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 폭군이 그녀를 피한 이유 (28/97)


#28. 폭군이 그녀를 피한 이유
2022.12.06.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에 호흡을 멈췄다.

초록색 연기가 수잔의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붉은 얼룩이었는데. 왜 수잔만 초록색이지? 한 부분에 고여 있지 않고 움직이는 경우도 처음 봐.’

치유 여신의 신물답게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는 핏줄, 장기, 뼈, 근육 등 내가 보고자 하는 모든 걸 빠짐없이 비춰줬다.

어디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알려주곤 했다.

그게 아니라면 의사도 아닌 내가 뭘 알겠는가?

이번엔 모든 것이 달랐다.

여신의 눈동자는 침묵했고, 나는 짧은 경험을 토대로 유추할 뿐이었다.


‘붉은 얼룩에서 느껴지던 불길함은 전혀 없어. 수잔에게 병이 없다는 소리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 순간에도 초록 연기는 느긋한 물고기처럼 유영하고 있었다.

그것만 빼면 신체 모든 부분이 완벽하게 정상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수잔. 어릴 때부터 병약했다고 했죠?”

“할아버지께서 온갖 방법 다 쓰셨다는데 병명조차 몰라요.”

“약학에 관심을 가질 만하네요.”

“스스로 치료하고 싶었어요. 아직까진 성과가 없지만요.”

“예전보다는 건강해진 것 아닌가요?”

“그러면 좋겠지만…… 평소엔 아무렇지 않다가 갑자기 픽 쓰러지는 건 그대로예요.”

“어떤 느낌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수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몸 안에 바람이 부는 것 같아요. 서서히 불어올 때도 있고 폭풍처럼 밀어닥칠 때도 있어요. 바람이 시작되면 고열에 시달리다가 의식이 뚝 끊어져요.”

“평소에 그런 조짐이 느껴지나요?”

“전혀요. 그래서 더 무섭죠.”

“정말 무섭네요. 병명조차 모른다니 기이하고요.”

“그건 왜 물으세요?”

“더글라스 님이 수잔에게 항상 책을 읽어줬다고 들었어요.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수잔 때문이라면서요?”

모노클을 벗으며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수잔은 즐거운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기쁜 기색이었다.


“맞아요! 오라버니 이야기를 듣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었어요.”

“더글라스 님은 약학에 관심 없으셨나 봐요?”

“오라버니는 신학 쪽에 더 관심이 많았거든요.”

“네틀톤 후작가는 독실한 모라신시아 신자가 많았다죠?”

“그래서 초대 황제께서 모라신시아의 은혜가 담겼다는 신물을 하사하신 거래요. 제가 보기엔 고물 안경일 뿐이지만요.”

역시 네틀톤 가문은 모라신시아와 관련이 깊었다.

오늘 수잔을 찾아온 세 번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약학 연구자들이 치유의 여신을 신봉하는 건 얼핏 자연스러워 보였다.

한편으론 이과생들이 종교에 심취한다는 게 좀 이상했다.

수잔만 봐도 신앙에는 도통 관심이 없지 않은가.


‘첫 번째 신물은 후작저 예배당에 있었어. 두 번째 신물의 힌트도 여기 있을지 몰라. 더글라스가 뭔가 알지도 모르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원작을 되새겼다.

「수잔의 시신을 끌어안은 클라우디아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더글라스는 예배당에서 밤낮으로 기도를 올렸다. 여신이 강림한다 해도 수잔을 되살릴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겠노라는 듯.

더글라스의 기도가 멈췄을 때, 예배당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후작저에 잠들어 있던 고귀한 성서와 신물들이 한 줌 잿더미가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자세한 문장은 다르겠지만, 분명 그런 내용이었다.

이 저택엔 첫 번째 신물 말고도 모라신시아의 비밀이 잠들어 있을 게 분명했다.


‘더글라스에게 물어봐야 하나? 최대한 멀리해야 하는데…… 빌미를 줄 수도 없고.’

그때 수잔이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이 책에서 언니가 찾던 내용을 발견했어요.”

“아. 황태자 전하를 위한 보양제 말인가요?”

나는 수잔에게 아동용 영양제를 주문했다.

