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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심심할 때면 건드리는 남자 (31/97)


#31. 심심할 때면 건드리는 남자
2022.12.16.


문 뒤에 숨은 보리츠의 소심한 배웅을 받으며 농장 밖으로 나왔다.

마차를 대기시킨 채 잠시 호수 주변을 거닐었다.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해냈다는 성취감은 잠시.

모래주머니를 매단 듯 팔다리가 무겁고 눈시울이 뜨끈했다.

짙은 피로보다 날 괴롭히는 건 휴식이 허락되지 않는 현실이 아니라, 끈질긴 외로움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불 꺼진 방에 혼자 있긴 싫은데.’

황궁은 내 집이 아니었다.

엠스터 저택으로 돌아간대도 나는 혼자였다.

전생보다 훨씬 부유하고, 아름다워졌지만, 고독한 삶은 그대로였다.

수잔처럼 살가운 여동생도, 더글라스처럼 듬직한 오빠도 없었다.

오늘 같은 날엔 프란츠나 보르만 같은 말썽꾸러기들도 귀여워 보일 것 같았다.

괜찮은 척, 씩씩한 척 해봤자 문득 파고드는 스산한 외로움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

난 어째서 이리도 나약한 걸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한 번 끝난 삶을 이렇게 이어가는 게 무슨 의미일까.

안으로부터 날 허물어뜨리는 외로움 탓인지, 아득하게 환청이 들려왔다.


“엘리자벳.”

묵직하면서도 청아한 중저음.

생각할수록 밉지만, 자꾸만 듣고 싶은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그렇게 처참한 꼴을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나 싶어서 쓴웃음이 밀려 올라왔다.


“왜? 니콜라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어차피 망상이고 혼잣말인데 반말인들 어떠랴.

니콜라이는 새 황비와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그런데 나는 바보처럼 그의 환청이나 불러내고 있었다.


‘엘리자벳? 그런 여자도 있었나? 다시 볼 일 없으니, 방 빼라고 해. 황실 수준에 맞는 새 교육담당관도 찾아보고.’

이미 카레스에게 그렇게 명령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나는 왜.

그깟 외로움이 뭐라고.

이깟 그리움은 또 웬 말이냐고.


“폐하라고 부르지도 않는 건가?”

“그래! 뭐?! 환청이나 듣고 있는 것도 억울한데 꼬박꼬박 존댓말까지 할까?”

“환청?”

“그래, 당신. 이중적이고, 변덕스럽고, 사람 가지고 노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니콜라이란 남자의 환청을 듣고 있잖아.”

“내가 그렇게까지 최악인가?”

“그런 놈을 그리워하는 내가 진짜 최악이지.”

 

 
말하고 나니 속이 더 시끄러웠다.

아니라고 도리질 치던 마음을 입 밖으로 내놓는 건 씁쓸하면서도 허탈한 일이었다.

니콜라이를 향한 마음이 이토록이나 깊어진 줄은 몰랐다.

그저 외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심지어 망상에서조차 니콜라이를 벗어날 수 없었다.

달빛을 등진 니콜라이의 환영까지 나타나자, 자괴감은 더욱 깊어졌다.


“나를 그리워했다는 말인 건가……?”

불신이 가득한, 그러나 어딘가 희망이 담긴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손등으로 두 눈을 비볐다.

달빛 아래로 니콜라이의 환영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던 검은 머릿결은 거칠게 흐트러져 있었고, 눈 밑엔 푸르스름한 혈관이 도드라졌다.

왜 이렇게 살이 빠진 걸까.

가뜩이나 날카로운 턱선이 베일 듯 날카로운 각을 그렸다.

그늘진 눈썹뼈 아래로 번뜩이는 눈동자만은 그대로였다.

내 영혼을 옭아매고, 숨기고픈 마음조차 낱낱이 파헤치는 저 초록빛 칼날만은.


‘뭐야! 환청도 환영도 아닌 거야?!’

날 에워싼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니콜라이가 다가올 때면 늘 그랬다.


“폐, 정말 폐하세요?”

환영이 아니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니콜라이가 여기 있는 거지?

뭐야, 날 데리러 온 거야?

딱딱하게 굳었던 혈관이 팔딱팔딱 뛰었다.

심장도 말썽을 부렸다.

