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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이미 졌다 (39/97)


#39. 이미 졌다
2023.01.13.



“내가 놈을 죽이기라도 했을 거란 말인가?”

“아니라고요? 농담 그만 하세요. 재미없어요.”

선명한 살의를 코앞에서 목격했다.

내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브렌든 후작은 그 자리에서 두 동강이 났을 거였다.

니콜라이의 검술을 고려하면 깍둑썰기를 당했을지도 몰랐다.

그 뒤엔 대환장 파티가 이어졌겠지.


“재판 없이 명문가 당주를 즉결 처형하는 건 폭군이나 하는 짓이에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주물렀다.

니콜라이가 냉소를 머금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비난에 매우 익숙하다.”

“죽어 마땅한 사람을 죽이는 건 저도 찬성이에요.”

“모처럼 나와 생각이 맞는군.”

“하지만 그 뒤에 난처해질 제 입장은요?”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폐하는 그래서 문제예요.”

“……뭐?”

“고작 저를 모욕했다고 폐하께서 후작을 죽여봐요. 지상최대 악녀가 제국을 삼켜버렸다! 난리가 날걸요? 폐하의 별명도 카사노바 황제에서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바뀌겠지요.”

따박따박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프란츠보다도 말귀가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상관없다.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테니까.”

이 역시 진심이라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금까지 제가 하는 말을 듣긴 하신 거예요?”

“들었고, 또 감탄했다.”

“네?”

“그대는 진정 지혜로운 여인이다. 임기응변도 뛰어나고, 배짱도 두둑하지. 남자였다면 내 휘하에서 제국군을 지휘하라고 권했을 것이다.”

날 바라보는 니콜라이의 눈동자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버터와 설탕을 발라 구운 토스트에 꿀을 뿌리고 생크림을 듬뿍 올린 것처럼 달콤하기도 했다.

그는 예전보다 뻔뻔스러워졌다.

노골적인 칭찬을 하면서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난 칭찬 받는 거에 익숙하지 않은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칭찬해주는 사람이 세계관 최고 미남이라면?

그 미남이 내 명예를 위해서 살인도 불사하겠다면?

괜스레 붉어진 뺨에 손부채질이나 하는 수밖에.


“여인도 군대를 지휘할 수 있어요.”

나의 최애 클라우디아처럼.

쌉싸름한 통증이 가슴에 번졌다.

니콜라이는 그녀를 소환했다.

클라우디아는 부재중 경계를 미리 강화한다는 구실로 인테드 제도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미 수도에 입성해 빈민가를 잠행 중이라는 사실을.


“물론이다. 제국군에도 아주 훌륭한 여기사가 있지.”

니콜라이는 클라우디아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자세한 내막은 묻지 않지만, 내가 그녀를 두려워한다는 걸 아는 까닭이리라.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한편으론 영원히 털어놓지 못할 비밀 때문에 돌덩이를 삼킨 듯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그대는 기사가 될 수 없다. 장군도 마찬가지다.”

“왜요? 폐하의 아드님을 키워야 하니까요?”

왜 나는 이딴 말로 분위기를 망치는 걸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후회를 곱씹는 내 머리 위에 니콜라이가 커다란 손을 얹었다.


 


“아니. 이 카나리아 방에서 날 기다려야 하니까.”

“!”

“그대는 지금처럼 안전하고 안락한 곳에 머물러 줬으면 해.”

“폐하…….”

“그대를 찾아오는 것이 지금처럼 즐거울 수 있도록.”

보들보들한 목소리가 날 감쌌다.

맑은 개울물에 씻어낸 것처럼 빛나는 눈빛도 내 심장을 건드렸다.

그가 토라진 아이를 달래듯 나의 선홍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능숙하진 않았다.

오히려 서투른 편이었다.

그래도 스윽, 스윽 니콜라이의 손길에 맞춰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불안과 근심을 날려주는 명징한 감촉이었다.

인간에게 심장만큼 솔직한 부분이 또 있을까?

때론 머리보다 심장에 집중하고 싶었다.