또래보다 작은 프란츠에게 도움이 될까 싶었다.

초대장에 수잔이 내 바람에 꼭 맞는 레시피를 개발했다고 썼다.


“체력보강과 성장 발달엔 약초보다 허브가 나을 수 있대요.”

“허브요?”

“할아버지의 기록을 뒤져서 희귀 허브 상점도 알아냈어요. 확인해보니 지금도 영업 중이더라고요.”

“정말 고마워요! 역시 수잔, 최고예요!”

수잔의 목을 끌어안았다.

뜨거운 반응에 수잔은 기쁘면서도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그 남자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클라우디아의 동료인 농부 보리츠! 어떻게 찾나 막막했는데 빛이 보여. 원작에는 정확한 지명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나는 원작 클라우디아의 동료들을 하나씩 내 편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내가 가진 능력만으론 부족했다.

애독자로서의 기억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

게다가 보리츠는 앞으로 큰일을 해내는 인물이었다.

무조건 손에 넣어야 할 1순위 인재를 프란츠와 수잔 덕에 찾게 될지도 몰랐다.

운명이 내게 약간의 자비를 베푸는 모양이었다.


“그 허브 상점이 어디죠? 혹시 지방인가요?”

“수도에 있긴 한데…….”

“당장 가봐야겠네요. 전하를 위한 일이니 지체할 수 없어요!”

프란츠와 교육담당이란 자리는 언제나 그럴싸한 구실이 되어줬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었다.

보리츠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클라우디아의 힘을 빼앗고, 내 세력을 키운다면 니콜라이 없이도 나는 생존할 수 있었다.

잘 가라, 망할 카사노바 놈!


“빈민가 주변이라서, 혼자선 위험하실지도 몰라요.”

수잔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 붙여주신 호위 기사가 있어요.”

떼어놓고 갈 거지만.

수잔이 그제야 본심을 드러냈다.


“그러지 말고 오라버니와 함께 가시는 건 어때요?”

“더글라스 님은 전하와 황궁에 계실 텐데요?”

“곧 돌아오실 거예요. 길눈도 아주 밝으세요.”

“하지만…….”

“엘리자벳 언니. 오라버니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문학 수업 있는 날에 찾아오신 거죠?”

“역시 수잔은 속일 수가 없네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날 좋아하는 수잔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수잔. 마음은 고맙지만, 더글라스 님과 다시 잘해볼 생각은 없어요.”

“오라버니는 바뀌셨어요.”

“저도 알아요.”

“운동도 꾸준히 하시고, 이제 돈도 많이 버세요. 언니에겐 우스워 보이겠지만요.”

“전혀 우습지 않아요. 저도 더글라스 님께서 발전하시는 것 같아서 기뻐요.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고요.”

“그래도 안 된다는 건가요?”

“미안해요, 수잔.”

“오라버니가 좋은 남자란 건 언니도 아시잖아요? 언니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도요.”

“저에겐 정말 과분한 분이지요.”

그래도 안 돼요.

뒷말을 끝까지 할 필요 없었다.

수잔의 사슴처럼 큰 눈망울에 눈물이 차올랐다.

고집스러우나 순수한 마음에 응답해줄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혁명 전까지 더글라스는 엘리자벳을 포기하지 않았지. 그녀의 악행도 믿지 않았고. 이번에도…… 더글라스가 원작처럼 날 증오하게 될까? 날 사랑했던 자신을 원망하면서?’

꿈속 단두대 아래에서 더글라스와 수잔을 본 것도 같았다.

누구보다 날 좋아해 주는 사슴 남매에게 경멸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내게 호의나 연심은 배부른 소리에 불과했다.

지금은 볕들 구멍을 파는 게 급선무였다.

***

니콜라이는 정원을 산책 중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산책하는 척 황태자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연을 가장해 프란츠를 만날 계획이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프란츠에게 엘리자벳의 향이 묻어 있을 테니까.


‘진정한 쓰레기로군. 하나뿐인 혈육을 고작 이런 용도로 이용하다니.’

치욕감과 자괴감으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나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엘리자벳을 못 본 지 벌써 8일하고도 반나절이 더 지났다.

집무실로 찾아온 엘리자벳을 쫓아내기까지 했다.