니콜라이 따위 필요 없다고, 닳고 닳은 바람둥이일 뿐이라고 수없이 되뇌었는데.

설명하기 힘든 배신감과 오갈 데 없는 서운함을 날마다 경멸과 증오로 바꿔왔는데.

그 남자, 이렇게 내 앞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날 무력하게 만들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 또다시 불씨를 떨어뜨렸다.

내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여인이 된 것처럼.


“나라 다스리랴, 황비 만들랴 바쁘신 분이 어쩐 일이세요?”

비아냥을 듬뿍 담은,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이렇게 어설프게 튕길 필요는 없잖아?

그냥 좀 무덤덤하게 반응할 수 없는 거야?

손바닥에 식은땀이 촘촘히 맺혔다.

팜므파탈의 모든 걸 물려받았대도 내 알맹이는 모태솔로에 불과했다.

연애는 로맨스 소설로 배운 게 다다.

그래서 니콜라이를 둘러싼 모든 것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혼란스러웠다.

한마디 말은 물론, 손짓이나 눈빛조차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설프게 허둥대는 내 꼴이 볼썽사나웠다.

당신이 그리웠노라 고백한 후였으므로 더욱 그랬다.


“바빠도 올 수밖에. 틈만 나면 계약을 어기는 누구 때문에.”

“제가 할 말을 가로채시네요.”

“나는 약속 어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대와는 달라.”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해요?”

“어디가 어떻게 농담이라는 거지?”

니콜라이의 입매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삼키는 듯했다.

억울하다는 건가? 대체 뭐가?

감정이 다시 격해졌다.

눈에 뵈는 것도 별로 없었다.


“사람 팽개치고 휙 떠나더니 새 여자를 떡하니 데리고 나타나셨잖아요. 일주일 만에.”

“…….”

“계약도 안 지키는 사람이 어떻게 약속을 입에 올리죠?”

“이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만 흔들리고 싶었다.

혼자서 착각하고 실망하는 건 이만 끝내고 싶었다.

시도 때도 없이 오르는 열기와 곧 냉랭하게 식어버리는 가슴이 낯설었다.

날 뿌리치고 외면하던 그를 견디기 힘들었다.

매몰찬 거부를 당하고도 여전히 니콜라이를 믿고 싶은 나도, 그 바닥 모를 어리석음도 미웠다.


“어떤 사정이든 듣고 싶지 않아요. 궁금하지도 않고요.”

“변명할 기회도 없는 건가?”

“항의할 기회는 주셨나요?”

차갑게 되물었다.

니콜라이의 미간에 지워지지 않을 듯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폐하께 저는 쉬운 여자겠죠. 만나자마자 키스부터 했으니까요. 울고불고 술주정까지 했어요. 뿐인가요? 허튼 계약서에 도장도 찍었어요.”

“말이 지나치다.”

“그래도 우리는 계약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폐하는 놀이를 하셨던 것 같네요.”

“그런 적 없다.”

“그럼 왜 심심할 때만 나타나서 절 건드리시는 건데요?”

니콜라이의 아름다운 얼굴에 쓰디쓴 슬픔이 배어 나왔다.

폭풍우를 견디는 나무처럼 꼿꼿이 버티고 있지만, 꼭 쥔 그의 주먹은 산들바람을 맞은 버들잎처럼 가늘게 떨렸다.


“그대야말로 전 약혼자 집에도 가고 전 남자친구인지 웬 놈의 별장에도 들락이지 않았나?”

“전 남자친구? 설마 그 농부 말이에요?”

“더글라스의 여동생과는 거의 친자매처럼 지낸다지?”

“그게 무슨 상관이죠?”

“뭐든 상관있다. 그대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대화하고, 누구에게 미소를 짓는지.”

니콜라이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격앙됐다.

두 눈에 담긴 초록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이 일대를 모조리 불살라버릴 듯 거대한 화염이 내 심장마저 달굴듯했다.


“여기까지 오는 게 쉬웠을 것 같은가? 아버지의 유언도 뿌리치는 못난 놈을 만들어놓고.”

아버지의 유언?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차게 식은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니콜라이가 숨도 쉬지 않고 읊조렸다.


“천박한 놈들한테 희롱이나 당하며 속을 뒤집어 놓는 게 누군데?”

