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그대가 너무 귀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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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그대가 너무 귀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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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그대가 너무 귀여우니까
2022.12.30.
선물상자엔 새까맣고 단단한, 씨앗인지 열매인지 모를 것이 들어있었다.
크기는 엄지손톱만 했다.
열매는 귀중한 보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 크기에 꼭 맞는 비단 쿠션에 고정되어 있었다.
흔들어봤자 아무 소리도 안 날 수밖에.
“왠지 좀 실망한 표정인데?”
니콜라이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짓궂게 물었다.
“설마요.”
“보석인 줄 알았나?”
반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잠깐은.
“그깟 보석, 발에 차일 정도로 많거든요?”
성급했던 마음을 들킬까 콧김을 흥, 내뿜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두 뺨마저 감출 수 없겠지만.
“이 열매는 세상 어떤 보석보다 귀한 거다.”
“뭔지 안 알려주실 거예요?”
“정원사에게 말해둘 테니 직접 심어봐. 싹을 틔우고 무성하게 자라면 가치를 알게 될 거다.”
초등학생 방학 숙제도 아니고.
키워야 받을 수 있는 선물이라니.
차게 식는 내 눈을 의식한 니콜라이가 덧붙였다.
“꼬치구이집을 기억하지? 결국 맛있게 먹었잖아?”
“당장 구워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인내심을 발휘해 봐. 그대는 키우는 것에 소질 있으니까.”
“폐하의 아드님 키우는 것 말인가요?”
니콜라이의 동공이 조금 커졌다가 이내 평소대로 돌아왔다.
아련한 그리움이 잠긴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그래, 내 아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이를 그대가 아주 잘 맡아 주고 있지.”
“…….”
“고맙다, 엘리자벳.”
툭, 심장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슴이 시려 와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버지로서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 왜 나는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진 것 같을까.
살갗이 벗겨지고 뼈가 으깨진 채 어두운 구덩이에 처박혀도 이토록 외롭지는 않을 터였다.
잠시 잊고 있었다.
니콜라이에게 아이를 가질 만큼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는 걸.
‘아버지가 아들을 소중히 여기고, 아들의 선생에게 감사하는 게 당연하지. 뭘 우울해하는 거야? 반지가 아니라서 실망이나 하고. 혼자 너무 앞서나가는 거 아냐?’
나는 연애 세포가 모자라도 너무 모자랐다.
사소한 행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마음 졸였다.
온몸을 떨도록 기뻐하다가, 버림받은 아이처럼 두려워했다.
일방적이고 못된 방식으로 날 압박하고, 선택을 강요했던 니콜라이를 용서하고 싶었다.
그를 탓하기보다 보듬어주고 싶었다.
내 손으로 구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황제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 나란 사실에 우쭐했다.
다른 여자들이 느끼지 못했을 승리감에 젖었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했을 거야.'
6년 전 사망한 라일라.
그녀가 누군지, 고향 어딘지, 어떻게 생겼는지, 심지어 몇 살인지 아무도 몰랐다. 원작에도 없었다.
라일라와 프란츠 출생에 관한 모든 것은 비밀에 부쳐졌다.
그녀와 어린 프란츠를 돌보던 사용인들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나도 금화 수천 개를 쓰고 라일라라는 이름만 겨우 알아냈을 정도였다.
‘달이 기울고 꽃도 시샘했을 만한 미녀였을까. 프란츠와 똑같은 벌꿀 색 금발을 가졌겠지? 대체 어떤 여자였을까…….’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귀한 법이다.
어린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등진 첫사랑이라면 더.
니콜라이가 수많은 황비를 거느리고도 황후를 두지 않는 것도 결국 라일라 때문일까?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도.
‘어쩌면 나 역시 그 방황의 일부일지도…….’
숨쉬기가 곤란했다.
녹지도 않고, 삼킬 수도 없는 뭔가가 목구멍에 걸린 듯했다.
죽은 사람을 질투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미련한 짓이 있을까.
영원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알면서 말이다.
“폐하의 아드님은 저 아니어도 잘 컸을 거예요. 표현은 서툴지만 솔직하고 영리해요.”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다행히 니콜라이는 나의 깊숙한 열패감을 눈치채지 못했다.
“난 그 애에게 상처만 주었다.”
