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폭군이 새 황비를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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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폭군이 새 황비를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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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폭군이 새 황비를 데려왔다
2022.11.29.
나는 더글라스에게 선물 받은 매운 후추를 먹지 않았다.
크리스털 병에 든 후추를 흔들어보기는 했다.
잘각잘각.
메마른 알갱이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클라우디아를 상상했다.
‘기사단장 제복이 그림 같이 잘 어울릴 거야. 허리에 찬 장검도, 바람에 흩날리는 은발도.’
클라우디아가 보고 싶다는 사실만큼은 진심이었다.
최애의 실물이 궁금했다.
미친 듯 두렵지만, 어차피 만나야 할 운명이라면 더는 피하고 싶지 않았다.
‘클라우디아가 매운 걸 좋아한다는 언급은 없었는데. 스토리가 변한 건가, 아니면 원작에 숨겨진 설정이 있는 걸까.’
엘리자벳에 빙의한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수잔은 목숨을 건졌고, 더글라스는 더 일찍 초히트 로맨스 소설을 썼다.
나는 황비가 아닌 교육담당관이 되었다.
하지만 더글라스와 나, 클라우디아의 삼각관계는 여전했다.
자신을 통해 내게 선물할 후추를 구했다는 걸 알면 클라우디아는 크게 낙담할 거였다.
그녀의 눈에 나는 더글라스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악녀에 불과했다.
이참에 당장 제국 최고의 카사노바와 팜므파탈을 처형하고 싶을지도 몰랐다.
‘사랑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여러분. 연애는 책으로만 읽읍시다! 커플지옥 솔로천국!’
황궁 앞에서 피켓시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속도 모르고 더글라스는 준비해온 책을 프란츠에게 건넸다.
“중고 서점에서 발견했습니다. 전하께서 빨리 읽고 싶으실 것 같아 결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푸른 가죽을 덧댄 책 표지엔 ‘사라진 왕자와 요술 물감’이라는 제목이 음각되어 있었다.
프란츠는 기쁜 내색을 숨기느라 연두색 눈동자를 굴리며 점잖은 체했다.
“황궁 도서관에도 없는 책인데. 수고했네, 후작.”
“사라진 왕자 시리즈는 저도 무척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저자가 소설가 겸 화가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훌륭한 삽화가이기도 하지.”
“대중적으로는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굉장한 작품을 다수 남겼지요.”
더글라스는 프란츠의 눈높이와 관심사에 맞춰 대화를 이끌었다.
프란츠는 다방면에 박식하고 보통 교수들관 달리 권위적이지 않은 더글라스에게 매료된 것 같았다.
‘외모부터 마음에 안 든다더니. 죽이 잘 맞잖아? 문학 수업은 걱정할 것 없겠어.’
문제는 프란츠가 아니라, 날 바라보는 더글라스의 뜨거운 눈빛이었다.
책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더글라스가 양해를 구했다.
“전하. 교육담당관님과 단둘이 대화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언제 웃고 떠들었냐는 듯 프란츠가 낯빛을 싹 바꿨다.
“후작은 ‘단둘이’를 참 좋아하는군.”
“전에도 부탁드린 적 있었던가요?”
“어쨌든! 할 말이 있으면 여기서 하게.”
“잠깐도 안 되겠습니까?”
“모르나 본데, 엘리자벳 선생님은 업무시간에 자리를 비우는 걸 싫어하셔. 제 말 맞죠, 선생님?”
프란츠가 애교스럽게 물었다.
니콜라이와 함께 있을 때도 존댓말을 하더니.
상황에 따라서 천연덕스럽게 말투를 바꾸는 프란츠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꾹 참고 친절히 대꾸했다.
“그럼요. 한시도 자리를 떠서는 안 되지요.”
“엘리자벳.”
“편히 말씀하세요, 더글라스 님. 무슨 말이든 전하께서 이해해주실 거예요.”
프란츠가 이해 못 할 소리는 꺼낼 생각도 말라는 뜻이었다.
「취향이 바뀌셨다는 말에 용기 내도 될까요? 엘리자벳도 알다시피 저는 어리석고 답답한 남자입니다.」
숨 막히던 정적이 다시금 내 목구멍을 막았다.