니콜라이가 날 좋아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적어도 소중히 여긴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 마음이 시간이 지나면 휘발되고 마는 찰나의 호의일지라도 기쁠 터였다.

그래야 하는데.

지금은 울고 싶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 예리한 칼로 심장을 저며내는 것처럼.’

니콜라이가 카나리아 방을 찾는 건 처음이 아닐 것이다.

자물쇠가 달린 문.

문 아래 뚫린 배식구.

장벽처럼 빽빽한 호랑가시나무 울타리.

불편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우아한 실내.

내게 적대감을 품던 프란츠.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카나리아 방의 주인이 라일라였던 거야. 니콜라이가 찾아올 때마다 라일라가 반겨줬겠고. 지금의 나처럼.’

니콜라이는 이곳에서 라일라의 흔적을 더듬는지도 몰랐다.

첫사랑을 잊지 못한 남자가 그녀와 비슷한 여자를 가까이하는 것.

지키지 못한 첫사랑을 떠올리며 다른 여자에게 집착하는 것.

이 모두가 클리셰 중의 클리셰 아닌가?

그런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여자의 운명은 뻔했다.

사랑을 쟁취하거나, 피를 철철 흘리다 피폐해지거나.

나는 구질구질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되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을 빼앗아간 남자가 날 대용품 취급을 하는 것 역시 참을 수 없었다.


“저는 폐하만을 기다리는 인형이 아니에요.”

날카롭게 벼려진 음성이었다.

호색한 취급을 받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니콜라이가 손을 거뒀다.

그의 청록색 눈동자에 깃드는 낭패감을 지금은 모른 척하고 싶었다.


“세상에 어떤 인형이 그대처럼 제멋대로겠는가?”

“지혜롭고 배짱도 좋다면서요?”

“지혜로운 만큼 오만하고, 배짱이 좋은 만큼 겁도 없지.”

“그것 봐요. 모두 인형과는 상관없는 것들이네요.”

니콜라이의 말을 한껏 비꼬았다.

그의 입매가 반듯한 호선을 그렸다.


“그게 싫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다.”

나대지 마라, 심장아.

지금은 그럴 때 아니다.


“날 책임진다는 여자가 자꾸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려 하니, 그 또한 미칠 노릇이고.”

그가 입술을 끝을 물어뜯었다.

가뜩이나 붉은 입술이 핏빛으로 달아올랐다.

그 감촉을 생생히 기억하는 나는 숨을 집어삼켰다.

남의 입술을 내 입술보다 자세히 알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그가 원작 폭군이 아니라 평범한 남자였다면 이 순간을 곱게 접어서 소중히 간직할 텐데.


“내기는 염려하실 것 없어요. 다 잘될 테니까요.”

“승리를 장담하는 이유는?”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여전히 비밀이 많군.”

“폐하의 인내심도 예전만 못한 것 같아요.”

검 들고 설치지 말라는 소리였는데 니콜라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는 정말 둔감하다.”

“뭐가요?”

“내 인내심은 그대를 만나기 전보다 고강해졌고, 지금도 그 인내심 덕을 보고 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경지에 다다른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이미 그대를…….”

그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대신 에메랄드보다 청명한 녹색 눈에 타는 듯한 갈증이 맺혔다.

그의 콧대도, 턱도, 입술도 한껏 긴장되어 있었다.

니콜라이 안에서 넘실대는 불꽃이 무엇인지, 그가 어떤 인내심을 발휘하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외면하기도 힘들었다.

자글자글 타오르는 불꽃이 내게도 옮겨붙은 탓이었다.

그의 입술이 한 움큼 가까워졌다.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내일 일찍부터 할 일이 많아요.”

니콜라이의 두 눈에서 이글거리던 열기가 사라졌다.

의아함, 실망, 안타까움이 차례로 지나가고 냉정함으로 꾸며낸 무표정만이 남았다.


“나는 공정하게 심판할 것이다.”

니콜라이가 말했다.

분노에 사로잡힌 것도, 비아냥거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남처럼 담담해서 나는 억지웃음도 짓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하던 바에요.”

