽고 싶어졌다.

늑대를 물려받던 대관식 날처럼.

***



“엘리자벳, 종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프란츠가 책상을 탁탁 두들겼다.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다 퍼뜩 고개를 돌렸다.


“미안.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무 말도 안 했거든?”

“하하. 그랬나?”

“텅 빈 일과표를 보고도 웃음이 나와? 어젯밤에 뭐 했어?”

네 아빠한테 홀랑 넘어가서 미주알고주알 다 떠들뻔했지.

변덕스럽고도 공사다망하신 네 아빠 덕에 치명적인 실수를 막았단다.

어휴 고마워라!


“제발 선생님 사생활에 관심 꺼줄래?”

“선생님은 제자 학업에 관심 좀 가져주지?”

“얄미운 꼬마 녀석 같으니.”

“게으른 교육담당관 주제에.”

빈정거리는 말재주만큼은 타고난 녀석이었다.

프란츠 덕에 차갑게 등 돌리던 니콜라이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사실은 거짓말이다.

무슨 수를 써도 잊히지 않았다.


‘드라이브하자고 꼬실 때는 언제고.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렇게 바쁜 양반이 도서관이며 꼬치구이집이며 어떻게 가셨대? 바빠? 성가시다고? 내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원!’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억지로 밀어내봤지만, 새로운 니콜라이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한두 명도 아니었다.

서로 다른 얼굴을 한 꼬꼬마 니콜라이들이 떼로 등장해 한마디씩 떠들어댔다.


「역시 넌 재미있어.」

「그대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대에게 오해받고 싶지 않다.」

「그런 여자라 가치 있는 거지만.」

「애걸이다.」

이게 전부 하룻밤에 쏟아낸 말이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상황이었다.

바람둥이 취급에 상처받은 얼굴을 할 때는 언제고.

세상 자상한 척, 순수한 척 입에 발린 말을 잔뜩 늘어놓더니, 뭐? 성가시게 하지 말라고?

내가 다시는 혹하나 봐라.


 


‘전부 내 머릿속에서 꺼져! 다시 오면 가만 안 둘 거야!’

이를 득득 갈며 상상 속 뿅망치를 꺼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꼬꼬마 니콜라이를 때려잡았다.

팡! 팡! 열심히 내려치는데도 쉬 사라지지 않았다.

실제 니콜라이만큼 악독한 놈들이었다.


「거짓말하지 마, 엘리자벳.」

「너도 날 좋아하면서.」

「이미 내게 홀딱 반했잖아?」

「도도한 척해봤자 너도 다른 여자랑 똑같아.」

「훨씬 쉽지. 조금 잘해줬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으려고 하다니.」

나는 더 거세게 뿅망치를 휘둘러댔다.

니콜라이의 검은 머리카락 한 올, 그림자 한 조각까지 몰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하나 쉽지 않았다.

실제로 팔을 휘젓고 있는지도 몰랐다.


“엘리자벳, 뭐해? 어디 아파?”

황당함 반, 걱정 반으로 프란츠가 물었다.

그제야 팔을 내리며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날벌레가…….”

“차라리 맨손체조를 했다고 해.”

“응. 운동을 겸해서.”

“……가관이네.”

다른 선생들은 자길 한심스럽게 쳐다보는 10살짜리의 눈빛을 어떻게 견딘 걸까?

이것도 업무와 급료에 포함된 건가?

니콜라이 덕에 나는 승리를 향해 달리는 경주마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니 쉽게 흥분할 순 없었다.


“자, 그럼 진짜 일과표를 짜볼까?”

“이제 일 좀 하려고? 장하네, 엘리자벳.”

“예고했던 것처럼 검술 훈련 시간은 대폭 줄일 거야.”

“신학 수업은?”

“적당한 교재를 찾을 때까지 보류.”

“이제 좀 말이 통하네!”

“신학이 싫은 이유가 뭐야? 다른 교수들한테 물어보니까 수업 태도가 다 좋다던데.”

“싫어하는 건 신학이 아니라, 치유의 여신 모라신시아야.”

“왜?”

“자기가 구해주고 싶은 사람만 구하잖아. 신이 뭐가 그래?”

아픈 기억이 떠올랐는지 프란츠의 귀여운 얼굴에 쓰라린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모친이 병으로 죽었다고 그랬나? 워낙 똑똑한 애니까 전부 기억하겠지.’

아픈 엄마 앞에서 치유의 여신께 간절히 기도했을 프란츠가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황태자를 이용해 두 번째 신물을 찾겠다는 계획은 수정해야 했지만, 프란츠를 돕고 싶은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두툼히 쌓인 프란츠의 교육 자료를 넘겨봤다.


