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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각오가 되셨다니, 책임져 드리지요 (32/97)


#32. 각오가 되셨다니, 책임져 드리지요
2022.12.20.



“범상한 여자가 아니었어. 건달 몇 놈이 지분거리기에 도와주려던 참이었는데…… 제 손으로 깔끔하게 처리해버리더군.”

떠올리는 것만으로 즐거운 듯 클라우디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호위가 있긴 했지만, 무력을 뒷배 삼아 설치지도 않았어. 당당하고 기품있달까.”

“…….”

“영리한 사람일 거야. 호위를 숨겨 위험에 대비한 걸 보면.”

“라디아.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냈어?”

“얼굴은 못 봤어. 그래도 느낌이 좋더군. 동질감 때문이려나.”

“동질감을 느꼈다고?”

“여자 몸으로 사내들 다루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만큼 클라우디아는 그 신비한 여자에게 끌렸다.

기회가 되면 같이 술잔이라도 기울이며 이야기하고 싶었다.

함께 피땀 흘리는 동료가 아닌 또래 여성에게 그런 마음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라디아. 혹시, 머리카락이 화염처럼 붉지 않았어?”

무언가 퍼뜩 떠올랐다는 듯 더글라스가 물었다.


“머리카락은 왜?”

“네가 본 그녀는…… 아마 엘리자벳인 것 같아.”

더글라스가 사뭇 진지한, 그러나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엘리자벳이 수잔에게 약재 상점 위치를 묻더래. 그날 내가 약초를 사려고 했던.”

“빨간 머리는 맞지만, 엘리자벳이었을 리는 없어”

“그리고 그날은, 엘리자벳이 휴가를 냈던 바로 그 날이야!”

잠시 멈칫하던 클라우디아가 미간을 좁혔다.


“파티장도 보석상도 없는 빈민가를 얼쩡댈 여자가 아니야. 평민들처럼 수수한 옷차림일 리도 없고.”

“엘리자벳은 완전히 바뀌었어. 네가 알던 그녀가 아니야.”

뜨거운 무언가가 뱃속에서 왈칵 치솟았으나, 이내 밀어 넣었다.

엘리자벳은 친우의 전 약혼녀일 뿐이었다.

어떤 경우든 값싼 질투는 용납할 수 없었다.

무장한 호위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고, 좌중을 사로잡는 기개를 보여주던 그녀가 정말 엘리자벳이었을까?

그런 줄도 모르고 잠시나마 호감을 느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게다가 엘리자벳을 두둔하는 더글라스에게도 실망했다.


“사람 쉽게 변하지 않아, 더기.”

“이번엔 진짜야. 네 눈으로 봤잖아?”

“넌 그렇게 믿고 싶겠지. 늘 배반당하면서도.”

“클라우디아.”

“엘리자벳은 사교계를 넘어 이제 황실까지 어지럽히고 있어. 폐하의 총애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다.”

“그럼 설명해봐. 그녀가 어떻게 황태자 전하의 교육담당관이 될 수 있었지?”

잠시 말이 없던 더글라스가 옹색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만한 능력을 가졌으니까.”

“파티와 술독에 빠져 살던 여자가? 약혼자 버젓이 두고 다른 남자들과 놀아나던 바람기 빼고, 무슨 능력이 있는데?”

클라우디아가 비릿한 웃음을 던졌다.

단정한 얼굴이 어둑해졌지만, 더글라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말했잖아. 엘리자벳은 변했다고.”

“포크보다 무거운 건 들어본 적도 없을 여자가 검술 교관이 된 건?”

“황태자 전하께서 중독당하던 사실을 밝힌 것도 엘리자벳이야.”

“독을 쓴 사람이 그녀일 수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더글라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클라우디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전하를 좌지우지하고 싶었겠지. 공을 세워서 폐하의 관심도 얻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잖아.”

“라디아…….”

“결국 범인도 밝혀내지 못했다지? 이게 다 우연일까?”

무거운 침묵이 응접실을 짓눌렀다.

몇 번 호흡을 가다듬던 더글라스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옛날부터 엘리자벳을 좋게 보지 않다는 다는 거 알아. 내 친구니까 더 그랬겠지. 하지만 그녀를 모함하진 말아줘.”

“내가 왜 그 여자를 모함해?”

“부탁한다, 클라우디아.”

엘리자벳이 뭐라고, 더글라스가 머리까지 조아리는 걸까.

담즙을 씹어 삼킨 것처럼 입안이 쓰고 떫었다.

클라우디아가 연모하는 남자는 엘리자벳을 변호하기 위해 절 모사꾼 취급했다.

밑도 끝도 없는 살의가 치솟았다.

