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황제가 창밖에서? (34/97)


#34. 황제가 창밖에서?
2022.12.27.



“무슨 약인데요?”

“그게…… 오라버니가 들으시면 좀 곤란한데…….”

자신만만하던 수잔이 더글라스를 곁눈질하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괜히 머리카락을 말아 꼬면서 딴청을 피우는 걸 보면 보통 약이 아닌 것 같았다.


‘감기약 아니었어? 어떤 약이길래 수잔이 저러는 거지?’

더글라스 몰래 알려달라는 뜻으로 손짓했다.

수잔이 쪼르르 다가와 내 귓가에 작은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세상에 그런 약이 존재해요?”

“깜짝 놀라실 줄 알았어요. 호호.”

“하지만 이건…….”

“언니를 위해 딱 한 병만 만들었어요. 또 만들 계획은 없고요.”

“수잔.”

“저도 언니가 이 약을 쓰지 않게 되시길 바라요. 하지만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르잖아요?”

경탄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분홍색 약병을 다시 한번 살폈다.

수잔 말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수잔 말대로 언젠가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할아버님께서 연구하셨던 건가요?”

“몇 가지 부작용을 없앴고요.”

“수잔은 천재예요!”

“언니가 아니었다면, 할아버지께서 작고하시기 전에 쓴 책도 찾지 못했을 거예요. 이 약도 재현하지 못했겠죠.”

“천국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수잔을 자랑스러워하시겠네요.”

수잔이 볼을 붉히며 콧잔등을 긁었다.

작고 연약한 소녀가 궁정 약제사들도 만들지 못한 약을 개발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대화에서 잠시 소외된 더글라스도 흐뭇한 표정으로 나와 수잔을 바라보았다.


“수잔이 엘리자벳의 칭찬을 받고 싶어서 더 노력하는 것 같더군요.”

“언니가 그렇게나 후원을 해주셨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너무 무리하진 말아라. 갑자기 아프기라도 할까 두렵구나.”

“오라버니도 참. 요즘은 열도 없고, 쓰러지는 일도 없잖아요?”

“방심하다 큰 탈이 나는 법이야.”

“잔소리쟁이는 여자한테 인기 없어요! 안 그래요, 언니?”

거들어달라는 투로 수잔이 날 돌아보았다.


“저도 더글라스 님과 같은 생각이에요. 건강이 최우선이라는 걸 잊지 마요, 수잔.”

“언니까지 이러시기예요?”

“수잔을 아끼는 것뿐이에요.”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더글라스가 보기 드물게 큰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잔이 입을 삐죽거렸다.


“이럴 때 보면 두 분이 진짜 똑같아요.”

“?”

“웃으면서 말씀하시니까 잔소리도 거부할 수가 없잖아요.”

“웃어른 말씀은 새겨듣는 게 좋아요.”

“절 어린애 취급하는 것도 똑같잖아요! 16살이면 시집가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나이인데.”

수잔의 볼멘소리에 풋, 웃음을 터뜨렸다.

더글라스도 참고 있던 웃음을 푸스스 흘리고 말았다.

또래보다 작고 말라서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수잔이 다 큰 척하는 게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와 더글라스를 흘겨보던 수잔이 제법 어른스럽게 말했다.


“두 분이 웃으시는 걸 봤으니 너그럽게 용서하겠어요.”

“감기 다 나으면 황궁 구경을 시켜줄게요. 같이 산책해요.”

“정말요?”

“길 잃어버리지 않게 제 손을 꼭 잡는다고 약속하면요.”

“언니!”

수잔이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카나리아 방에 다시 한번 맑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사슴 남매와 함께할 때면 조금씩 미안하고 약간은 거북했는데.

오늘은 그저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더글라스는 나와 친구로 남기로 결심한 걸까.

그렇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기적인 아쉬움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누군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

웃고 떠드는 일에도 체력이 필요했다.

사슴 남매가 떠난 후 다시 열이 올랐다.

밤낮없이 날 돌보던 원로 궁정 치료사가 한바탕 잔소리를 했다.

궁정 치료사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하던데 이렇게 흥분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당분간 면회는 금지하겠습니다.”

