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명백한 계약 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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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명백한 계약 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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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명백한 계약 위반
2022.12.02.
“너무 상심할 것 없어, 엘리자벳. 자주 있는 일이야.”
프란츠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위로인 것 같은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빌이 무덤덤하게 덧붙였다.
“출타해서 돌아오실 때마다 한두 명쯤 데려오셨죠. 엘리자벳 님이 오신 뒤엔 좀 뜸하셨지만.”
니콜라이를 이해해보려 했던 노력은 산산조각이 났다.
또다시 그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 생각하니 뒷골이 당겼다.
원래 수치스러우면 누굴 패고 싶어지는 건가?
응? 한 놈쯤 묵사발을 내고 싶은데?
“황태자로서 새로운 황비 됨됨이를 검토해야겠어!”
프란츠가 창가로 쪼르르 달려갔다.
따라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선생 체면도 있지 않은가.
“여자랑 말을 같이 타셨잖아! 폐하께서 왜 저러시지?”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프란츠가 외쳤다.
후궁을 훤히 꿰고 있는 빌에게도 낯선 광경인 모양이었다.
“특이한 일이네요. 여성분 외모도 독특하고요.”
“아아. 폐하의 안목에 실망했어.”
“취향이 바뀌신 걸까요?”
“원래 일관적인 취향은 없으셨지. 저런 여자를 내 교육담당으로 앉히신 거 보면 몰라?”
프란츠가 턱짓으로 날 가리켰다.
평소라면 눈물이 찔끔 나도록 볼을 꼬집어줬겠지만, 그럴 마음조차 일지 않았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바빴으므로.
“로즈 브렌든 황비 마마와 시몬 브렌든 경의 친척이랍니다.”
“후작가 핏줄이란 말이야?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다른 마마들은 긴장 중이시래요. 후궁의 권력이 브렌든 후작가로 쏠릴까 염려하는 거겠죠.”
“하여간 뒤에서 쓸데없는 소리만 하는 여자들이라니까. 그 여자들에게 낭비되는 국고가 아깝다!”
프란츠와 쑥덕거리던 빌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벳 님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별 관심이 없어서.”
“어쩌다 마주치실지도 모릅니다.”
“그럼 한번 봐둘까?”
번개 같은 속도로 창문에 딱 달라붙었다.
니콜라이는 잡털 한 올 섞이지 않은 새까만 준마를 타고 있었다.
얼마나 손질이 잘된 말인지 머리부터 꼬리까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그 뒤로 황실 근위대가 2열 종대로 따르고 있었다.
휘날리는 휘장 아래로 행진하는 니콜라이는 감탄을 자아낼 만큼 위풍당당했다.
낯선 여자와 함께 있지만 않다면 나도 넋을 잃고 감상했을지도 모른다.
‘말 한 마리에 두 명이 탈 수 있어? 교통법 위반 아니야? 최소 동물 학대 같은데?’
까드득, 엄지손톱을 물어뜯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니콜라이가 뭘 하든 나랑 무슨 상관인가?
신경 써 봤자 나만 손해지!
다시 책상에 앉아 정보 길드에서 받아온 서류를 넘겼다.
“프란츠. 내가 미술 교수를 찾아봤어. 네 마음에도 쏙 들 거야.”
“저 여자는 귀족 영애가 아니라, 빼빼 마른 남자애 같아. 농부처럼 낡아빠진 바지를 입고 있잖아? 짧은 머리카락도 금발이라기보단 지푸라기 색이야.”
“외모 평가는 하는 거 아니야.”
“정말 새로운 황비한테 관심 없어, 엘리자벳?”
“제 관심은 오직 황태자 전하뿐이라고요.”
“그치만 엘리자벳은 폐하랑 아주 아주 아주 친하잖아.”
날 바라보는 프란츠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이 꼬마가 카나리아 방에서 뭘 어디까지 본 걸까?
찔리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시치미를 잡아뗐다.
“설마. 폐하와 나는 학부모와 교육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상처받은 것 같은데?”
“프란츠. 수학 과제는 다했니?”
“지금 수학이 대수야? 엘리자벳이 실연당할지도 모르는데.”
