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 인정할 수밖에 (29/97)


#29. 인정할 수밖에
2022.12.09.



“폐하세요?”

우거진 관목 아래에서 프란츠가 주섬주섬 일어났다.


‘벌써 황태자궁 후원에 도착했구나…….’

늑대의 발칙한 목소리에 홀려 어디만큼 왔는지조차 몰랐다.

쓴웃음을 삼키며 어린 이복동생에게 물었다.


“잘 있었느냐?”

“그럼요! 혹시 절 만나러 오셨어요?”

프란츠의 얼굴에 해사한 기쁨이 번졌다.

프란츠가 손에 들고 있던 나무 막대기를 멀리 던졌다.

어린 애 같은 모습을 들키기 싫은 모양이었다.


‘널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엘리자벳의 흔적을 찾으러 왔다.’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프란츠의 몸엔 희미한 체리블로섬 향기가 스며 있었다.

온 감각을 곤두세워야 찾을 수 있는 희미한 흔적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엘리자벳의 체취를 맡지 못한 니콜라이에겐 한 줄기 빛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치도록 황홀하군.’

민망함을 넘어선 당혹감이 밀어닥쳤다.

악취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향기를 향한 집착만 강해졌다.

모두 엘리자벳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아니, 스스로 자제심을 완전히 잃은 까닭이었다.


“아……. 엘리자벳 선생님을 만나러 오신 거군요.”

프란츠가 멋쩍게 머리칼을 긁적였다.


‘엘리자벳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휴가 갔다는 보고를 받았으니까. 나는 늑대 말처럼 그녀가 흘린 부스러기를 주우러 온 거지. 염치를 모르는 굶주린 개처럼.’

눈치 빠른 프란츠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불쑥 이렇게 물을 줄은 몰랐다.


“폐하, 엘리자벳 선생님을 좋아하시나요?”

눈앞이 캄캄하고 아득했다.

영혼 한가운데를 말굽에 짓밟힌 것 같았다.

늑대에게 몇 번이나 지적당했지만, 프란츠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욕망이라면 수긍할 수 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매료당했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겠다. 엘리자벳을 갖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게 뭔데?’

뒤엉킨 실 뭉텅이가 머릿속을 꽉 메웠다.

심장은 고장 난 마차 바퀴처럼 덜컹거렸고, 귀 뒤쪽이 괜스레 붉어졌다.

좋아하는 것과 취하고 싶은 마음은 분명 다를 것이었다.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했다.

니콜라이는 제 감정에 무지했다.

멋대로 점령당한 떨림과 충동에도 쉽사리 이름 붙일 수 없었다.

차라리 소유욕이나, 독점욕이라면 지금처럼 괴롭지 않으리라.


‘특별 취급을 하는 이유가 뭐냐는 물음인가? 아니면 보고 싶냐는 뜻인가. 호감을 느꼈냐는 뜻인가. 정말 그런 거라면 나는 엘리자벳을…… 이미 좋아한다.’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어지러워서 주저앉고 싶었다.

프란츠 앞이 아니었다면 털썩, 무릎 꿇었을지도 모른다.

남들에겐 우스운 질문일지라도 니콜라이에겐 심각했다.

여자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누구도 좋아해선 안 된다고 믿어왔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욕정에 흔들려선 안 된다. 사사로운 행복을 좇아서도 안 된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너는 한 사람이 아니라, 만백성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것이 황제의 사명이다.」

부황은 역사가들의 칭송보다 더 훌륭한 군주였다.

그러나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다른 아버지들이 어떻게 어린 아들을 훈육하는지 몰랐다.

알았다면 적어도 행복해선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못 박히도록 하진 않겠지.

하지만 그런 아버지를 존경했다.

죽음의 돌림병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

평생 백성을 위해 살았던 성군.

니콜라이도 그 같은 황제가 되고 싶었다.

치욕스런 손가락질을 감수하면서도 아버지의 가르침과 유언을 따랐다.

그런데 엘리자벳이 나타났다.

운명의 장난이었다.


‘엘리자벳 때문에 여러 번 관례와 법도를 어겼다. 당치 않은 고위직을 내렸고, 항명에도 벌하지 않았다. 모욕에 가까운 언사도 참았다. 여인에 홀린 폭군과 다를 바가 뭐지?’