“정말 그랬다면 프란츠가 폐하를 좋아할 리 없어요.”
“핀치가 날…… 좋아한다고?”
그가 쓴 물을 삼킨 사람처럼 미간을 좁혔다.
“설마 그것도 모르고 계셨어요?”
어쩜 부자가 이런 것까지 똑같을까.
프란츠는 아버지의 믿음을, 니콜라이는 아들의 사랑을 의심했다.
둘 다 하나뿐인 혈육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서로를 향한 애정이 너무 깊었던 때문일까.
둘은 늘 오해하고, 실망하고, 머뭇거렸다.
잘 보이고 싶어서, 잘해주고 싶어서.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혼자 속을 끓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모를 수밖에. 거금을 주고 고용한 선생이 앓아누웠으니.”
니콜라이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아픈 사람 핑계를 대다니, 비겁해요!”
“특훈 과외비 운운하며 신물을 뜯어간 게 누군데?”
“좀도둑처럼 몰래 드나들다 보니, 세상 사람들이 전부 도둑으로 보이시나 보네요.”
나는 무능력하고 불성실한 인간을 제일 싫어했다.
그런 취급받는 건 더 싫었다.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서 얼마나 애썼는데!
뭐, 항상 내 생명줄 연장이 우선이었지만!
“의심받기 싫으면 행실에 주의해야지.”
“제가 뭘 어쨌는데요?”
“유급 휴가 중에 전 약혼자 집과 웬 농장을 드나들지 않았나?”
니콜라이는 냉담할 정도로 무표정했다.
불끈 화가 치밀었다.
“네틀톤 후작저에 갔던 건 수잔 때문이었어요. 프란츠에게 먹일 보양제를 부탁했거든요.”
“…….”
“속 좁은 누가 또 뭐라 할까 봐 일부러 더글라스 님 없는 날을 골라서 갔고요!”
왜 변명하는지 모르겠지만,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농부 보리츠도 그날 처음 만났어요. 그 역시 일 때문이었어요.”
“퍽 다정해 보이던데?”
“설마 새로운 황비 마마와 말을 타신 폐하만큼 다정했을까요?”
이불을 홱 뒤집어쓰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지금 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분명 사납게 일그러졌을 터였다.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다.
질투처럼 들렸을까?
아, 쪽팔려.
“엘리자벳. 화났나?”
“화 안 났어요! 폐하께서 생명의 은인을 월급 도둑 취급한 것만 빼면요.”
가다듬지 않은 감정을 내비치는 건 불편한데.
니콜라이 앞에서는 왜 자꾸 울컥 아니면 벌컥 일까.
“제 고향에는 이런 속담이 있어요. 물에 빠진 사람 살려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
한동안 말이 없던 니콜라이가 손을 뻗어 내 어깨의 둥근 부분을 어루만졌다.
“엘리자벳.”
달래듯, 명령하듯 부드러우면서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기이한 힘이 있었다.
돌아보지 않겠노라고 다짐한 사람도 흘낏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날 제대로 봐라.”
“명령하지 마세요.”
“봐다오.”
“부탁도 소용없어요.”
“생명의 은인이 단단히 골이 났구나. 내가 큰 실례를 저지른 모양이야.”
웃음기가 섞인 한탄이었다.
살기등등한 눈으로 노려봤다.
니콜라이는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미안한데 어쩔 수가 없다. 그대가 너무 귀여우니까.”
자기가 말해놓고 니콜라이가 눈을 크게 떴다.
뿐만 아니었다.
뺨은 물론 귓바퀴까지 화르륵 달아올랐다.
‘얼굴이 붉어질 사람은 나 같은데. 왜 이 남자가 빨개지는 거지?’
큰 실수를 저지른 소년처럼 난처해하는 그를 보니 왠지 모를 자신감이 비어져 나왔다.
“제가 좀 귀엽죠. 폐하께서 속수무책 빠져들 만큼요.”
“내 말은 그게 아니고…….”
“귀엽지 않다는 뜻인가요? 빠져들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그것도 아닌데…….”
니콜라이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그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리며 바짝 마른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늘 자신만만하고 제멋대로인 남자가 잔뜩 당황한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한 번 더 놀려주고 싶었다.
그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만 인정하세요. 제게 유혹당하셨잖아요?”