그녀는 결코 모를 것이다.

카레스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자신은 문에 기대어 있다는 걸.

문틈으로 스며드는 쓰라리도록 달콤한 향에 옴짝달싹하지 못했다는 걸.

그녀의 입술을 더듬던 감촉을 되새기며 몇 번이나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는 걸.

거추장스러운 문을 왈칵 열고 싶었다.

엘리자벳의 탐스러운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싶었다.

그보다 더 찐득하고 농밀한 짓을 저지르고 싶었다.

포악한 욕망을 짓누르느라 입술에 피가 배어 나왔다.

그 순간에도 발휘되는 인내심이 원망스러웠다.


‘아직 엘리자벳을 만날 수 없다. 내게 묻은 저승꽃 씨앗이 그녀에게 옮겨갈 수도 있어.’

니콜라이의 속마음을 읽은 늑대가 소리 낮춰 웃었다.


「가엾은 니키. 또 자신을 속이느라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구나.」

니콜라이는 평정을 가장했다.

하지만 충격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본래 늑대는 저승꽃 냄새를 맡기 전까지는 니콜리아의 무의식 아래에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이렇게 자주 튀어나오다니. 늑대가 내 통제 범위를 벗어난 것인가?’

짐작 가는 바가 없지 않았다.

늑대는 니콜라이의 욕망과 감각에 기생하는 존재였다.

니콜라이가 정신력으로 가까스로 제어하고 있지만, 조금만 방심해도 불쑥 고개 들어 육신을 가로채려 들었다.

되살아난 감각이 예민해질수록 늑대는 더 자유로워졌다.

니콜라이의 인생에 멋대로 끼어드는 일도 많아졌다.

니콜라이가 욕망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을수록 늑대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자초한 일이기에 더 착잡하고 두려웠다.


「저승꽃 씨앗을 가진 여자를 격리했을 뿐이잖아? 엘리자벳을 멀리하는 이유가 뭐야?」

“오직 젊은 여자만 저승꽃 씨앗에 오염되고 있어. 그 이유도 밝혀내지 못했고.”

「우리가 함께하는 곳에선 씨앗은 발아하지 못한다. 여자들을 황궁에 두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 악취가 옅어지는 격리 9일 차까지 방심하면 안 된다.”

「엘리자벳은 특별해. 악취마저 물리치는 여자를 왜 걱정하는 거야?」

“엘리자벳은 유일한 희망이니까.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

「그녀를 디퓨저로 쓰겠다며? 쥐새끼들을 들쑤실 불쏘시개로 이용한다던가?」

“계획에는 변함없다.”

「엘리자벳이 귀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은데?」

“…….”

「이봐, 니키. 그런 식으로는 엘리자벳의 마음을 얻지 못해.」

“뭘 하든 참견하지 마라, 건방진 늑대.”

「후회하지 않겠어? 한 수 가르쳐준다는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군.”

「내가 진짜 카사노바지. 너 같은 풋내기에 비하면. 하하.」

후궁의 여인들이 모두 니콜라이의 외모와 권력에 넘어왔던 것은 아니었다.

연인이나 남편이 있는 이도 있었다.

엘리자벳처럼 황비가 되기를 거부한 여인도 있었다.

그때마다 늑대가 나서야 했다.

늑대가 자기만의 매력을 발휘한 뒤에야 여인들은 황궁으로 따라나섰다.

니콜라이는 그 과정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동침하지는 않았지만, 늑대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마음에 없는 여인들과 어울린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수치스러웠다.


「시키는 대로 해. 엘리자벳을 갖게 해줄게.」

“너 때문에 엘리자벳이 겁에 질렸던 것 잊었나?”

「앙큼하게 먼저 만졌잖아. 너라도 돌아버렸을걸?」

“꺼져라, 교활한 늑대놈!”

「나도 너도, 엘리자벳과 가까이 있고 싶잖아. 우리가 이렇게 통한 건 처음 아니야?」

“…….”

「부스러기 주워 먹을 생각 말고 내게 맡겨. 반드시 성공할 테니까.」

주먹을 움켜쥔 니콜라이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불거졌다.

충동이 자존심을 내리찍었다.

욕망이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못 이기는 척 늑대를 받아들인다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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