더글라스는 정말이지 좋은 남자였다.
친절하고, 따뜻하고, 솔직한 데다가 잘생겼다.
무엇보다 엘리자벳의 전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줬다.
그런 남자, 몇이나 있을까.
‘니콜라이는 자상한 척하다가 갑자기 난폭해지고, 촉촉한 듯하다가 느닷없이 새 여자를 만나러 가잖아? 솔직한 구석이라곤 없고, 도대체가 예측이 안 돼. 게다가 나에 대한 편견으로 똘똘 뭉쳐 있지!’
또다시 울분이 치밀었다.
니콜라이가 손을 쳐냈을 때의 무안함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았다.
시간이 지나 흐려지긴커녕 날마다 짙어졌다.
어떻게 하면 독버섯처럼 자라는 미움을 지워낼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긴 할까.
“엘리자벳. 어디 불편하십니까?”
내 안색을 살피던 더글라스가 물었다.
“괜찮아요.”
“쉬엄쉬엄하십시오. 몸이 상하실까 염려됩니다.”
더글라스는 어떤 상황에서든 내 편에서 생각해 주었다.
그와 어색해지기는 싫었다.
‘클라우디아의 분노를 사는 건 더 싫지. 살아남을 길은 철벽뿐이야…….’
하지만 내게 시간이 허락된다면.
호호 할머니가 되도록 이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면, 더글라스 같은 남자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도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늙어 죽게 되는 걸까.
“혹시 저 때문에 불편하십니까?”
“설마요. 더글라스 님처럼 훌륭한 문학 교수님을 모시게 되어 기쁜걸요.”
“……감사합니다.”
“수업에 필요하신 게 있으면 부담 없이 말씀해주세요.”
수업 외의 내용은 불편하다는 뜻을 담아 자르는 말이었다.
숨은 뜻을 이해한 더글라스의 얼굴에 씁쓸한 기운이 서렸다.
“책을 전해드렸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더글라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보다도 프란츠가 반겼다.
“얼른 가도록 해. 우린 아주 바쁘니까.”
버릇없는 꼬마 폭군에게 눈총을 보냈다.
“좀 더 예의를 갖춰서 인사드리는 게 어떨까요. 전하?”
“내가 뭘?”
“감사 인사도 하셔야지요. 잘. 하. 실. 수. 있. 죠?”
어금니를 깨문 채 말했다.
주먹도 슬쩍 보여줬다.
프란츠가 바로 격식을 갖췄다.
“책 고맙네, 네틀톤 후작. 다음 수업 때 보도록 하지.”
“황공합니다, 전하.”
그렇게 불편한 만남이 끝날 줄 알았다.
더글라스가 두툼한 연노랑 봉투를 내밀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게 뭔가요?”
밀랍으로 밀봉된 봉투 속에는 달그락거리는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초대장입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초대장……요?”
“읽어보고 거절하셔도 됩니다. 그러시지 않길 바랍니다만.”
더글라스가 눈매를 곱게 접으며 웃었다.
밀어내기 힘든 미소였다.
그도 그 점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이 남자도 확실히 변했어. 은근히 계획적이란 말이야.’
왜 골이 났는지는 모르지만, 더글라스가 떠난 뒤에도 프란츠는 퉁퉁 부은 얼굴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내야. 저런 사내들이 더 위험해. 내 말 듣고 있어, 엘리자벳?”
프란츠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네틀톤 가문의 인장이 찍힌 밀랍을 뜯었다.
물론 거절할 생각이었다.
‘봉투 안에 초대장이랑 작은 통이 들었네? 이게 뭘까?’
동그랗고 납작한 통을 만지작거리며 초대장을 펼쳤다.
그 안엔 차마 외면할 수 없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
더글라스가 돌아오자마자 수잔이 쪼르르 달려왔다.
“엘리자벳 언니는 만나셨어요?”
절 반겨주는 여동생이 귀엽다는 듯 더글라스가 수잔의 적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많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네 초대장은 전달했다.”
“새로 개발한 연고 표본도 넣었는데! 언니가 제 초대에 응해주실까요?”