“거의 다 나았어요. 열도 곧 내릴 거고요.”

“압니다. 하지만 의료진들을 위해 침대에 누워 계십시오!”

“네?”

“엘리자벳 님께서 속히 완쾌하지 못하신다면……. 그런 끔찍한 상상은 하고 싶지 않지만. 아무튼,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위험해집니다.”

원로 치료사 제프리가 밀랍처럼 창백한 얼굴로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나보다 훨씬 위중한 병을 앓는 것 같았다.


“폐하께서 협박이라도 하셨나 봐요?”

“함구하라는 명령도 하셨지요.”

“말씀해주세요.”

“안 됩니다.”

“해주고 싶으실걸요?”

내가 원로 치료사에게 마성이 담긴 윙크를 건넸다.

멍하니 눈꺼풀을 깜빡이던 그가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대답했다.


“흠흠. 엘리자벳 님이 물으시는데 못 드릴 말씀도 없지요.”

아무렴. 소설 속 악녀로 살려면 이 정도 특전은 있어야지.

쾌재를 부르며 재차 물었다.


“폐하께서 뭐라 하셨죠?”

“폐하를 진료할 때보다 더 정성을 쏟으라 하셨습니다. 초대 황제를 되살리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라고요.”

“심하네요.”

“일주일 안에 말끔히 회복하지 못하면 의료진 전부를 북부 탄광으로 쫓아버리시겠답니다. 아무도 살아서 돌아온 적 없는 그곳 말입니다.”

“일주일이라니…… 기계도 아닌 사람을 무슨 수로요?”

“……첫날 엘리자벳 님께 물약을 올렸던 약제사를 기억하십니까?”

“20년간 궁정 약제사로 일하신 분이라고 들었어요”

“지금쯤 탄광으로 향하는 짐마차를 타고 있을 겁니다.”

“뭐라고요?!”

원로 치료사가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약을 드시고 잠잠하던 기침이 심해지셨거든요.”

“감기가 원래 그런 거잖아요?”

“폐하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폭군이 따로 없네요!”

그때 창밖에서 뚜둑, 낯선 소리가 들렸다.

팔뚝에 소름이 돋을 만큼 불길한 기운도 엄습했다.


“무슨 일이지?”

하녀가 확인해보니, 창가에 굵은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 맑은 날에 날짐승이라도 다녀간 걸까?

어린애 팔뚝만 한 나무가 그냥 부러질 리도 없고.


“어쨌든 약제사님이 돌아올 수 있도록 폐하께 잘 말씀드릴게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요?”

“가문의 뒷배로 들어온 된 자라 실력이 형편없었습니다. 제 명령도 잘 따르지 않았고요. 엘리자벳 님께 올린 약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이번 기회에 약제사를 새로 뽑으시면 되겠네요?”

“송구합니다.”

“그럼 제가 한 명 추천해도 될까요?”

궁정 치료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짚이는 바가 있다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 혹시 그때 보여주신 찰과상 연고를 만든 분입니까?”

“어리지만, 실력과 열정만큼은 보증할 수 있어요. 치료사님 성에 차지 않으시면 무시하시면 되고요.”

“그분은 나이가 얼마나 되셨습니까?”

“시집가서 가정을 꾸려도 될 나이니까 염려 마세요.”

 

***

앓던 동안 단두대 악몽을 꾸지 않은 이유가 뭘까?

꾸다가도 금방 끝났던 이유는?


「폭군 니콜라이와 악녀 엘리자벳을 처형한다!」

꿈속에서 클라우디아가 외치는 그 순간, 어디선가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깨끗하게 빨아서 햇볕에 말린 이불처럼 포근하고, 깊은 계곡에 흐르는 물처럼 청명한 바람.

삼엄한 경비를 뚫고, 창문 걸쇠마저 여는 신비로운 바람.

그 바람이 내 이마를 부드럽게 더듬으면 악몽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곤 했다.

처음엔 그저 우연이라 생각했다.

라면 봉지에 다시마 두 개가 들어있거나, 내 걸음에 맞춰 신호등이 바뀌는 것처럼 드물지만 가끔 일어나는 행운이라고.

또다시 바람이 찾아왔을 때, 나는 세상에 반복되는 우연 따위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폐하셨군요.”