그뿐인가.

엘리자벳 주위를 빙빙 맴도는 더글라스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그녀에 대해 함부로 말하거나, 제대로 존중하지 않는 자는 모조리 베고 싶었다.

엘리자벳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그녀의 과거까지 이해하고자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모습조차 귀엽기만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어. 나는 엘리자벳을 좋아한다…….’

니콜라이의 고개가 맥없이 꺾였다.

지하에서 부황의 통곡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죄책감에 빠진 니콜라이에게 프란츠가 말했다.


“저도 엘리자벳 선생님이 싫지 않아요. 뭐, 그렇게 좋은 건 아니지만…… 나쁘진 않아요.”

“이유는 무엇이냐?”

“저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지도 않고, 아이들 좋아하는 척 호들갑 떨지도 않잖아요. 제가 황태자란 것도 잊은 것 같아요.”

“내가 황제란 것도 자꾸 잊더구나.”

“좀 특이한 분이죠?”

“심각하지.”

프란츠에게 속마음을 들킨 충격 때문일까.

평생의 소임을 저버리고 있다는 허탈함 때문일까.

니콜라이는 쓸데없는 말까지 떠들고 있었다.


“엘리자벳 선생님도 폐하를 좋아하나요?”

“신경 쓰지 말아라.”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네틀톤 후작과 엘리자벳 선생님의 만남도 막은 것처럼요!”

“지난번 부탁은 내가 경솔했다. 잊어라.”

“편지를 전할 수도 있고, 자리를 마련해드릴 수 있어요, 단둘이. 또…….”

“괜찮다 하지 않느냐?”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프란츠가 바짝 얼어붙었다.


“저를 믿으신다고 했잖아요?”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믿을 사람은 저뿐이라고 하셨잖아요. 혹시 빈말이셨나요?”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할까?

프란츠를 관찰하는 것?

프란츠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엘리자벳의 조언이 떠올랐지만, 니콜라이의 입술은 하나로 눌어붙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린 이복동생의 걱정을 샀다는 게 부끄러웠다.

프란츠는 침묵을 완강한 거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끼어드는 게 아니라, 폐하를 도와드리고 싶었을 뿐이에요.”

꾸벅 사과한 후 프란츠가 뒤돌아 달려갔다.

멀어지는 아이를 잡지 못했다.

니콜라이는 자신이 황제의 책무에만 익숙할 뿐, 기초적인 관계도 맺을 줄 모르는 서툰 인간임을 새삼 깨달았다.


‘내겐 누군가를 좋아할 자격이 없다. 그럴 재주도 없고. 지금처럼 고독 속에서 살아야 해. 늑대와 함께.’

걸음을 돌리려는데, 흙바닥에 그려진 그림을 발견했다.

휘적휘적 그린 그림임에도 시선을 빼앗길 만큼 솜씨가 좋았다.

문득 프란츠가 집어던지던 나무 막대기가 떠올랐다.

막대기 끄트머리엔 젖은 흙이 묻어 있었다.


‘핀치가 이걸 그렸다고?’

다시 한번 흙바닥 그림을 살폈다.

다정한 남녀와 그 사이의 작은 남자아이.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화목한 가족 그림이었다.


 

****

나는 허브 상점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수잔이 걱정하는 이유가 있었네. 이 세계에 와서 이런 광경은 처음 봐.’

무너지기 직전의 널빤지 집과 쓰레기더미 옆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하수가 짐승의 배설물과 뒤엉켜 썩은 내를 풍겼다.

구걸하는 아이들. 술에 취해 널브러진 남자들.

찌든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여자들.

빈민가의 전형적인 얼굴이었다.


‘뭘 놀라는 거야? 어릴 땐 이런 곳만 전전하며 살았잖아?’

벌써 갑부와 귀족들의 호화로운 삶에 익숙해졌다.

보통 귀족들은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황제와 툭탁거리고, 황태자를 동네 꼬마 취급했다.

악몽에 시달리며 끔찍한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빈민가는 무질서하고, 불결했으며, 두려움과 좌절이 만연했다.

