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악녀의 지혜 (38/97)


#38. 악녀의 지혜
2023.01.10.



“후작 각하야말로 언사에 주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소를 거두고 싸늘하게 일갈했다.

기품도 상대방이 예의를 갖췄을 때의 이야기였다.


‘자기가 무슨 잘못을 하는지도 모르겠지. 참교육을 해줘야 정신을 차리려나? 이참에 브렌든 후작가를 아주 없애?’

빵빵한 재력에, 원작 정보를 가진 나에게 귀족 가문 하나 몰락시키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두룩한 악행의 증거들을 당장이라도 줄줄 외울 수 있었다.

마성을 사용하면 더 쉬웠다.

단두대 엔딩과 영혼 소멸 엔딩을 피하려 내버려 뒀을 뿐.

하지만 대놓고 이런다면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저울질을 하는 줄도 모르고 브렌든 후작이 큰소리쳤다.


“폐하의 총애가 영원할 줄 아느냐? 꿇어 빌지는 못할망정 이 무슨 망발이냐?!”

초면에 막말이네?

하여간 무례한 인간들 하는 짓은 한국이나, 이 세계나 똑같단 말이지.

한숨을 삼킨 후 대꾸했다.


“저는 황태자 전하의 교육담당관입니다. 걸맞은 예우를 부탁드립니다.”

“경박한 몸뚱이로 따낸 번드르르한 허울이지!”

반사적으로 니콜라이를 돌아봤다.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가 자랑하던 인내심도 바닥이 난 게 분명했다.

검 자루를 쥔 손등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도드라졌다.

구릿빛으로 보기 좋게 그을린 팔이, 그의 분노를 드러내듯 여러 갈래로 꿈틀거렸다.

브렌든 후작을 제외한 귀족들의 낯빛이 노래졌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일부러 그러는 거야? 니콜라이를 자극하려고?’

나 역시 계속 날 모욕하는 놈에게 쓴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니콜라이가 폭군이라 불릴 명분을 주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니콜라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각하. 지금 하신 말씀에 책임을 지실 수 있겠습니까?”

 

 
브렌든 후작은 내 행동이 자신을 보호한다는 것조차 몰랐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무슨 책임을 져야 하나?”

“저 역시 봉록을 받고 소임을 다하는 궁인입니다.”

“분수를 모르고 허튼짓이나 일삼는 천한 여자가 아니고?”

니콜라이가 흉악한 살기와 세상 만물을 얼려버릴 냉기를 동시에 뿜어냈다.

위험한 짐승이 깨어나지 않도록 그를 돌아보았다.


‘맡겨줘요.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니콜라이의 미간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눈빛만으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있었다.


‘내게 맡겨라. 깔끔하게 죽여버리겠다.’

얼른 마무리하지 않으면, 황제가 브렌든 후작을 죽였다는 소식이 제국을 뒤덮을 터였다.

이 상황에서도 나는 요염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스승이라 부르는 절 싸구려 작부 취급하시는군요.”

“처지를 제대로 알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실력으로 이 자리에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천하게 굴러먹던 것이 폐하의 비호 없이 뭘 한다고!”

브렌든 후작은 이 자리에 니콜라이가 있다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시몬이라는 자가 아비를 찾아가 징징거렸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나쁠 것 없었다.


“쫓겨나신 전 검술 교관과 겨뤄 능력을 입증하겠습니다.”

“내 아들과? 겨룬다고? 으하하하!”

“시몬 경이 승리한다면 공직을 내려놓고 황궁에서도 사라지도록 하지요.”

“그거 좋군!”

“각하께선 무엇을 내놓으시겠습니까?”

날 쫓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 브렌든 후작이 흥분했다.


“내 재산의 반을, 아니 전부를 주마!”

“전 재산을 거시다니. 자신감이 상당하시군요.”

“목을 걸어도 좋다! 시몬이 너 따위에게 패할 리 없으니까!”

“각하의 목 같은 건 제게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뭐라?!”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그저 상인의 계산이었을 뿐이니 용서 바랍니다.”

내 사과가 브렌든 후작의 속을 뒤집어 놓았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라고 자극한 거였으니까.