“네 후원자 자격으로 초대했으니 와 주시지 않을까? 기다려보자.”
“그런 어중간한 태도로 언니를 되찾을 수 있겠어요? 상대는 천하의 카사노바잖아요!”
“어린 애가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저도 16살이에요. 시집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고요.”
“귀엽던 꼬마 아가씨가 언제 자라서 말대꾸까지 하는 거지?”
더글라스의 얼굴에서 옅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수잔은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여유 부리실 때가 아니에요. 엘리자벳 언니와 혼인하셔야죠!”
“내가 고집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만.”
“오라버니의 장점을 최대한 어필해야 해요. 『제국의 붉은 별』 2권이 곧 출간된다는 것도 말씀하셨겠죠?”
“하려고 했는데…….”
“그걸 잊으셨다고요? 해외 판권도 팔리고, 오페라로도 제작 중이라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있잖아요?”
멋쩍은 표정으로 더글라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엘리자벳처럼 부유한 사람에겐 대수롭지 않을 거다.”
“아이참. 돈 자랑을 하시라는 게 아니에요!”
“으응?”
“오라버니가 예전처럼 가난한 소설가 지망생이 아니란 걸 보여줘야 한다고요. 로맨스 소설을 쓰시면서 그런 것도 몰라요?”
“하하. 나도 나름 생각이 있단다, 수잔.”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리는 오라비에게 수잔이 불신의 눈빛을 보냈다.
“정말 언니를 빼앗아오실 수 있겠어요?”
“사람은 빼앗는 게 아니야. 나는 그런 마음으로 엘리자벳에게 접근하기 싫다.”
“점잖은 말씀만 하시네요. 이 시간에도 폭군은 언니를 노리고 있다고요.”
“너도 알겠지만, 엘리자벳은 쉬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미남이라면서요? 거기다 황제고. 엘리자벳 언니도 푹 빠질지도 몰라요.”
“함부로 넘겨짚는 건 실례가 된다. 삼가도록 해라.”
더글라스가 조분조분 타일렀다.
수잔이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불어넣었다.
“애가 타는 사람은 저뿐이군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네?”
“폐하와 엘리자벳은 이어질 수 없을 거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조금만 기다려. 네게도 알려줄 날이 올 테니까.”
***
며칠이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프란츠의 생활 전반을 돌보고, 물갈이된 황궁 사용인들을 점검했다.
남는 시간은 주로 황궁 도서관에서 보냈다.
정보 길드에도 돈을 펑펑 썼지만, 두 번째 신물의 정보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니콜라이는 그날 이후로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카레스조차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유혹당한 사람도 모든 진실을 털어놓지는 않는구나. 원치 않는 걸 강요할수록 반발력이 커져. 마성의 효력도 짧아지고.’
실험 결과를 연구 노트에 옮겨적었다.
틈틈이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사용해 프란츠를 살폈다.
경호 인력을 대폭 늘리고, 황태자궁으로 반입되는 모든 음식을 감시한 덕인지 또 다른 위협은 발견되지 않았다.
‘황제가 일주일이나 황궁을 비우다니……. 진짜 바쁜 일이 있었던 건가? 내가 또 괜히 오해했나 보네.’
니콜라이와 멀어진 탓일까.
활활 타오르던 적개심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슬며시 차오르는 그리움은 애써 외면하며, 그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새로 온 시종 빌이 말했다.
후궁에서 일하던 빌은 영리하고 성실한 소년이었다.
마성이 듬뿍 담긴 윙크를 받은 후에, 빌은 나의 충실한 눈과 귀가 되어주고 있었다.
“폐하께서 환궁하셨다고?”
프란츠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 얼굴도 덩달아 밝아졌다.
빌이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황비 후보를 데려오셨답니다. 후궁 하인들이 정신없이 바쁘더군요.”
묵중한 충격이 머리를 때렸다.
길 가다 낯선 사람에게 뺨을 맞아도 이토록 황당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바쁜 일이라는 게 이거였어? 꼬치구이 먹다가 새 여자를 찾으러 갔다고? 그것도 일주일 동안?!’
황당함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이 바람둥이 자식을 진짜 어떻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