무표정한 얼굴도, 거짓에 불과한 평정심도 집어치우고 싶었다.

뜨거운 피를 뿌리고 싶었다.

더글라스를 속이고, 황제마저 넘보는 악녀의 피를.

격앙된 순간에도 클라우디아는 기사였고, 기사였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가다듬었다.


‘질투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면 기사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최악이야. 악녀의 목숨도 소중한 법이니, 성급하게 굴지 말자.’

하지만 신중했음에도 살려둘 가치가 없다면?

그때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뽑을 작정이었다.

***

호숫물은 차고 깊었다.

짙푸른 남청색 물살을 헤집으며 니콜라이를 찾았다.

유난히 밝은 달빛이 비추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터였다.

차마 눈을 감지 못한 시체처럼 창백한 그를 봤을 때, 팔다리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왜 헤엄치지 않는 거지? 설마 죽은 건가?!’

그의 머리칼이 검은 수초처럼 흐느적거렸다.

곧 사라질 공기 방울이 그 주위를 음산하게 떠돌고 있었다.

쿵, 쿵, 심장이 가슴뼈를 거칠게 두드렸다.

전생에서 나는 삶의 의지를 잃은 사람을 여럿 보았다.

살고자 애쓰다 지쳐버린 사람들.

모든 고통 다 내려놓고 영영 떠나길 바라는 영혼들.

나 역시 그중 하나였으므로 니콜라이의 텅 빈 눈동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 없었다.

지쳐서, 외로워서, 그만 편해지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걸 가진 남자도 전생의 나와 비슷한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여자한테 가면 되잖아. 물속에서 뭘 하는 거야? 진짜 죽으려면 어쩌려고!’

분노를 어금니 사이에 단단히 깨물었다.

멋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젖 먹던 힘을 짜내 니콜라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를 끌고 뭍으로 오르는 시간이 천년처럼 느껴졌다.

물에 푹 젖은 남자는 눈앞이 새하얘질 만큼 무거웠다.

목에서 비릿한 피맛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장난이라면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장난이 아니라면 보상하게 만들리라.

오직 그 일념으로 이를 악물었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니콜라이를 살폈다.

물속에서는 뜨고 있던 눈꺼풀이 꾹 감겨 있었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손날을 세워 창백한 뺨을 찰싹, 찰싹 내리쳤다.


“정신 차려봐요! 나만 생고생시키고 죽을 거예요?”

“…….”

“내 앞에서 무슨 짓이야? 이게 얼마나 큰 죄인지 몰라?”

지독한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날 골탕 먹이는 것뿐이라고, 진짜 의식을 잃었을 리 없다고 믿었다.

그의 뺨을 때리는 손길이 더욱 매서워졌다.

그동안의 원망과 분노, 허탈함, 적개심을 다 퍼부어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설마…… 설마……!”

니콜라이 코에 귀를 바짝 붙였다.

숨결이 없었다.

가슴팍도 오르내리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건 오직 축축한 물기와 소름 끼치는 적막뿐이었다.


“죽지 말아! 절대 허락하지 않아! 이 나쁜……!”

국제자원봉사대에서 배웠던 심폐소생술을 이렇게 써먹게 될 줄 몰랐다.

두 손을 모아 쥐고 빠르게 심장을 압박했다.

훅, 훅, 훅,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박자에 맞춰 굴러떨어졌다.

물 흐르듯 다음 단계가 이어졌다.

폐 속에 숨을 가득 머금고,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덮었다.


“흐읍.”

남몰래 첫 키스의 촉감을 되새기곤 했다.

낙인처럼 새겨진 감촉을 잊는 건 불가능했다.

그날의 기억은 나를 깨물고 도무지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기억 속 열감은 온데간데없었다.

니콜라이의 입술은 생명이 빠져나간 무생물처럼 차갑고 물컹할 뿐이어서 오싹하기만 했다.

단두대 칼날을 기다릴 때보다 더한 공포가 심장을 조였다.

너무 늦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호흡마저 잊어버렸다.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내 앞에서 목숨이 끊어지는 건 더 싫었다.

천하의 바람둥이라도, 매일 나 아닌 다른 여자를 취한다 해도, 니콜라이가 이 세상에 존재해 주기를 바랐다.

매일 밤 그와 함께 처형당하는 꿈을 꾸어 왔다.

하지만 그의 목숨이 내 목숨만큼 귀하게 여겨진 적은 처음이었다.

내 생명보다 간절히 지키고 싶어질 줄도 몰랐다.


“살라고! 나도 살 테니까, 당신도 살아!”

고함치고, 가슴이 부서지라 압박했다.

마지막 남은 온 힘을 모아 숨을 불어넣었다.

