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엘리자벳은 오늘도 똑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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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엘리자벳은 오늘도 똑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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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엘리자벳은 오늘도 똑똑하다
2022.12.13.
영락없이 귀신인 줄 알았다.
세상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경호원들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웬 놈이냐?”
“저, 저는 나쁜 놈이 아니, 아닙니다.”
검은 그림자가 더듬더듬 말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천에 뚫린 두 개의 구멍으로 겁에 질린 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저 깡패들이…… 제 아이들을 빼앗아갔어요.”
축 늘어진 천 자락에서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튀어나왔다.
그는 똥파리 중 한 명이 허리춤에 찬 불룩한 주머니를 가리켰다.
기이한 차림새, 소심한 목소리,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독특한 성격.
내가 찾던 농부 보리츠였다.
‘보리츠를 이렇게 빨리 발견하게 되다니!’
보리츠는 검은 망토와 후드로 외모를 숨기는 캐릭터였다.
지독한 부끄럼과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경호원을 제지하고 검은 천을 뒤집어쓴 의문의 남자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어떤 아이들을 빼앗겼죠?”
“희귀하고, 값비싼 아이들이에요. 제가 데려가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가죽 주머니 속엔 이름 모를 식물 뿌리와 푸성귀가 들어있었다.
그가 식물을 얼싸안고 기뻐했다.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내 새끼들!”
“당신 이름이 보리츠인가요?”
“절 아세요?”
“뛰어난 농부라고 전해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도와주신 것도요.”
“그 아이들은 파시는 건가요?”
“농부도 돈이 필요하니까요. 이 근처에 거래하는 상점이 있어요.”
“허브 상점이 왜 이렇게 위험한 동네에 있나요?”
“은밀한 상품도 취급하거든요. 독버섯, 살무사, 흡혈박쥐 같은 거. 무슨 뜻인지 알죠?”
오호라.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내 눈치를 보던 보리츠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야 허브값을 제일 잘 쳐줘서 가는 것뿐이지만요.”
“그 아이들 제가 사도 될까요?”
“아가씨가요?”
“상점에서 매입하는 가격의 10배를 드리죠.”
“네엣?”
구멍 속 회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내 마음이 바뀔까 두려운지, 그가 식물 주머니를 떠넘겼다.
“많이 예뻐해 주세요, 손님!”
묵직한 금화를 건넸다.
내게는 푼돈이었지만, 토지를 살 수 있을 만한 거금이었다.
“이 돈이면 뭐든 살 수 있어! 외상값도 갚고!”
금화에 입 맞추며 기뻐하는 보리츠.
아니, 보리츠인 척하는 사기꾼의 멱살을 확 낚아챘다.
“이봐. 진짜 보리츠는 어디 있어?”
“무슨 말씀이시죠? 제가 보리츠…….”
무표정한 얼굴로 경호원에게 손짓했다.
건달 몇 손봐주는 것으로 아쉬웠던지 경호원들이 반색했다.
그들의 목과 어깨, 손가락 관절에서 우두둑우두둑 심상치 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도 이 꼴이 돼 볼래?”
똥물에 처박힌 똥파리의 등을 사뿐히 지르밟았다.
가짜 보리츠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사실대로 말할게요! 제발 때리지 마세요!”
***
가짜 보리츠의 등장은 엄청난 호재였다.
진짜 보리츠와 만나는 것은 물론, 호수 옆에 숨겨진 농장까지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아우가 큰 무례를 저질렀네요……. 정말 죄송해요.”
보리츠는 원작에서 묘사된 것처럼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다.
보이는 건 입술과 턱뿐이지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게 느껴졌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보리츠의 투박한 손이 부산스러웠다.
낯선 사람과 대화해야 하는 상황이 못 견디게 어색한 모양이었다.
‘클라우디아도 보리츠와 친해지는 데 한참 걸렸어. 나는 그보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거야. 내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니까.’
보리츠가 직접 키운 허브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윽하고 산뜻한 맛에 깜짝 놀랐다.
