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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늑대가 그녀를 원한다 (36/97)


#36. 늑대가 그녀를 원한다
2023.01.03.



“이거 뭐야? 내 얼굴이 아니라, 늑대잖아!”

나도 모르게 빽 소리 질렀다.

화폭에는 사교계를 정복한 팜므마탈이 아니라, 화염처럼 새빨간 털을 가진 늑대가 담겨 있었다.

프란츠는 싱글거리며 그림을 손가락질했다.


“매서운 검은 눈이랑 무시무시한 입매가 엘리자벳이랑 똑같지?”

“뭐라고?”

“새빨간 털 좀 봐. 거울 보는 것 같지 않아?”

“빨간 늑대한테 물려봐라!”

 

 
프란츠의 허리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발버둥 치는 프란츠의 팔목을 왕, 깨물기도 했다.

제법 아플 텐데 프란츠는 옆으로 구르며 까르르 웃었다.

이 모든 게 재미난 장난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처음 만났을 땐 싸움닭 같았는데. 그때 찢어버린 그림도 늑대였잖아? 늑대를 정말 좋아하나 봐. 애들 취향은 정말…….’

프란츠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손의 상처도 거의 다 나았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모든 걸 의심해야 했던 소년의 표정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아이다운 순수함과 서늘함이 동시에 담긴 눈매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프란츠에게서 자꾸 니콜라이의 흔적을 더듬는 나 때문이었다.


“관두자. 애랑 싸우는 내가 바보지.”

흘러내린 머리칼을 가다듬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상화는 아니지만, 몹시 훌륭한 그림이었다.

붉은 늑대가 당장이라도 캔버스를 뚫고 뛰쳐나올 것 같았다.


‘10살짜리 아이가 그렸다는 게 믿기지 않아. 털도 한올 한올 그렸나 본데? 사진으로도 담지 못할 생동감이 느껴져. 늑대의 자유스러움과 야성미까지.’

독학으로 그린 것이 이 정도인데, 제대로 된 선생 밑에서 배우면 어떤 실력을 보여줄까?

상상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프란츠의 미술 교수로 초빙하려는 인물을 떠올리자 더욱 그랬다.

마침 프란츠가 물었다.


“엘리자벳. 미술 교수는 언제 오는 거야?”

“예술에 몰두하면 황태자로서 평판이 나빠질 거라며?”

“내가 워낙 순종적인 제자잖아. 그 문제도 해결해준다는 스승의 허풍을 믿는 거지.”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프란츠의 금발을 손으로 흐트러뜨렸다.

제 말이 퍽 재치 있다고 생각하는지 프란츠가 방울 굴러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조금 더 기다려주십시오. 흔한 교수가 아니라 초빙하기 어렵사옵니다.”

“누굴 데려오려고 그래?”

“오웬 블랙이라고 들어봤어?”

“블랙 백작가의 오웬 말이야? 신이 내린 화가, 그 오웬?”

숨 쉬는 것도 잊고 프란츠가 되물었다.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웬은 10대 초반 시절부터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로 이름을 날린 화가였다.

사물을 그대로 옮긴 것처럼 정밀한 표현과 꿈속 정원을 훔쳐보는 듯 몽환적인 색감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오웬의 그림은 대저택과 같은 값에 팔렸어. 초상화를 부탁하는 귀족들도 하늘의 별처럼 많았대.”

“아무나 그리지 않았을 텐데.”

“엘리자벳도 잘 아네? 모델이 마음에 안 들면 황족의 의뢰도 거절했대. 그래서 미움을 산 모양이야.”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우리 꼬맹이를 가르칠 수 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라는 눈으로 프란츠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오웬은 7년 전 반역으로 쫓겨났어. 블랙 백작가 전체가 몰락했다고!”

“그가 왜 반역 혐의를 받았는지 알아?”

“내가 아무리 똑똑해도 3살 때 기억은 없거든?”

“모두가 쉬쉬했지만 전대 황후의 초상화를 거절했기 때문이야.”

“또 페넬로페로군! 폐하께서 쫓아냈던 그 여자.”

떠올리는 것조차 기분 나쁘다는 듯 프란츠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카레스가 선물로 준 황실 연보가 떠올랐다.

니콜라이의 모후 브리짓다는 16년 전, 32세 나이로 병사했다.