미미한 온기가 돌아온 건 그때였다.


 


“으음……!”

단순히 돌아온 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내 입술을 적극적으로 빨아당기며 안으로 밀어닥쳤다.

입술이 밀착되고 숨결이 포개졌다.

또 다른 현기증이 솟구쳤다.

이 열기는 어디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것일까?

지금이 어떤 순간인데 내게 키스를 하는 걸까?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때리고, 불한당 취급하며 밀치고 싶었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잠시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서늘함이 가시지 않은 손끝으로 내 머리를 고정하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물에 젖은 옷자락이 온몸에 찰싹 들러붙었다.

몸의 굴곡 그대로였을 얄팍한 천 조각은 입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호숫가 풀숲이 아니라, 침대에서 맨몸으로 그에게 안긴 듯했다.

발끝부터 저릿함과 아찔함이 번갈아 치솟았다.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끝내 니콜라이를 밀어내지 않았다.

맞닿은 채 뜨겁게 박동하는, 내가 되살려낸 그의 심장.

그가 살아있는 소리를 더 듣고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오히려 그의 입술을 더 탐하고 있었다.

촉촉하고도 부드러운 그의 일부를 더 오래 소유하고 싶었다.

아니, 독점하길 원했다.

첫 키스 이후, 나 대신 그의 입술을 탐했을 여자들을 상상하며 펄펄 끓어오르는 화를 삭여야 했다.

나에게 아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기에 질투심도 부정해야만 했다.

니콜라이의 숨결이 스며들며 그동안의 번잡한 감정을 녹여냈다.

시린 물속을 한참 동안 헤집었기 때문일까.

냉기가 온기로 뒤바뀌고 새로운 열기가 타오르는 순간에 시작된 키스는 끝날 줄을 몰랐다.

지금 이 순간 살아있고, 누구도 우리를 방해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입맞춤이었다.

니콜라이는 내 아랫입술을 머금고, 윗입술을 더듬으며 돌진해왔다.

심장이 패턴 없이 뛰었다.

그의 입술에 영혼까지 붙들린 듯했다.

문득 겁났다.

오늘을 기점으로 내 인생이 송두리째 변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었다.

그러고도 남을 만큼 농밀한 키스였다.

그 끝에서 니콜라이가 탁한 목소리를 뱉었다.


“그대가 살렸으니 그대가 책임져, 엘리자벳.”

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오만한 말인가.


“죽을 작정이었어요?”

“난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맘대로 죽을 수도 없고.”

또 알 수 없는 말.

의아했지만 되묻기엔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황제가 돼 가지고 뭐가 이렇게 무책임해요?”

“그대 눈에 내가 황제로는 보이나?”

“아뇨. 그냥, 미친놈 같아요.”

머리칼의 물기를 털어낼 생각도 못 하고 대꾸했다.

동의한다는 투로 니콜라이가 피식 웃었다.

이 상황에서 웃을 기력이 있다니, 놀랍기 짝이 없었다.

끊어진 숨을 이제 막 되찾은 사람 같지 않았다.

날 바라보는 니콜라이의 눈동자는 꿀과 크림을 듬뿍 얹은 스폰지 케이크처럼 부드럽다가, 달빛을 반사하는 겨울 바다처럼 차갑게 빛났다.

포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가 말했다.


“제대로 봤어. 내 눈에도 미친놈 같으니까.”

공허한 웃음이 흩어졌다.

달빛은 빛을 잃었다. 몇 겹 두터운 어둠이 우리를 짓눌렀다.

하찮게 목숨을 걸었던 남자는 침묵으로 닦달했다.

내가 무슨 대답을 내놓든 우리는 같을 수 없으리라.

먼 훗날 오늘을 되새기며 신을 원망하거나, 운명에 감사하며 기쁨의 기도를 올리겠지.

어느 쪽으로 흐르려는지 나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정말 책임지길 바라요?”

“그래.”

“휘둘리실 각오는 되셨나요?”

“각오를 좀 더 보여줘야 하나?”

그가 턱짓으로 호수를 가리켰다.

얄미웠지만 이번엔 내가 각오를 보여줄 차례였다.


“후회하셔도 소용없어요. 이젠 정말 무를 수 없으니까요.”

힘껏 내리칠 때도 멀쩡하던 니콜라이의 두 뺨이 꽃 피듯 붉어졌다.

멍하니 날 바라보던 두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에메랄드를 박아넣은 것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새로운 희망이 들끓었다.

그의 입꼬리가 위로 끌어당겨 졌다.

늘 날카롭던 눈매는 유순한 소년의 그것처럼 내려앉았다.

지금껏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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