잠시 잊고 있던 가난은 단두대보다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위협적이었다.


“어이, 빨간 머리! 어디서 이런 예쁜 아가씨가 나타났지?”

휘파람 소리와 함께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골목에서 몇몇 사내들이 날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비싼 데서 일해? 끝내주게 예쁜데?”

“이리 와봐. 오빠들이 귀여워해 줄 테니까!”

무시했지만 소용없었다.

껄렁거리는 사내들이 내 뒤를 졸졸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이, 예쁜이. 도도한 척 그만 하지?”

“이 시간에 여기 왔으면 너도 마음이 있는 거잖아?”

여자 혼자 빈민가를 얼쩡거리는 게 위험하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

게다가 나는 심하게 예뻤다.

거적때기를 걸쳐도 갓 피어난 장미처럼 화사한 붉은 머리칼과 쭉쭉 뻗은 늘씬한 팔다리를 숨길 수 없었다.

덜떨어진 놈들이 침을 줄줄 흘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보리츠는 낮엔 움직이지 않는 캐릭터야. 클리우디아와 마주치는 것도 해 질 무렵이었어.’

보리츠를 찾을 때까지 약간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똥파리까지 참아줄 마음은 없지만.


“이 머리카락 좀 봐. 가발 가게에서 돈푼깨나 쳐 주겠는데?”

똥파리 중 하나가 내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애벌레 천 마리가 맨 살갗을 기어가는 듯 역겨웠다.


“어디라고 손을 대는 것이냐!”

손버릇 나쁜 똥파리를 싸늘한 눈으로 노려봤다.

뭐가 재미있는지 똥파리들이 킬킬거렸다.


“얘가, 오냐오냐해주니까 기어오르네?”

“건방진 계집들은 콧대를 눌러줘야지!”

진부한 놈들 같으니.


‘더러운 말만 가르쳐주는 학원이 있나? 손잡고 가서 배워오는 거야? 단체 할인받아서?’

내가 클라우디아 같은 여기사라면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을 것이다.

바지에 오줌을 지리도록 매운맛을 보여줬겠지.

안타깝게도 내가 가진 건 돈과 마성뿐이었다.

급하다고 아무나 유혹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급한 상황도 아니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 살아서 돌아가고 싶으면.”

“이 빨간 계집이 뭐라 지껄이는 거야?”

“귓구멍에 말뚝 박았어? 당. 장. 꺼. 지. 라. 고.”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똥파리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더러운 침을 튀겼다.


“이 계집애가 주둥이 함부로 놀리네?”

“너 같은 애들이 여기서 까불다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여느 로맨스 소설이었다면 우연히 지나가던 미남이 구해줬겠지.

무표정한 얼굴로 사내들을 무찌른 후 내게 한마디 하겠지.


‘여자 혼자 다니다니, 죽고 싶어 환장이라도 한 건가?’

하지만 이 세계는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드보일드 생존 어드벤처였다.

살아날 구멍은 스스로 파야 한다는 뜻이었다.

따닥, 손가락을 튕겼다.

신호에 맞춰 무장한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거금을 주고 고용한 사설 경호원이었다.

비싼 만큼 은폐와 잠복 실력이 출중했다.


“이, 이놈들은 뭐야?”

“제기랄! 일행이 있었어?!”

일이 잘못됐다는 걸 눈치챈 똥파리들이 시궁창에 빠진 쥐새끼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온갖 센 척 다할 때는 언제고.


“좋은 말할 때 꺼질 걸 그랬지?”

“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똥파리들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개운하기는커녕 입맛이 썼다.

역시 돈이 좋았다.

내게 경호원을 고용할 재력이 없었다면 지금 겁에 질려 애원하는 건 나였을 거였다.

경호 대장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어떻게 할까요?”

“패세요. 살려만 주고.”

“어려운 일이군요.”

“쉽게 하셔도 돼요. 살아봤자 남한테 피해나 주겠지만.”

“최대한 살려는 놓겠습니다.”

도살장에서나 들릴 법한 비명이 빈민가 하늘을 수놓았다.

돈 쓴 보람을 좀 느껴보려는데, 골목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일어났다.

그 그림자는 정확히 날 향해 비척비척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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