“!”

“그대는 날 진정 폭군으로 만들 셈인가? 빈민가를 모조리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니콜라이 스스로도 이해하고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눈 주변이 붉게 달아올랐다.

목에는 굵은 핏대가 도드라졌다.

나 정말 미쳤나 봐.

저 모습이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요염해 보이는 걸 보면.


‘날 몰래 지켜보고 있었단 말이야? 후궁에서 질펀한 파티를 벌인 게 아니라?'

“절 미행하셨어요?”

“보호한 거다. 비밀리에.”

“요청한 적 없어요.”

“나도 의뢰받고 움직이지 않아.”

“그러니까 왜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대를 보호하는 것 역시.”

다짐인가, 고백인가.

그것도 아니면 협박인가.

분명 화가 난 것 같은데, 두려움에 떠는 아이처럼 애처로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

그에게 두 팔을 뻗었다.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는 그의 차가운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아귀로 전해지는 떨림.

순간 누그러지는 니콜라이의 눈빛이 토라진 고양이처럼 보였다가, 갑자기 성난 야수처럼 보인다면 내가 이상한 거겠지?


“엘리자벳. 이러는 내가 싫은가?”

“잘 모르겠어요.”

“싫다면 사라져줄 것이다. 그대 앞에서.”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심이었다.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붙인 채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 고집스러움이 노여웠고, 노여워하면서도 마음 한 움큼을 또다시 빼앗기는 내가 바보 같았다.

갑자기 등 뒤로 낯선 소름이 돋았다.

어딘가 분명히 돌변한 기운이 느껴졌다.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그래. 도서관!


“적당히 좀 하세요.”

“싫다는 얘기군.”

그 말을 끝으로 니콜라이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풍덩!

비명을 지를 겨를조차 없었다.

일부러인지 실수인지도 알 수 없었다.

밤하늘보다 검은 호수가 그를 빨아당겼다.

완전히 물에 잠겨,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폐하?! 장난이 심하잖아요! 어서 나오시라고요!”

수면에 동심원이 그려졌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 남자는 왜 이런 이상한 짓을 하는 거지?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거야?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거추장스러운 치맛단을 북 찢으며, 호수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만큼 미친 게 분명한 폭군을 구하러.


 

***

더글라스를 빈민가에서 만났을 때 클라우디아는 쉽사리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의 초대를 받아 네틀톤 후작저에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더글라스는 무의미한 인사치레 대신, 클라우디아가 즐겨 마시던 싸구려 럼주를 따라줬다.


‘더글라스가 뭔가 변했어. 어깨도 넓어지고, 눈빛도 어딘가 단호해졌어.’

고도의 경지에 오른 무사의 감이 아니라, 한 남자를 오래 지켜본 여자의 감이었다.

함께 있는 이를 편안하게 해주는 더글라스 특유의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호리호리하게 큰 키도, 꽃잎처럼 달콤해 보이는 분홍빛 머리칼도 변치 않았다.

몇 번이나 애써봤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던 소꿉친구.

가슴 터질 듯한 설렘도, 미래를 함께하고 싶은 바람도 내색하지 못했던 세월.

더글라스의 두 눈은 항상 클라우디아가 아닌 다른 여자를 좇고 있었다.

황제를 유혹해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힌 그 악녀를.


“빈민가엔 대체 왜 갔던 거야?”

더글라스가 물었다.

불편한 침묵이 끝났음에 안도하며 클라우디아가 술잔을 입으로 옮겼다.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면 빈민가부터 살펴야지.”

“귀환하자마자 민정 시찰이라니. 여전하네, 라디아.”

“너는 왜 갔었는데?”

“수잔이 부탁한 약재를 사려고.”

“그런데?”

“살 수 없었어. 아니, 살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

더글라스가 씁쓸하게 대꾸했다.

약초를 사지 못해 아쉬워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우에게 속내를 드러낸 것이 민망한지 그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기사단장님 눈엔 어때? 나라는 잘 돌아가는 것 같아?”

“여전히 쓰레기 천지야.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잡을 것투성이고.”

“그뿐이야?”

“흐음. 아주 흥미로운 여자를 봤어.”

“흥미롭다고? 너한테 그런 말 듣는 건 처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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