“우리의 계약도 잊지 말아라.”

“……알겠어요.”

“브렌든 후작과 내기에서 승리하길 빌겠다. 하지만 유혹게임에서 승리하는 건 나일 것이다.”

그 말을 남기고 니콜라이가 떴다.

그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오래전에 패했음을.

쓰라린 패배를 곱씹으면서도 그의 곁에 남길 소망한다는 것을.


 

***

봄이 깊어졌다.

볕은 따스하고 꽃은 흐드러졌다.

두통을 핑계로 프란츠를 따돌리고 후원에서 생각에 잠겼다.

니콜라이에게 유혹당했다고 인정하고 나니 모든 것이 허탈했다.


‘이럴수록 힘내서 인재들을 끌어모아야 하는데…….’

손톱만 한 분홍색 꽃잎이 어깨에 소복이 쌓이도록 니콜라이 생각뿐이었다.

건방진 꼬마 니콜라이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쉬 쫓아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내버려 뒀다.


「거봐!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팜므파탈도 별거 없잖아?」

「이제 다른 여자를 찾으러 가자! 라일라보다 예쁜 여자는 없겠지만.」

「새로운 카나리아 방 주인은 얌전했으면 좋겠다.」

사고는 누가 쳤는데?

책임져달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키스하려다 내뺀 사람은?

순진한 유교걸을 홀린 니콜라이가 밉다가도 또 그리워져서 자꾸만 본궁 쪽으로 고개가 기울었다.


‘무슨 궁상이냐. 보리츠에, 오웬에, 할 일이 태산인데. 다음 주엔 전 재산을 걸고 내기도 해야 하고.’

꽃잎을 대충 털고 걸음을 옮겼다.

더글라스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더글라스 님?”

“산책은 즐거우셨습니까?”

더글라스가 눈매를 곱게 접으며 물었다.

나는 산책하지 않았고, 더글라스도 그 사실을 알았다.

나도 그와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님을 눈치챘다.

그의 머리와 어깨에 나와 똑같은 꽃잎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학 수업이 끝난 건 한참 전인데…… 언제부터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더글라스와 나 사이의 위태로운 벽이 금세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다.

더글라스는 포근한 미소로 내 어깨에 겉옷을 덮어줬다.

은은한 비누 향과 신선한 종이 냄새, 무겁지 않은 잉크 냄새.

더글라스는 체취마저 다정했다.


“축하드려요. 『제국의 붉은 별』 2권도 베스트셀러가 됐다면서요?”

“훌륭한 편집자와 삽화가를 만난 덕분입니다.”

그 삽화가, 내가 좀 안다면 아는 사람이지.


“작품이 훌륭하지 않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과찬이십니다.”

“황궁 하녀들이 더글라스 님을 보려고 황태자 궁을 기웃거린다던데요. 편지랑 선물도 쏟아지고요.”

“그녀들이 보고 싶어 하는 건 제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죠?”

“환상 속 소설가겠지요.”

“더글라스 님이 아마도 그 환상 속 소설가보다 잘 생기셨을걸요. 제가 장담해요.”

장난을 곁들인 칭찬이 쑥스러운지 더글라스가 고개 숙였다.

하지만 전처럼 얼굴을 붉히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내가 예전의 엘리자벳이 아니기 때문일까?

더글라스의 마음이 한층 단단해졌기 때문일까.

그의 겉옷을 걸치고 함께 걷는 이 시간이 혼자 있을 때보다 편안했다.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엘리자벳. 수잔을 귀한 자리에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잔의 실력으로 뽑힌 거예요.”

“수잔이 그토록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할아버지의 명성을 잇는 약제사가 되겠다고 열의를 보이는 중입니다.”

“업무 부담은 걱정하지 마세요. 궁정 치료사께 수잔의 체력을 고려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어요.”

“엘리자벳에게 받은 은혜를 어찌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괜한 말 하지 말라며 손사래 쳤겠지만.

나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 은혜, 갚을 기회가 왔다면 어쩌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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