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너구나? 잘 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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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너구나? 잘 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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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너구나? 잘 걸렸어!
2023.01.06.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기사단장이 미간을 좁혔다.
“무엇을 치우란 말씀이십니까, 폐하?”
“널브러진 병장기와 부러진 나무 조각들 말이다. 행여라도 잘못 건드리면 다치지 않겠느냐?”
“아? 예…….”
기사단장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니콜라이 말대로 연무장엔 위험한 것투성이였다.
모두 황제가 조금 전 부수거나 내팽개친 것들이었지만.
명령으로 안심할 수 없는지 니콜라이가 직접 시종들을 지휘했다.
“서둘러라. 행동이 너무 굼뜨구나.”
“예, 폐하!”
“연무장이 이토록 너저분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훈련에 방해되니 얼쩡거리지 말라고 하셔서…….”
“잔말 말고 빨리 해라.”
니콜라이가 손뼉을 치며 재촉했다.
시종들은 억울하다는 내색도 못 하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손님은 어디 있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들라 하라. 아니, 내가 직접 맞겠다.”
잠깐 사이 손님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니콜라이가 연무장 입구로 다가갔다.
소년처럼 설레어 걸음을 재촉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땀이라도 씻을 걸, 옷이라도 갈아입을 걸, 후회도 했다.
‘왜 엘리자벳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 걸까? 땀 냄새와 쇠비린내 때문인가?’
의아함이 불길함으로 바뀔 즈음 문을 열었다.
알현을 청했던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토록 환영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폐하!”
허연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브렌든 후작이 껄껄 웃었다.
그 뒤로 4명의 황비를 배출한 명문가 당주들이 보였다.
리먼 공작, 파이프 후작, 블랙폴드 백작은 물론 그들의 자식들까지 줄줄이 딸려 있었다.
엘리자벳이 아니라, 열댓 명의 불청객이라니.
니콜라이의 아름다운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대들이 여긴 어인 일인가?”
“쫓겨날 각오 중이었는데 황공하옵니다, 폐하.”
“허락도 없었는데 왜 왔느냐 묻지 않는가!”
가다듬지 않은 살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기세에 눌린 귀족들이 움찔 물러섰다.
속사정을 모르는 그들은 알현을 허락한 황제가 왜 노여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떼로 몰려와서 시위라도 할 참인가?”
“허허. 소신들이 감히 그럴 리 있겠습니까.”
찌를 듯한 긴장감과 흉포한 기운에도 불구하고 당주들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명문가 수장으로서 젊은 황제의 기백에 눌릴 수 없다는 투였다.
그들의 아들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눈치 보기 바빴다.
“빨리 말하라. 수련하던 중인데 귀찮게 하지 말고.”
분위기를 풀려는 당주들의 의도와 달리 니콜라이의 눈빛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
긴장한 표정으로 브렌든 후작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폐하를 알현코자 한 까닭은 위대한 제국과 황실을 위해 충언을 드리고자 함입니다.”
“브렌든 후작. 쓸데없는 이야기 집어치우고 용건을 말하라.”
“흠흠.”
“용건이 쓸데없으면 지금 당장 꺼지고.”
니콜라이가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자존심을 구긴 귀족들이 시선을 교환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신하들의 심기 따위 배려하지 않는 군주임은 알았지만, 니콜라이가 오늘처럼 날카롭게 굴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현실도 아닌 연무장으로 몰려오다니. 무슨 이야기를 할지 뻔하군.’
브렌든 후작의 말은 니콜라이의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세간에서 폐하를 둘러싼 온갖 낭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뢰기 어려우나, 천한 신분의 여인이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활개를 친다는 소문입니다.”
“오, 그러한가?”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던 황제가 덤덤하게 답하자, 귀족들은 오히려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신임하시던 검술 교관이 하루아침에 쫓겨나지 않았습니까? 황실에 충성을 바쳐온 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깟 일에 떨다니, 그런 충성이 어디 있단 말인가.”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쫓겨난 교관이 그대의 아들이라 하는 말은 아니겠지?”
“폐, 폐하. 물론입니다.”