“천한 계집이 날 능멸해? 뻣뻣한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겠다!”

“시몬 경이 승리한다면 뜻대로 될 겁니다. 패한다면 전 재산을 주셔야 하지만요.”

“사내대장부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할 것 같으냐?!”

“일방적인 계약은 불공정의 소지가 있으니, 저도 전 재산을 걸도록 하죠. 엠스터 상단의 상속녀로서.”

충격과 경탄 어린 헛바람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귀족들은 탐욕으로 벌게진 눈을 좌우로 굴렸다.

내 재산을 벌써 손에 넣기라도 한 것처럼 브렌든 후작이 박장대소했다.


“으하하! 나중에 딴말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

“저 또한 드리고픈 말씀입니다.”

“이것이 감히……!”

“거액이 걸린 내기에는 신뢰할 만한 심판이 필요한 법이지요.”

“누굴 심판으로 삼겠다는 거지?”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손으로 니콜라이를 가리켰다.


“공명정대한 황제 폐하께 심판을 부탁드릴까 합니다.”

 

***

브렌든 후작을 뺀 나머지 명문가 당주들이 살롱에 모였다.

신사들을 위한 최고급 살롱은 짙은 갈색 가죽 소파와 크리스털 촛대, 명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둥근 떡갈나무 테이블에 둘러앉은 당주들이 술을 홀짝이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내가 먼저 나섰어야 했는데. 아까워죽겠군.”

열 손가락에 보석 반지를 낀 파이프 후작이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작고 깡마른 블랙폴드 백작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브렌든 후작이 엠스터 상단의 재물을 독차지하게 둘 수는 없소.”

작위는 다르지만 오랜 시간 4대 명문가의 일원으로 제국을 호령해 온 그들은 편히 사담을 나누는 사이였다.

리먼 공작은 오늘도 말수가 적었다.


“고리대금에, 금광까지 독점한 브렌든 후작이 엠스터 상단마저 거느리게 된다면, 제국의 돈줄은 모조리 틀어쥐게 될 것이오.”

파이프 후작이 단숨에 술잔을 들이켰다.

블랙폴드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뿐이겠소? 대놓고 하트만의 심장을 노리겠지!”

“로즈 황비는 기품이 몹시 부족한 데다, 식탐만 많기로 유명한데……. 브렌든 후작가에서 황후가 배출되는 것만은 막아야 하오.”

파이프 후작이 구시렁댔다.

명문가 황비 중 가장 정숙하다는 평가를 받는 엠마의 아버지다운 말이었다.

블랙폴드 백작도 지기 싫다는 듯 덧붙였다.


“황후가 되려면 지혜와 학식을 갖춰야지, 안 그렇소?”

블랙폴드 백작의 딸 신시야는 독서와 토론을 즐기는 명석한 여인이었다.

가장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프레이야 황비의 아버지, 리먼 공작은 한마디도 거들지 않았다.

보다 못한 블랙폴드 백작이 물었다.


“리먼 공께서는 염려되지 않으시오?”

“염려되오.”

“우리가 힘을 합치면 브렌든 후작가가 엠스터를 집어삼키는 걸 막을 수 있을 것이오.”

“브렌든 공이 전 재산을 잃을까 염려된다는 뜻이었소.”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상대는 반반한 얼굴 말고는 볼 게 없는 계집이거늘!”

블랙폴드 백작은 물론 파이프 후작도 목소리를 높였다.


“시몬은 유능하고 똑똑한 젊은이요. 브렌든 공이 다른 건 몰라도 후계자 하난 잘 뒀지!”

“바느질이나 꽃꽂이로 경기를 한대도 시몬이 이길 것이오. 껄껄!”

“공들은 정말 엘리자벳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로만 보이시오?”

리먼 공작이 무표정한 얼굴로 블랙폴드 백작과 파이프 후작을 바라봤다.


“지략이 뛰어난 여인이오. 평범한 여자였다면 교육담당관이 아니라 냉큼 황비가 되었을 것이오.”

“그건 또 무슨 뜻이오?”

“책봉을 받았다면 우리 여식들 눈치 보느라 운신이 어려웠을 게요. 지금처럼 황궁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겠지.”