“제왕학, 경제학, 외국어, 악기연주 성적은 아주 훌륭하네. 비교적 나빴던 게 문학, 수학이고.”

“교수들 실력이 형편없더라고.”

“남 탓하지 마, 프란츠. 그게 제일 무식한 거야.”

“잔소리하지 마, 엘리자벳. 어린애는 원래 무식한 게 정상이야.”

어휴, 내 입만 아프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질문을 바꿨다.


“새로 온 문학 교수랑 수학 교수는 어때?”

“수학 교수는 그저 그래.”

“문학 교수는?”

“최악이야.”

프란츠가 딱 잘라 말했다.


“외모부터 마음에 안 들어. 사내라면 폐하처럼 카리스마가 있어야지. 계집애처럼 실실 웃기나 하고.”

“더글라스 님이 좀 웃는 얼굴이지. 그래도 잘생겼잖아?”

“엘리자벳 취향이 그런 비리비리한 책벌레였어? 완전 실망.”

내 진짜 취향은 늘씬하게 큰 키와 무심한 표정, 서늘한 눈매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나로 질끈 묶은 긴 생머리와 남태평양 바닷물처럼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사람.

혼자서 최정예 기사단 전체를 물리는 천재 검사 클라우디아.

평소 같았으면 최애와 단두대에서 만나야 하는 운명을 원망하고 있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클라우디아를 지우고 또다시 등장한 꼬꼬마 니콜라이들 때문이었다.


‘기승전 니콜라이네. 돌고 돌아 니콜라이. 어차피 결론은 니콜라이인가? 하아…….’

마음이 어수선했다.

프란츠가 다시 한심한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으므로 더욱.

이제는 정말 일에 집중해야 했다.


“흠흠. 예술 수업은 어떻게 진행할 거지?”

관심 없는 척 프란츠가 물었다.


“미술 교수를 초빙하려고 하는데. 학생 생각은 어때?”

“언제부터 알았어?”

“뭐를?”

“내가…… 그림…… 좋아하는 거.”

뭐 그리 대단한 비밀이라고, 프란츠가 어렵게 말을 더듬었다.


“시종 옷을 훔쳐 입은 것도 그림 그리기 위해서잖아?”

“불성실해서 그렇지 눈치는 빠른 선생이라니까.”

“칭찬 고맙습니다, 학생님.”

“그리고 또 뭘 알아냈지?”

프란츠는 은근한 기대를 담아 물었다.


“네 손의 상처도 힌트가 됐지.”

“손?”

“검술 훈련을 하면 주로 손바닥에 상처가 생겨. 그런데 너는 중지 안쪽 마디의 상처가 심했어. 엉망이 된 손으로 펜을 잡아서 생긴 상처지? 손에 안 맞는 걸 억지로 썼을 테니까.”

“맞아.”

“그림도 어두운 데서 몰래 그렸겠지. 옷소매에 튄 잉크만 봐도 알아.”

대답 대신 프란츠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엔 내가 물었다.


“뭘 숨기는 거야? 그림이 좋으면 그리면 되잖아?”

“엘리자벳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황태자가 그림 잘 그려서 제국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

“예술적 재능이 있어서 나쁠 건 뭐야?”

“나는 가뜩이나 유약하다고 손가락질당하는 황태자잖아. 방에서 그림이나 그린다고 소문이라도 나 봐. 검술 훈련을 줄이고, 미술 수업 늘리는 건 최악의 선택이라고.”

“그래도 해야 해.”

“뭐?”

“넌 아무 걱정하지 마. 당당하게 그림 그리게 해줄게. 최고의 선생 밑에서.”

나만 믿으라는 몸짓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프란츠가 박수를 쳤다.


“근거 없는 자신감만큼은 정말 배우고 싶어, 엘리자벳.”

“지금까지 실패한 적 있어? 저만 믿으세요, 황태자 전하.”

“이 기회에 위태로운 황태자를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이거 착각이야?”

“우리 프란츠, 성격은 나빠도 눈치는 빠르네?”

“엘리자벳! 또 뭘 꾸미는 거야?”

목소리를 낮춰 대답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전하, 더글라스 네틀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오늘 문학 수업 없는데?”

프란츠는 의아해했지만, 곧 알현을 허락했다.

나는 더글라스가 예정 없이 황태자궁을 찾아온 이유를 알 듯했다.


‘내가 피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거구나.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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