브렌든 후작이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른 당주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폐하께서 관례를 깨고 그 여인을 간호하셨다는 허튼 말도 돌고 있습니다.”
“돌림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평민이 황태자 전하를 교육하다니…… 참으로 당치 않은 일입니다.”
“그 여인이 미인계로 궁인들을 갈라친다고 합니다. 그 여인을 편드는 궁인들과 정신이 제대로 박힌 궁인들이 패를 갈라 싸운다는 소문이 파다하옵니다.”
꼿꼿한 자세의 리먼 공작만이 한 발짝 뒤에 서 있었다.
귀족들이 떠드는 모양새를 듣고 있던 니콜라이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한마디로 천한 여자 하나가 황실을 어지럽힌다는 뜻인가?”
정곡을 찔린 귀족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도 잠시, 황제의 무표정한 얼굴에 용기를 얻은 듯 엘리자벳을 비토하기 시작했다.
“송구하옵니다만 황비 마마들도 폐하와 황실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황비 책봉도 받지 못한 미혼 여성이 황궁을 활보하는 것만으로도 법도를 크게 거스르는 일입니다.”
“본디 행실 나쁘기로 유명한 여자입니다. 당장 그 여인을 내치셔야 합니다.”
니콜라이가 한쪽 손을 올렸다.
황제의 기품이 느껴지는 유려한 몸짓이었다.
말투는 정반대였지만 말이다.
“개소리 그만하라.”
“폐, 폐하!”
“그대들이 지금 무어라 떠들고 있는지 아는가?”
“소신들은 오로지 충심으로…….”
“여인에 홀린 황제가 나라를 망친다고 욕하는 것 아니더냐?”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리먼 공작을 제외한 귀족들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니콜라이의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빛을 피할 수 없었다.
“황제의 말이 천부당만부당해?”
“폐, 폐하!”
“날 폭군 취급한 게 아니라고?”
“하늘에 맹세코 그런 적 없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그대들의 주인이 될 자격조차 없다는 뜻인가?”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오직 폐하만이 저희의 주인이며, 제국의 하늘이십니다!”
“그대들이 진정 내 충성스런 신하라면 왜 주인의 사생활을 감시하며 참견들을 하는 것인가?”
니콜라이가 준엄하게 물었다.
다들 입술만 떨 뿐 대답하지 못했다.
“감히 종 주제에 황제의 행실을 거론하다니……. 죽음으로 죄를 물어 마땅하지 않겠는가?”
니콜라이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검날이 자신들을 향했을 때야 귀족들은 일이 뭔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충신이라면 개떼처럼 몰려들어 왈왈 짖어댈 것이 아니라, 주인의 깊은 뜻을 헤아리려 해야 마땅할 텐데.”
“소신들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아직도 변명이 남았다니 용기가 참으로 가상하다!”
피식, 니콜라이가 냉소를 흘리며 브렌든 후작의 어깨에 검을 올려놨다.
검날로 톡톡 살집이 두툼한 목을 건드리기도 했다.
“오늘 일은 그대가 주도한 것 같으니 말해보라.”
“소신은 초대 황제께 신물을 하사받은 가문의 당주이옵니다!”
“자랑스럽게 여겨. 그 덕에 지금껏 목이 붙어 있었으니까.”
“흐아악!”
브렌든 후작이 체통을 잊고 비명을 질렀다.
그때 뒤에서 맑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손님들께 장난을 그리 치시면 어찌합니까?”
니콜라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선홍색 머리칼.
누구라도 한 번쯤 돌아볼 수밖에 없는 화려한 미모.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빛무리를 불러오는 여인이 그를 향해 흰 웃음을 짓고 있었다.
***
‘이 꼴을 보라고 초대한 거야? 연무장은 처음이라 기대했는데…….’
허탈함을 숨기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니콜라이는 유력 귀족의 당주에게 검까지 겨누었다.
호사가들이 물고 뜯고 씹으며 즐길만한 스캔들이었다.
영악한 니콜라이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알면서도 내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그리 나선 거였다.
‘발등에 떨어진 불만 끄고 사느라 신경 쓰지 못했어. 이런 소문이 돌고 있다니.’