형 흉내를 내던 보르만이 통나무 의자에 발을 올린 채 비딱하게 물었다.
“이봐요, 아가씨. 내 정체는 어떻게 안 거죠?”
소심한 형과 달리 거침없고 도전적인 말투였다.
올해 16살이라고 했던가. 수잔과 같은 또래.
곱상한 외모의 보르만을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보냈다.
“당신 손. 농부의 손이라기엔 너무 곱더라고요.”
보르만은 움찔했고, 보리츠는 발각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보다시피 보리츠 씨의 손은 굳은살투성이잖아요? 손톱 밑에 흙이 끼어 있고요.”
“칫.”
“무엇보다, 보리츠 씨였다면 이유 없이 거금을 내겠다는 사람에게 작물을 바로 팔지 않았을 거예요.”
“당연해요. 그 아이들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상상만으로 끔찍한지 보리츠가 어깨를 떨었다.
“보르만도 허브를 아끼는 척했지만, 값으로 가치를 평가하더군요.”
“아우는 농사를 좋아하지 않아요. 예술가가 되려고 하죠.”
보리츠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르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화를 벌컥 냈다.
“난 이미 뛰어난 예술가야. 무식한 형만 모르는 거지!”
“그래도 도둑질을 하면 어떡해?”
“형이 재룟값만 제때 줬어 봐. 내가 그런 짓까지 했겠어?”
“며칠만 기다리라고 했잖아. 그 애들은 좀 더 성장해야 한다고.”
“동생 작품보다 그깟 풀 쪼가리가 중요해?!”
“그렇게 심한 말을……. 이 아이들도 다 듣고 있는데……!”
보리츠가 화분에 옮겨심은 허브를 두 팔로 감쌌다.
보르만의 얼굴에 새파란 분노가 서렸다.
다시 시작되려는 형제 싸움을 내가 가로막았다.
“싸우지 마세요. 제가 해결해드릴게요.”
“아가씨께서 어떻게요?”
“보르만의 후원자가 되어드리죠.”
“넷?!”
뜻밖의 제안에 보르만이 눈을 부릅떴다.
보리츠는 두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더는 폐 끼칠 수 없어요. 아우를 도와주시고, 제 아이들까지 구출해 주셨는데…….”
“형! 이 누나는 부자야. 금화를 펑펑 쓰는 거 보면 모르겠어?”
“우리에겐 조상님께 물려받은 땅이 있잖아. 땀 흘리는 대로 돌려주는 고마운 땅을 두고 왜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유명한 예술가가 되려면 부자의 후원은 필수라고!”
“실력 있는 예술가라면 혼자서도 성공할 수 있어.”
“미련한 소리 하지 마! 나는 형처럼 살고 싶지 않아. 빨리 성공해서 이 누나처럼 예쁜 여자랑 사귀고 싶다고!”
보리츠는 동생이 부끄러운 모양이지만, 나는 보르만의 솔직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폐 끼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공짜로 후원할 생각은 아니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지요?”
“저는 보리츠 씨가 키운 허브와 작물을 독점 매입하길 원해요.”
“……독점이요?”
“지금 거래하는 상점은 위험해요. 위험한 물건을 취급한다는 게 밝혀지면 보리츠 씨까지 곤란해질 거예요.”
“그건 알지만…….”
“저희 엠스터 상단이 최고 대우를 해드리죠. 상속녀인 제가 보증해요.”
엠스터 상단의 상속녀란 말에 보리츠, 보르만 형제가 흠칫했다.
외딴 농장에 처박힌 농부라도 제국 제일의 상단을 모를 수 없었다.
“엠스터 상회는 부자나 귀족들을 상대하는 곳 아닌가요?”
“최고급 의복, 보석, 식기, 희귀 모피와 식재료를 다루죠.”
“제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팔리지도 않을 거예요.”
“날개 돋친 듯 팔릴 거예요. 이 허브차는 명산지에서 수입하는 최고급 찻잎보다 훌륭하니까요.”