선황은 황후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20살의 페넬로페를 새 황후로 들였다.


‘그때 니콜라이는 겨우 12살이었지. 젊은 새엄마를 마주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야. 폐위시킨 후 추방한 걸 보면 사이가 꽤 나빴던 모양이지?’

폐황후 페넬로페는 지금 워든의 안주인이었다.

제국에서 쫓겨나자마자 적국의 왕비가 되다니.

놀라운 수완과 대단한 실행력이었다.


‘클라우디아가 인테드 제도에 주둔한 이유도 워든 견제 때문이었어. 혁명의 명분도 워든이었지. 원작 니콜라이는 엘리자벳 치마폭에 빠져서 워든이 침략하든 말든 무관심했으니까.’

혁명을 막으려면 니콜라이가 국경을 적극적으로 수호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문제는 일개 교육담당관인 내가 참견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거였다.

니콜라이의 마음 역시 종잡을 수 없었다.

그는 꿈결처럼 달콤하게 굴다가 순식간에 얼어붙곤 했다.

한 뼘 정도 가까워진 줄 알았는데 몇 걸음 멀어지는 게 그 남자였다.

내 마음을 온통 헝클어놓고 견고한 성벽 너머로 돌아가 버리는 니콜라이.

나는 문밖에 홀로 남겨졌다.

곧 클라우디아가 니콜라이의 목을 가지러 올 텐데.

내 목숨도 장담할 수 없는데.

니콜라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나도 말해줄 수 없었다.

그저 마음 졸이며 한 쌍의 단두대를, 나와 동시에 목숨을 잃는 한 남자를 염려할 뿐이었다.


‘일개 평민 주제에 황제 걱정하느라 잠을 설치고, 국방 문제까지 참견하려 들다니. 개가 웃지 않으면 다행한 일이네.’

고소를 삼켰다.

프란츠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페넬로페라면 죄 없는 화가에게 반역죄를 씌우고도 남지. 워든이 하트만을 넘보는 것도 전부 그 여자 때문이야.”

“맺힌 게 있나 보네?”

“원수는 잊지 못하는 법이지.”

“폐넬로페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말하고 싶지 않아.”

프란츠의 연두색 눈동자에 아이답지 않은 기운이 어른거렸다.

저 살기. 니콜라이와 똑 닮았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


“오웬 블랙은 교수형을 면한 대신 북부 탄광으로 끌려갔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프란츠가 투덜거렸다.

괜한 기대심을 불어넣은 내가 원망스럽다는 투였다.

하지만 실망하긴 이르다는 걸 프란츠는 몰랐다.

원작을 낱낱이 알고 있는 스승이 있다면 더더욱.


“오웬을 네 미술 교수로 만든다면. 내게 뭘 해줄래?”

모든 스승이 대가를 요구하지 않겠지만, 프란츠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반역자를 복권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귀족원에서 생난리를 칠 거라고.”

“내가 그런 거 신경 쓸 것 같아?”

“너무 신경을 안 써서 문제지. 요즘 엘리자벳 평판이 어떤지 모르지?”

“관심 없다고 했잖아. 나는 우리 황태자 전하를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어.”

따지고 보면 거짓말은 아니었다.

황실을 지켜야만 프란츠의 미래도 보장되는 것 아니겠는가?


‘보리츠에 이어 오웬까지 손에 넣으면, 클라우디아의 동료 2명을 빼앗는 거야. 혁명을 일으킨다 해도, 원작처럼 간단히 성공할 수 없다는 거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프란츠는 두 손을 모으고 자신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참 스승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께서 서신을 전하라 명하셨습니다.”

시종이 내민 것은 손바닥 반 크기의 황금색 편지 봉투였다.

자주색 밀랍에 황제를 상징하는 세 개의 검과 심장 문장이 찍혀 있었다.

태연하려 했지만, 인장을 뜯는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니콜라이가 편지를 보낸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

굵은 땀방울이 니콜라이의 눈을 찔렀다.

검은 머리칼은 물론 연무복도 땀에 흠뻑 젖었다.

미끈거리는 손아귀에서 검이 떨어지려 할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땀과 함께 모든 걸 쏟아내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가자, 블랙윙.”

니콜라이가 어릴 때부터 손수 여물을 먹였던 흑마를 달랬다.