프란츠가 퍽 진지하게 말했다.
쓸데없이 촉이 좋은 꼬마의 볼을 쭈욱 잡아 늘였다.
“아, 아파!”
“과제나 하시지?”
“느낌이 안 좋아. 저 여자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것 같다고!”
“그 불미스러운 일, 당장 만들어줘?”
“아앙, 아프다니까!”
프란츠의 외침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이미 ‘실연’이란 단어에 점령당했다.
‘실연은 무슨. 키스 한 번 했을 뿐이잖아? 밥 두 번 먹고.’
사실 믿고 싶었다.
원작 폭군보다는 좋은 남자일 거라고.
남들이 뭐라 떠들건 내 눈앞에 있는 그가 진짜일 거라고.
가끔 흔들리고, 문득 설렜다.
심지어 비밀을 털어놓으려고도 했다.
그라면 날 믿어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니콜라이는 그냥 니콜라이일 뿐이었다.
원작은 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엘리자벳의 삶 또한 채 반년도 안 남았다는 뜻이었다.
-다른 이성과의 교제를 불허한다. 마음을 빼앗기는 것 또한 교제로 간주한다.
계약서에 그런 조항을 추가한 건 니콜라이 본인이었다.
달군 쇳덩이를 삼킨 듯 뱃속이 펄펄 끓었다.
‘사귀는 건 안 되지만, 혼인은 된다는 거야? 난 더글라스랑 마주치는 것도 피했는데. 이건 명백한 계약 위반이야. 내가 열 받는 건 그 때문이라고!’
훼손된 계약 때문이라면 내 분노는 정당했다.
분노를 꾹꾹 참을 이유도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깜짝 놀란 프란츠가 날 올려다봤다.
“엘리자벳. 어디 가려고?”
“공식적으로 항의할 게 생겼어.”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야? 약속을 개뼈다귀 취급하는 악당 중의 악당이지.”
***
“폐하께서는 여독을 풀고 계십니다.”
카레스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굳게 닫힌 집무실 문 앞에서 코웃음 쳤다.
“특이한 방식으로 여독을 푸시네요. 각계 신료들이 왔다 갔다 하던데.”
“오늘은 돌아가시지요, 엘리자벳 님.”
“안에 계시는 거 아니까 문 열어요.”
“불가합니다.”
“잠깐이면 돼요.”
“단 1초도 안 됩니다.”
카레스가 딱딱하게 굴었다.
마성이 풀린 건가 싶어서 윙크 + 손키스 곱빼기를 날렸다.
소용없었다.
“폐하께서 엘리자벳 님의 접근을 금지하셨습니다.”
“!”
“몇 번이나 설득해봤지만, 폐하께서 완고하십니다.”
“이유는요?”
“모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새로 온 황비 때문이로군요.”
최대한 평범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카레스는 입을 다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만날 가치도 없다는 건가. 특별대우는 그만하겠단 뜻이야?’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어떻게 모르겠는가, 내가 온갖 특혜를 받는다는 사실을.
황제는 제국의 주인이자, 법 위에 군림하는 절대자였다.
대귀족도 황제와의 독대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나처럼 함부로 굴었다간 혀나 목 중 하나는 반드시 잘렸을 터였다.
‘날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아. 심지어 난 귀족도 아니잖아?’
발밑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던 건 처음뿐이었다.
나는 그를 황제가 아닌 한 명의 남자로 취급했다.
그도 날 여자로 대우했다.
계약서에 손도장을 찍음으로써 우리는 더욱 나란해졌다.
언제든지 날 취할 수 있음에도 그는 까마득한 권위를 내려놓았다.
덕분에 나는 마음껏 비꼬고, 놀리고, 유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니콜라이의 변덕이었다.
굳건한 줄 알았던 마음을 뒤흔든 남자가 이 안에 있고, 문밖을 서성이다 돌아가야 하는 내 현실이 무참했다.
그것이 새 여자 때문이라는 게 날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좋아요. 방해꾼은 물러가죠.”
“송구합니다.”
“카레스. 번거롭겠지만 전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뭐든 말씀하십시오.”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거나 조항을 어기면 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네?”