솔직히 충격이었다.
나름 현명하게 처신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나는 원작 엘리자벳과 똑같은 악녀일 뿐이었다.
어떤 선의를 지녔든, 무슨 결과를 내든 상관없었다.
그들은 내가 프란츠를 지켰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제 권력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이들은 벼룩만 한 틈을 파고들어 헐뜯기 바빴다.
내가 명문가 영애였대도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모든 것을 가진 엘리자벳이 왜 신분 상승에 연연했는지 조금쯤 이해될 것 같았다.
황궁은 하나의 도시나 다름없었다.
넓디넓은 황궁에서 나는 카나리아 방, 황태자 궁, 도서관만 오갔다.
황태자 궁 사용인들은 내가 새로 채용한 사람들이었다.
카나리아 방 소속 궁인들은 니콜라이에게 특별 정신교육을 받았다고 들었다.
도서관 사서나 경비병은 하나뿐인 방문객에게 무관심했다.
어디에도 날 깔보는 사람은 없었다.
알량한 신분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적도 없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저 내가 보고 싶던 면만 봐 왔던 것이다.
니콜라이의 완벽한 보호 아래.
‘니콜라이가 나 때문에 더 폭군으로 매도당하는구나. 귀족들이 연무장까지 쳐들어올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을 줄이야…….’
하지만 내가 누군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나대는 팜므파탈 아닌가?
날 악녀로 본다면 그 기대에 부응할 수밖에.
“이분들은 폐하의 유머 코드를 잘 모르십니다. 오해하실 수 있으니 검은 거두어주시는 게 어떨지요?”
붉은 입술을 나풀거렸다.
태연한 내 모습에 니콜라이가 안도하는 것 같았다.
검을 들고 있다는 걸 지적받고 흠칫 놀라기도 했다.
서둘러 검을 갈무리하는 황제와 제국을 호령하는 대귀족들을 앞에 두고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나.
이 또한 명문가 귀족들이 아니꼽게 볼 만한 상황이었다.
“당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오.”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 철없는 여인이 함부로 끼어들다니. 쯧쯧.”
“당신의 행동이 폐하를 더 욕되게 한다는 걸 기억하시오.”
그들이 니콜라이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면 더 험한 소리가 난무했을 것이다.
그때도 나는 환하게 웃었겠지만.
“천금과도 같은 충고 감사히 듣습니다.”
“알아듣는다니 그나마 다행이군.”
“저도 한 말씀 올릴까 합니다.”
“?”
“다들 내로라하는 충신이시니, 폐하의 옥체가 얼마나 귀중한지도 아시겠지요.”
당연한 말을 뭐 하려 하냐는 듯 당주들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들의 아들들은 대놓고 코웃음 쳤다.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오직 리먼 공작뿐이었다.
“연무장은 폐하께서 옥체를 단련하시는 곳입니다. 이곳까지 찾아와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이 충신의 도리라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릴 비꼬는 것이오?”
“눈치를 채셨습니까?”
“뭣이?!”
“저는 어린 여성에 불과합니다. 그래요. 천한 데다 철모르는 여자 하나 쫓아내는 게 이리 위중하고 긴급한 일인 겁니까?”
“저, 저런……!”
“귀족원을 대표하는 원로들께서 입을 모아 말씀하시니, 제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 같군요.”
“…….”
“거물 취급을 해주시니 저도 앞으론 섭섭함이 없도록 대접해드릴까 합니다.”
분노가 일었지만, 말투와 자태만은 공손하고 우아했다.
이 이상은 참지 않겠단 뜻도 확실히 전했다.
날 바라보는 니콜라이의 눈빛에 잔잔한 자긍심이 일렁였다.
하지만 개들이 떼로 몰려들면 꽁무니를 빼야 할 때를 모르는 얼뜨기 개도 있는 법이다.
“어디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가? 누가 천출 아니랄까 봐, 싸구려 티를 내지 못해서 안달이로군!”
브렌든 후작이 퉁방울눈을 부라리며 허연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네놈이 오늘의 주동자로구나.
잘 걸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