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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엘리자벳은 운이 좋아 (33/97)


#33. 엘리자벳은 운이 좋아
2022.12.23.


어떻게 환궁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까무룩 의식을 놓아버렸으니까.

심장에 해롭도록 예뻤던 그 마지막 미소 때문일까?

원작 폭군을 책임지기로 한 탓일까?

야밤에 수영을 한 때문이겠지만 나는 지독한 열감기를 얻고 말았다.


“진짜 바보들도 달밤에 호수로 막 뛰어들고 그러진 않아.”

팔짱을 낀 프란츠가 침대 머리에서 쫑알댔다.

베개에 머리를 파묻으며 잔뜩 쉰 목소리를 내뱉었다.


“시끄러워, 프란츠…….”

“세상에 수업을 막 째는 선생이 어디 있어?”

“방학이라고 생각해.”

“무책임하기는. 쯪.”

“회복할 때까지 더글라스 님께서 널 돌봐주시기로 했어.”

“그게 더 싫어! 이 막대한 피해를 어떻게 할 거야?”

프란츠가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었다.

먹이를 물고 가다가 나무에서 굴러떨어진 다람쥐가 있다면 꼭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제발 조용히 좀 해줘. 네가 떠들 때마다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아.”

“자꾸 움직이니까 그렇지. 가만히 있어. 수건이 떨어지잖아.”

프란츠가 내 이마에서 흘러내린 수건을 첨벙, 대야에 담갔다.

어설픈 손놀림으로 수건의 물기를 짜며 낑낑댔다.

그 수건을 다시 내 이마에 올려놓고 뿌듯해하는 프란츠.

흘러내린 물로 축축해진 내 머리칼과 침대 시트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엘리자벳은 운도 좋지. 나처럼 다정한 제자를 뒀으니까.”

“맞아. 가문의 영광이야. 다정한 황태자 전하.”

“내가 아니었으면 영양 보충도 못 했을걸?”

콧대를 높이는 프란츠 뒤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프 그릇이 보였다.

프란츠가 황궁 요리사들을 닦달해 만든 특제 수프였다.

수프에는 생선 대가리, 조류의 발, 뾰족뾰족한 나뭇조각 등 정체 모를 재료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색깔은 진녹색이고, 비릿한 약재 냄새가 풍겨서 쳐다보는 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나름의 관심 표현이겠지만, 모든 것이 성가시고 귀찮았다.


“프란츠. 혼자 있게 해주면 안 될까?”

“내가 방해된다는 말이야?”

프란츠가 토끼 눈을 떴다.


‘응. 너 때문에 수명이 쭉쭉 닳는 것 같아. 헐크를 녹여 만든 저 수프를 먹으면 진짜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또 제자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지 않은가?

그 제자가 틈만 나면 독설을 퍼붓는 황태자라면 더더욱.


“귀한 황태자 전하께 감기를 옮길까 봐 그러지.”

괜찮은 변명이었다. 순발력이 늘었어.

프란츠의 연두색 눈동자에 기쁨이 확 번졌다가 이내 샐쭉해졌다.


“난 튼튼해. 감기 따위 안 걸린다고.”

“다행이네. 네가 아프면 내가 더 괴로우니까.”

병시중에 까탈까지 받아줄 걸 생각하니 괴롭다는 뜻이었다.

프란츠는 또 감동한 것 같았지만.


“이만 황태자 궁으로 돌아가. 착하지?”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프란츠의 금발을 쓰다듬었다.

어린아이의 정수리 머리칼은 비단실보다 매끄러워서 계속 만지고 싶었다.

영역 싸움을 하는 늑대처럼 굴다가도 쓰다듬어주면 졸린 강아지처럼 얌전해지는 게 프란츠였다.

틈날 때 쓰담쓰담, 해줄 수밖에.


“문병 선물은 나중에 줄게.”

“마음만으로 고마워, 프란츠.”

“기억에 남을 선물을 가져올 테니까 기대해.”

안 오는 게 제일 좋겠지만, 부드러운 미소로 응답했다.

프란츠가 떠나자마자 탕약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어렴풋 깨어났을 땐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기괴한 젤리처럼 굳어버린 헐크 수프 대신 묽은 채소 수프를 몇 입 떠먹었다.