블랙윙은 몇 시간째 이어지는 훈련을 잘 따라주고 있었다.

흙을 걷어차며 저항할 법도 한데 주인의 복잡한 심경을 이해한다는 듯 묵묵히 순종했다.


“하압!”

우렁찬 기합과 니콜라이가 검을 휘둘렀다.

갑옷을 입은 목각인형이 두 동강 났다.

견습 기사들이 달려와 부서진 목각인형을 치우고, 새로운 인형을 세웠다.

벌써 수십 개째.

황제의 기마 훈련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대련을 원하는 기사가 없단 말인가?”

목각인형으로 만족하지 못한 니콜라이가 기사단장을 노려봤다.

예순을 바라보는 노기사는 젊은 황제의 패기가 두려우면서도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맨손 대련도 하셨고, 검도 겨루셨습니다. 그런데 또 기마 경기를 하시겠다니요?”

“당분간 기마 훈련에 집중할 생각이다.”

“기사들은 물론 블랙윙도 많이 지쳤습니다. 폐하께서도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검을 내려놓는 순간, 엘리자벳에게로 달려갈 것이 뻔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이성을 잃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녀의 달콤한 체취에 취할 테고, 끓어오르는 욕망을 감추지 못할 거였다.

약해진 정신력을 틈타 또다시 늑대가 속삭이겠지.


「좋아, 니키. 얼른 갈증을 풀자고.」

그녀에게 키스하려던 순간, 늑대가 속삭였다.

까마득한 현기증과 함께 낭패감이 밀려들었다.


「뭐해? 엘리자벳이 기다리고 있잖아?」

호수에 빠지던 그 날도 그랬다.

늑대는 니콜라이를 통해 그녀의 향기를 탐닉하려 했다.

통제의 틈을 비집고 아무 때나 튀어나오는 것도, 제 감정에 자꾸 끼어드는 것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키스해, 니키. 그녀도 바라잖아!」

늑대를 멈추고 싶었다.

무슨 방법이든 써야 했다.

비겁하다는 걸 알면서도 물속으로 도망쳤다.

엘리자벳이 절 구하기 위해 뛰어들 줄은 몰랐지만.


‘엘리자벳……. 그대를 독점하고 싶다. 그대의 모든 걸 홀로 소유하고 싶어.’

피가 터지도록 입안 쪽 살을 베어 물었다.

이 마음은 오로지 제 것이어야 했다.

요망하고 무례한 늑대를 더는 용서할 수 없었다.

부황의 유언은 그녀를 미행하는 순간 잊었다.

황제로서의 책무도, 권위도 내버렸다.

엘리자벳이 좋았고, 그녀를 원했다.

다만 늑대의 힘을 빌리는 대가로 인내해야 했던 굴욕을 엘리자벳과 닿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지긋지긋한 늑대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황위와 함께 프란츠에게 물려주는 것뿐이었다.

수백 개의 칼날이 심장을 찔렀다.

라일라에게 프란츠를 지켜주겠노라 다짐했다.

이 아이를 가장 고귀한 자리에 올리겠다 맹세했다.

과연 그것이 프란츠를 위한 선택일까?

눈부시게 빛나는 왕관은 호화스러운 껍데기에 불과했다.

까마득히 높은 황좌도 심장을 짓누르는 족쇄나 다름없었다.

권모술수와 아귀다툼이 난무하는 황궁에서 홀로 버티며, 여신의 늑대에게 휘둘리는 삶.

그 저주받은 운명을 물려준다면 프란츠는 불행해질 거였다.

프란츠가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확신으로 바뀌었다.

기사단장이 끝나지 않을 상념을 흔들어 깨웠다.


“폐하. 알현 요청이 있습니다. 어찌할까요?”

니콜라이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늘이 일순 걷혔다.

어둑하게 짓눌렸던 마음 역시 갓 떠오른 태양처럼 환해졌다.


‘엘리자벳이 내 초대에 응해줬구나……!’

초대장에 연무장으로 와 주길 바란다고 썼다.

하지만 정말 와 줄 줄은 몰랐다.

그녀의 입술을 외면했다.

또다시 실망을 안겼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려 하고 있었다.

니콜라이가 준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뭣들 하느냐? 여기 위험한 것들 냉큼 다 치우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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