오! 나 제법 하는데?
이 순간만큼은 모태솔로 유교걸이 아닌 진짜 팜므파탈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한순간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았다.
“인정하면 편해지는 걸까.”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내뱉고는 그가 다섯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쓸어내렸다.
“……!”
찌릿, 감전된 듯한 감각에 발끝을 오므렸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다른 간격으로 내달렸다.
그와 너무 가까웠다.
그의 입술도, 숨결도 마찬가지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타는 듯한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날 내려다보는 니콜라이.
검은 머리칼 때문에 더욱 짙어진 그늘.
그늘 속에서 더 뜨겁게 빛나는 눈빛.
요염한 팜므파탈은 다시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는 풋내기로 돌아오고 말았다.
“말해 다오, 엘리자벳.”
그의 손길이 이마에서 눈썹으로, 콧대에서 다시 입술로 옮겨갔다.
열꽃도 따라 움직였다.
어디서 천둥이 치는 걸까. 폭풍이 몰려온 걸까.
맥박이 관자놀이를 쾅쾅 울려댔다.
“패배를 선언하면 조금쯤 안심할 수 있을까.”
그가 꾹꾹 억누르며 내 입술을 핥듯 노려봤다.
온몸으로 노골적인 욕망을 내뿜으면서도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는 손길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그래서 닿을락 말락 가까워진 입술에 모른 척 눈을 감았다.
쏟아지는 숨결을 기다렸다.
이성을 뚝 떼어 먼 곳으로 던져버리는 열기를 기대했다.
“……?”
하지만 키스는 없었다.
속절없는 적막만 깊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올렸을 때, 니콜라이는 흐린 얼굴로 멀어지고 있었다.
“이만 돌아가마.”
심장이 철렁 주저앉았다.
내가 뭘 실수한 걸까? 괜한 말을 한 걸까?
묻고 싶었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니콜라이의 무표정은 완강했다.
어떤 물음도 소용없으리란 확신이 들 정도로.
“후궁에는 마음 두지 마라. 궁금해하지도 마라. 그대가 신경 쓸 만한 여인은 그 안에 없다.”
비밀스러운 말을 남기고 니콜라이가 떠났다.
나는 달빛 아래서 다시 웅크렸다.
막연한 두려움과 패배감은 현실이 되어 날 집어삼켰다.
‘그 여인은 당신 마음속에 있겠죠. 죄책감에 휩싸여 떠나야 할 만큼 커다란 존재로 영원히.’
***
감쪽같이 나았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황태자궁으로 출근했다.
며칠 더 쉬어도 괜찮았지만, 혼자 있으면 니콜라이가 자주 떠올라 괴로울 게 뻔했다.
“문병 선물을 줄게.”
프란츠가 불쑥 말했다.
프란츠의 수학 숙제를 도와주던 내가 눈썹을 찌푸렸다.
“다 나은 게 언젠데.”
“잔말 말고 받아. 황태자의 하사품을 받는 게 쉬운 줄 알아?”
“고마워서 어쩌나. 비싼 값에 팔아먹을 수 있겠네.”
“쉽지 않을 거야. 그림이니까.”
프란츠가 푸른색 종이와 갈색 리본으로 포장된 캔버스를 내밀었다.
“어젯밤에 완성했어.”
“고마워, 프란츠.”
“마음에 안 들면 버려도 돼.”
말은 저렇게 하지만 내 마음에 안 들까 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요즘 들어 쫑알거리는 꼬마 폭군이 귀여워 보였다.
프란츠는 딴생각에 잠길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고마웠다.
“엘리자벳을 떠올리며 그린 거야.”
“초상화야?”
“……뭐, 비슷한 거지.”
포장지를 뜯는 손이 바빠졌다.
엠스터 저택엔 원작 엘리자벳의 초상이 여럿 걸려 있었다.
엘리자벳의 자기애와 과시욕을 그대로 보여주는 초상화는 거대하고 호화스러웠다.
나도 진짜 내 초상이 하나쯤 갖고 싶었다.
몇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있는 게 괴로울 것 같아 관뒀지만 말이다.
‘프란츠 솜씨라면 멋진 초상화가 완성됐을 거야.’
하지만 나의 기대는 캔버스로 눈길을 옮긴 순간 와장창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