졸음이 끊임없이 밀려왔다.

오랜만의 휴식을 놓치기 싫다는 듯 내 몸은 다시 침대 아래로 가라앉았다.

모라신시아의 눈동자로는 내 상태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궁정 치료사를 믿고 푹 쉬는 수밖에.


‘니콜라이는 왜 병문안을 안 오는 거야? 생명의 은인이 자기 때문에 이렇게 앓아누웠는데…….’

아주 오랜만에 단두대 꿈을 꾸지 않았다.

클라우디아도 없고, 처형을 구경나온 군중도 없었다.

그런데 니콜라이만은 끊임없이 등장해 날 당혹시켰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새까만 준마에 나를 태우고 행진하는 니콜라이.

-빈민가의 깡패들을 때려눕히는 니콜라이.

-호수에 빠진 나를 구하기 위해 완벽한 자세로 물살을 헤치는 니콜라이.

-내게 인공 호흡하는 니콜라이!

꼬마 니콜라이가 출몰해 머릿속을 어지럽혔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른 부분도 있었다.

얄밉던 꼬마 니콜라이들과 달리 꿈속 니콜라이는 심장에 해로운 말만 늘어놓았다.

그가 했던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대가 살렸으니, 그대가 책임져, 엘리자벳.」

「제대로 봤어. 내 눈에도 미친놈 같으니까.」

조금쯤은 기대해도 되는 거겠지?

목숨을 걸고 장난치는 사람은 없잖아?

아무리 바람둥이라도 책임지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겠어?

아직도 모호했다.

니콜라이가 정말 충동적으로 죽으려던 건지, 괴팍한 방식으로 날 협박한 건지.

마지막으로 그를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유혹게임의 룰을 까맣게 잊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나는 간절했고, 또 불안했다.

또다시 니콜라이에게 실망하고 내동댕이쳐질까 봐.


 

***

며칠 후 입가를 흰 손수건으로 가린 카레스가 찾아왔다.


“원래 황제 폐하께서는 병문안을 하지 않으십니다.”

사무적으로 변한 말투와 무뚝뚝한 눈빛을 보니 마성의 효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다시 유혹해둘까, 싶었지만 잠시 미루기로 했다.


“왜요?”

“율법입니다. 폐하의 옥체는 제국의 근간이지 않습니까. 병이라도 옮으면 큰일이니까요.”

“단순한 열감기일 뿐이에요.”

실망했다는 내색은 최대한 숨겼다.

하지만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니콜라이의 병문안을 기다린다는 뜻 같아서 얼굴 전체가 달아올랐다.


“엘리자벳 양. 저승꽃이란 돌림병을 아십니까?”

“20년 전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은 병이라고 들었어요. 꽃잎처럼 붉은 반점이 돋고 썩은 꽃 비슷한 악취가 난다죠?”

“수많은 백성이 저승꽃으로 사망했습니다. 환자와 눈만 마주쳐도 죽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끔찍했지요.”

“저승꽃은 완전히 사라진 거 아니었어요?”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나는 보통 환자가 아니었다.

황제를 구한 영웅 아닌가.

친필 편지 정도는 보낼 수 있잖아?

또 바쁘다는 핑계를 대려나?

침대 시트를 비틀어 쥐는 날 보며 카레스가 무심하게 말했다.


“스트레스는 회복에 좋지 않습니다.”

“전염성은 없으니 관심 꺼주세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계속 신경이 쓰이는군요.”

“?”

“폐하께서 명령하지 않으셨더라도 엘리자벳 양을 찾아왔을 겁니다. 상태가 어떤지, 회복은 순조로운지 궁금했으니까요.”

“왜 궁금하신데요?”

“저도 알고 싶습니다. 번거롭고 난감하거든요.”

‘카레스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혹시 지속적인 유혹으로 영향을 받은 걸까?’

새로운 실험 결과를 보게 될 것 같아 호기심이 동했다.

카레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모든 게 앞으로 불어닥칠 피바람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면 카레스도 기꺼이 동참해줬을 거였다.