“설마. 그런 생각까지 했겠소?”

“엘리자벳은 이미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았소.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이 아비의 마음이고.”

“리먼 공 말씀대로라면 무시무시하게 영리한 여자로군.”

“이번 내기, 왠지 엘리자벳이 이길 가능성이 크다고 보오. 애초에 질 싸움을 걸 여자가 아니오.”

그것만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파이프 후작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브렌든 후작가가 좀 처지긴 하지만, 4대 명문가의 일원이오. 그 천한 계집에게 호락호락 당할 리 없소!”

“파이프 공. 우리가 폐하를 찾아간 이유를 기억하시오?”

“브렌든 공이 바람을 넣었잖소? 후환이 될 수 있는 악녀를 쫓아내자고.”

“그 목적은 달성했다고 보시오?”

“크흠. 내기 때문에 미뤄진 것뿐이오. 시몬이 승리하면 모든 게 깔끔해질 것이오.”

“그리 간단하지 않아졌소.”

리먼 공작이 고개를 무겁게 가로저었다.

파이프 후작과 블랙폴드 백작은 멍하니 그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 되었다면 폐하께선 퍽 곤란하셨을 것이오. 엘리자벳을 출궁시키진 않아도 지금처럼 대놓고 특별대우를 하진 못했겠지.”

“그건 그렇지만…….”

“갑작스러운 내기 때문에 분위기가 바뀌었소. 승패가 결정될 때까지 아무도 엘리자벳의 거취를 거론할 수 없을 것이오. 만에 하나 엘리자벳이 승리한다면?”

“그건 불가능하잖소!”

“엘리자벳은 우리가 이렇게 확신할 것까지 계산했을 거요.”

리먼 공작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파이프 후작과 블랙폴드 백작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시몬이 패배하면 엘리자벳은 천문학적인 재산을 얻게 되오. 동시에 명문가 귀족들이 다시는 반기를 들 수 없는 존재가 되오. 이 의미를 모르겠소?”

“리먼 공. 그 여자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아니오?”

“설령 시몬이 승리한다 해도 새로운 분란의 시작일 것이오. 지금도 브렌든 후작가를 견제하며 그의 재산을 나눠 먹으려 작당들을 하고 있으니까. 여기 계신 공들부터.”

리먼 공작의 차가운 분석에 두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알면 알수록 무서운 여자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오?”

“제거하는 게 가장 좋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간 되레 당할 것 같소.”

“허허. 걱정이 지나치신 듯 하오, 리먼 공.”

엘리자벳을 얕보던 파이프 후작이 말했다.

블랙폴드 백작도 동의했다.


“날고 기어봤자, 고작 평민 계집에 불과하오. 그깟 게 정예병 수천, 수만을 거느린 우리를 어찌 당하겠소?”

“어허, 공! 말조심하시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오?”

천기누설이라는 듯 파이프 후작이 입술에 손가락을 세웠다.

리먼 공작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어디까지나 사견일 뿐이니.”

블랙폴드 백작과 파이프 후작이 마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우리가 시몬을 돕는다면, 욕심 많은 브렌든 후작도 입을 닦지는 못할 것이오.”

“엘리자벳이 패하도록 손이라도 쓰겠다는 뜻이오?”

“리먼 공께서는 구경만 하시오. 잔꾀를 부리다 목이 부러진 암탉을 보게 될 터이니.”

 

***

다음 날 밤 니콜라이가 카나리아 방을 찾아왔다.

이번에도 창문을 통해서였다.

설마 프란츠가 개구멍을 알려준 건 아니겠지?


“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그는 화가 난 것 같았다.

읽던 책을 덮고 달빛을 등진 그를 빤히 바라봤다.


“허락도 없이 그런 위험한 내기를 걸다니. 제정신인가?”

“폐하께서 살인자가 되는 걸 막았을 뿐이에요.”

“그대에게 그런 부탁은 하지 않았다.”

“생명의 은인이 명예까지 지켜드렸는데 고맙단 인사도 없어요?”

짙은 눈썹을 잔뜩 구긴 니콜라이가 돌아보며 대꾸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