바람이 멈칫했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달빛을 등진 그림자만으로 충분했다.

터무니없이 넓은 어깨와 흰 셔츠 아래 감춰져 있는 탄탄한 근육이 손으로 만져지듯 선명했다.

코끝을 맴도는 청결하면서도 시원한 그의 체취.

열은 다 내린 줄 알았는데 또다시 혈관이 뜨거워졌다.


“깨운 건가?”

듣기 좋은 중저음이 미풍에 섞여들었다.

티를 내고 싶지 않은데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동시에 콧잔등이 시큰했다.


‘당신이었어. 매일 밤 악몽에서 구해주고, 단잠을 잘 수 있도록 지켜준 사람이.’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겨우 대꾸했다.


“아직 안 잤어요.”

“잘 자야 빨리 낫는다.”

“그동안 많이 잤어요. 폐하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침묵은 긍정이었다.

그의 입매도 눈빛도 모두 긍정이었다.

가슴 안쪽이 뻐근해질 만큼 행복감이 밀려왔다.

너무 행복해서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황제는 병문안을 가지 않는다는 규칙을 어긴 것보다, 니콜라이가 곁에서 긴 밤을 지새웠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악몽이 사라진 것도 신기해. 니콜라이한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가?’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밤바다에 하늘 모든 별이 쏟아져도 지금 내 마음처럼 환하지는 않을 터였다.


“잘 알지. 그대가 전 약혼자와 웃고 떠든 것도, 날 폭군 취급한 것도.”

니콜라이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나뭇가지 부러뜨린 게 폐하셨어요?”

“황궁을 무너뜨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폐하!”

“감히 칼을 선물하다니. 맹랑한 놈이야.”

어금니를 깨문 니콜라이의 눈에 흉흉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창밖에서 몰래 훔쳐보신 거예요?”

“그대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대화하고, 누구에게 미소짓는지 다 알아야겠다고 했을 텐데.”

“병자가 있는 곳에 계시면 안 되잖아요.”

“아무도 모르니까 괜찮다.”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시는데 어떻게 몰라요?”

니콜라이는 대답 대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뒷일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오만한 태도였다.


“사람들이 절 욕해요. 폐하께 병을 옮길지도 모르는데.”

“그대 때문에 관례를 어긴 게 처음도 아니다.”

“그러니까 더 문제죠.”

기껏 마음 써줬는데 타박하느냐고 구시렁댈 타이밍인데.

니콜라이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 말대꾸하는 걸 보니 이제 살 만한가 보군.”

“함구령을 어겼다고 치료사님 경을 치는 건 아니겠죠?”

“나도 여기 온 걸 들켜서 좋을 건 없으니까.”

“기쁘신 것 같아요.”

“미안하다. 놈…… 아니, 나 때문에 앓게 될 줄은 몰랐다.”

니콜라이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내가 없는 곳에서 더 오래 자책했을 그였다.

한껏 발랄한 어조로 대꾸했다.


“푹 쉬니까 좋던데요? 프란츠한테 시달릴 일도 없고.”

“일이 힘들면 새로운 선생을 찾아보마.”

“자꾸 그렇게 계약 위반하실 거예요?”

지난번 새 황비를 데려온 일을 에둘러 말한 거였다.

니콜라이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계약이란 말 자체가 낯선 모양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우리가 나누는 마음이 유혹게임과 무관하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몇 마디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고, 승리나 실패를 가리기도 어렵다는 걸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농밀해졌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은 조심스럽지만,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끈끈함이 늘 숨겨져 있다.

니콜라이가 내 이마에 손을 올리는 것만으로 말이다.


 


“열이 다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얼굴 전체를 가리고도 남을 커다란 손이 계곡물처럼 시원했다.

그 손에 뺨을 비비고 싶은 낯간지러운 욕심을 겨우 참았다.

가슴이 일렁이고, 눈앞이 아득했다.

전부 니콜라이 때문이라, 얼른 말을 돌렸다.


“상자 속에 든 게 뭐예요?”

“내 선물을 아직 열어보지 않았나?”

“깜짝 놀랐어요. 예상 밖의 물건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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