“폐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카레스가 자그마한 상자를 내밀었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꼭 반지가 담겨 있을 법한 크기와 모양의 상자였다.


“병자를 찾아갈 때 빈손으로 가지 않는 것이 하트만의 오랜 관습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프란츠도 선물을 가져오겠다고 한 거군요.”

내가 황태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게 못마땅한지 카레스가 헛기침했다.

시선을 내리깔며 얼른 말을 돌렸다.


“황제 폐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이건 제 선물입니다.”

“카레스 님도 준비하셨어요?”

“관습일 뿐이라지 않았습니까.”

카레스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나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냉랭하기만 하던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착각이라 생각하기엔 제법 선명했다.

니콜라이의 선물과 달리, 카레스의 선물은 크고 묵직했다.


“책입니다.”

“누워만 있자니 무료했는데 고마워요.”

“황실 연보와 모라신시아 신학입니다.”

“도움이 되겠네요.”

“치유의 여신에 관심 많다고 들었습니다. 아칸소 추기경을 통해 구한 책이니 흥미로우실 겁니다.”

“황실 도서관에 없는 책인가요?”

“그렇습니다. 용무가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카레스가 가볍게 묵례했다.

간결하지만 예법에 모자람 없는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오늘따라 이상하네. 갑자기 좀 서두르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다, 니콜라이가 줬다는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뭐가 들었을까.

당장 열어보고 싶은 마음과 내용물을 알아맞히고 싶은 마음이 교차했다.

상자를 귀에 대고 흔들어봤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무게감도 거의 없었다.

빈 상자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리본을 풀려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더글라스 네틀톤 후작 각하와 네틀톤 영애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슴 남매는 병문안 의사를 밝혀왔다.

오늘에서야 겨우 손님을 마주할 상태가 되었다.

그 전갈을 보낸 게 고작 1시간 전이었다.

만사 제쳐놓고 찾아와준 두 사람 덕분에 기운이 솟았다.


“엘리자벳 언니. 좀 어떠세요?”

“좀 나아지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엘리자벳.”

사슴 남매가 다정한 목소리와 눈이 환해지는 미모로 지친 날 위로해줬다.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지만, 환자 앞에서 호들갑을 떨지 않으려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

섬세한 배려가 몸에 밴, 이 선량한 사람들이 날 좋아해 준다는 것이 기뻤다.


“문병 선물입니다.”

사슴 남매 역시 선물을 잊지 않았다.

기쁜 마음으로 선물 꾸러미를 풀었다.


“분홍색 물약은 수잔의 선물일 테고, 이건…… 칼이네요?”

예사롭지 않은 솜씨로 세공된 단검을 꺼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학가인 더글라스가 칼을 선물했다고?

폭력이라면 질색하는 사람인데?

한 뼘 크기의 단검을 칼집에서 꺼냈다.

푸르스름한 날이 번뜩이는 걸 보니 작지만, 명검이 분명했다.

은제 손잡이에는 분홍색과 붉은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호신용 단검입니다. 가벼워서 지니기 편하실 겁니다.”

“의외의 선물이네요.”

“호위가 있다고 완벽하게 안전하진 않습니다. 항상 조심하십시오.”

내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것은 니콜라이뿐만이 아니었다.

아마도 내가 빈민가에서 겪은 일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더글라스의 카드에는 유려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어디에서든 당신이 무사하길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공격도 서슴지 마십시오. 저는 언제나 당신을 지지합니다.-

어떤 남자는 내가 늦은 시간 위험한 곳에 갔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거였다.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얌전히 굴라고 참견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잔소리 대신 단검을 선물했다.

세상의 관습으로 날 속박할 수 없으며, 어떠한 일이 생겨도 내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의지를 담았으리라.


“정말 고마워요. 더글라스 님.”

“기쁘게 받아주시니 저 역시 감사합니다. 엘리자벳.”

더글라스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광활한 광야처럼 깊고 너른 갈색 눈동자가 날 가만히 흔들었다.

마치 내가 혼자가 아님을, 내 곁에 언제나 자신이 있음을 기억해달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오빠에게 지고 싶지 않은지 수잔이 끼어들었다.


“제 선물도 봐주세요. 언니가 깜짝 놀랄 약을 개발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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