“그렇게만 전해주세요. 무슨 뜻인지 아실 거예요. 모르시면 하는 수 없고요.”
***
다음 날 휴가를 냈다.
프란츠의 심통도 마차에 오르는 날 막을 수 없었다.
황태자 교육담당관에겐 여러 편의가 제공되었다.
자유로운 황궁 출입과 휴가도 그중 하나였다.
카레스가 뒤를 봐준 덕도 컸다.
“네틀톤 후작저로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네틀톤 후작저는 먼젓번 방문했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창마다 값비싼 투명 유리로 갈아 끼웠고, 정원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부서진 데도, 칠이 벗겨진 곳도 없었다.
나는 깔끔한 제복을 입은 하인들의 환대를 받으며 수잔과 재회했다.
“엘리자벳 언니!”
수잔이 와락 품에 안겼다.
“이렇게 빨리 와 주실 줄 몰랐어요. 정말 기뻐요.”
“연구 결과를 보여준다는데 당장이라도 뛰어와야죠.”
“언니가 너무 그리워서 핑계를 댄 거예요. 그래야 와 주실 것 같았거든요.”
수잔이 혀를 살짝 내밀었다.
시치미를 뗄 수도 있을 텐데 참 솔직한 아가씨였다.
“편지 못 써서 미안해요. 진통제니, 연고니 계속 받기하고.”
“그런 말씀 마세요! 언니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만으로 행복한걸요?”
“고마워요. 수잔이 새로 보내준 찰과상 연고 시제품은 효과가 정말 뛰어나요.”
“진짜요?”
“황궁 치료사들도 깜짝 놀랐어요. 16살 소녀가 독학으로 만들었다니까 믿지 못하더군요. 네틀톤 영애라고 하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더라고요.”
“황실 전속 약제사셨던 할아버지 덕택이에요.”
“수잔의 노력과 재능 덕이죠. 네틀톤 가문은 대대로 약학 천재들이 많았잖아요?”
“언니가 없었으면 공부도 중단했겠죠. 이 은혜는 꼭 갚을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수잔이 두 주먹을 쥐고 열의를 보였다.
황궁 치료사들도 인정하는 천재 소녀가 어떤 결과를 보여줄지 기대됐다.
수잔의 본심은 날 더글라스와 결혼시키는 것이겠지만.
‘원작 수잔은 이달 말 스스로 생을 저버리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내가 끼어든 결과 수잔은 니콜라이와 만나지 못했다.
짝사랑은 시작도 못 했고 덕분에 최악의 선택도 피하게 됐다.
다른 건 몰라도 수잔을 구했다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이제야 의로운 사망자의 이름값을 한 것 같았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요, 수잔.”
“고백 같아서 두근거려요!”
“앞으로도 수잔을 계속 보고 싶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요.”
“?”
“약속해줄 수 있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의아해하던 수잔이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그럼요! 저는 너무너무 행복해요. 생일이나 축제보다 더요!”
‘정말 귀엽고 영리한 아가씨라니까. 초대장도 수잔 아이디어였을 거야. 좀 더 건강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오늘 네틀톤 저택에 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수잔이 바란 대로 연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둘째.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로 수잔의 건강을 점검하기 위해서.
세 번째 이유도 있지만…… 성과를 장담하긴 어려웠다.
“제 연구실을 보여드릴게요. 조금 어지러워요.”
수잔의 연구실엔 각종 약병과 플라스크, 시험관으로 가득했다.
책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 광물이 차곡차곡 병에 담겨 있었다.
복잡한 수식이 적힌 종이와 몇백 년은 묵은 듯한 책도 보였다.
수잔의 성격을 보여주듯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 책은 무슨 내용인가요? 저는 해석도 못 할 것 같아요.”
손때묻은 책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걸었다.
물론 책에는 별 관심 없었다.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를 꺼낼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
“궁금하시면 읽어 드릴까요?”
수잔이 날 위해 책장을 넘겼다.
때를 놓치지 않고 구리 모노클을 오른쪽 귀에 걸었다.
신비로운 하얀빛이 천천히 수잔의 가녀린 몸을 훑어내렸다.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아니, 저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