“……진심이신가요, 아가씨?”
침착한 척했지만, 보리츠도 기쁜 기색이었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도 분명 그렇게 말씀하실 거예요.”
“황, 황제 폐하라고요?!”
“부족합니다만 황태자 전하의 교육담당관으로 일하고 있답니다.”
보리츠와 보르만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다래졌다.
평민에겐 하급 귀족도 까마득한 윗사람이었다.
그런데 황제라니.
출세욕이 강한 보르만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형의 어깨를 흔들었다.
“형! 우리 이제 팔자 피게 생겼어!”
“성급하게 굴지 마, 보르만.”
“형이 키운 아이들이 전국적으로 사랑받게 될지도 몰라! 무려 황제 폐하께 인정받는 거야!”
하지만 보리츠는 내 예상보다 더 완고한 사람이었다.
“감사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형?!”
“그 상점과 거래한 건, 주인이 그 누구보다 저를 이해해줬기 때문이에요. 제 아이들의 가치를 눈여겨 봐줬고요…….”
“이 누나도 알아봤잖아! 그래서 이런 제안을 하는 거잖아!”
보르만이 내가 하고픈 말을 대신했다.
그러나 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저는 평범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작물을 키우고 싶어요.”
고개를 푹 숙인 보리츠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황제라는 이름 앞에서도 신념을 지키는 그가 새삼 위대해 보였다.
보리츠가 어떤 업적을 남기는지 몰랐다면 바보 같다고 혀를 끌끌 찼겠지만.
“제가 보르만의 미래를 보장한다고 해도 거절하시겠어요?”
“갑작스러운 행운이 동생에게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요.”
“농부인 보리츠 씨에게도 큰 기회가 될 텐데요.”
“죄송해요. 저는 지금 삶에 만족해요.”
보리츠가 거듭 허리를 숙였다.
보르만은 서러움에 눈물을 쏟았다.
“형은 미쳤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버린 거나 마찬가지야!”
쾅!
보르만이 거세게 문을 닫고 뛰쳐나갔다.
“부끄러운 모습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엘리자벳 아가씨.”
“괜한 분란을 일으킨 제가 더 죄송하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아가씨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더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거절하는 것도 불편하시잖아요?”
제 속을 어떻게 아느냐는 듯 보리츠가 움찔했다.
최고의 인재를 단번에 설득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보리츠와 안면을 튼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마성도 마지막 순간을 위해 아껴놓을 생각이었다.
‘이런 타입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여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야.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지.’
보리츠를 향해 사르르 미소 지었다.
평생 농장에 틀어박혀 살던 청년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보리츠 씨.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제,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황태자 전하를 위한 보양제를 만들고 있어요. 이 허브들을 구해주실 수 있나요?”
“약초 없이 허브로만 보양제를 만든다고요?”
보리츠가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나는 수잔이 적어준 메모를 건넸다.
“이런 레시피는 본 적이 없어요.”
“황궁 약제사셨던 네틀톤 후작님의 연구예요. 그분의 손녀 따님이 발전시킨 레시피고요.”
“!”
“보리츠 씨가 모르신다면 제가 따로 구할 수밖에요.”
한 발짝 물러섰다.
아니나 다를까 보리츠가 전에 없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전부 있어요! 잘 말려둔 아이도 있고, 2주 후에 수확하는 아이도 있고요.”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요.”
“무척 바쁘실 텐데…… 다시 와 주실 건가요?”
“보리츠 씨께서 초대해주신다면요.”
보리츠는 감동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 내 계획대로였다.
‘보리츠는 최고의 구황 작물을 개발하는 농부야. 다음번엔 반드시 굶주린 자의 성자라 불리는 인재를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거야!’
욕심을 감추지 못한 눈으로 보리츠를 훑어봤다.
어차피 세상에 나올 작물이라면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긴다고 나쁠 건 없지 않을까?
9할은 날 위해서.
남은 1할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