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 진짜 내 사람 만들기 (40/97)


#40. 진짜 내 사람 만들기
2023.01.17.


내 기억에 따르면, 원작에 이런 내용이 등장했다.

「클라우디아는 혁명 자금이 필요했고, 북부 탄광에서 탈출한 오웬은 재기의 발판이 필요했다.

싸구려 선술집에서 클라우디아와 만난 오웬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소. 숨어서 끄적이는 건 관두고 싶소.”

“당신의 그림은 여전히 비싼 값에 팔린다고 들었소.”

“반역자가 된 이후 그림값이 더 치솟았더군. 나는 하루 치 식량을 걱정하는 형편인데…… 내 그림은 수천만 골드에 팔리오.”

“나는 검밖에 모르는 사람이오.”

“하지만 황제가 될 수 있는 사람이지.”

오웬을 노려보던 클라우디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튼소리를 하다간 북부 탄광이 아니라, 지옥으로 끌려갈 것이오.”

“반역자란 낙인만 지울 수 있다면 뭐든 하겠소. 당신에게 큰돈을 벌어줄 수도 있소.”

“밥값을 걱정하는 처지라면서?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지?”

클라우디아의 푸른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고작 서른에 불과했지만, 오웬의 웃음엔 죽음을 앞둔 노인의 허무가 배어 있었다.


“나는 못 믿어도, 날 소개한 그 사람은 믿지 않소?”

“…….”

“로즈로이스 경. 날 받아준다면 천금을 약속하지. 그 돈으로 새 하늘을 여시오.”

“화가인 줄 알았는데 도박꾼이군.”

“쥐새끼처럼 연명하고 있으나 아무에게나 목숨을 걸지는 않는다오.”

클라우디아는 오웬을 만나기 전부터 그와 함께하기로 작정했다.

오웬 블랙은 예브레이 황실에 의해 몰락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가 힘을 보탠다면 누명을 쓰고 숨어 살던 인재들이 혁명에 동참할 수 있었다.

물론 사람이 모여들면 발각될 가능성도 커졌다.

하지만 클라우디아에게도 도박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블랙 백작. 어떻게 돈을 벌 작정이오?”

“들었던 것보다 성격이 급하시군.”

“허풍쟁이 싫어한다는 말도 들었소?”

“더글라스가 충고했지. 당신을 만나면 무조건 진실만 털어놓으라고.”

“나와 함께하려면 내 친우의 충고를 기억하는 게 좋을 것이오.”」

오웬을 클라우디아에게 소개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더글라스였다.

나는 클라우디아가 그랬던 것처럼 더글라스를 징검다리 삼아 오웬을 만날 계획이었다.

더글라스는 은혜를 갚고 싶어 했고, 오웬은 명예를 되찾길 바랐다.

둘 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공짜는 아니지만.


 

***

삽화가를 소개해달라고 하자 더글라스는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그 삽화가와 함께 최고급 레스토랑 버거킨에서 만나자고 했을 땐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버거킨은 제국 제일의 요리사만 고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귀족들은 웃돈을 얹어서라도 이 레스토랑에 예약을 잡길 바랐다.

나는 오늘을 위해 조용한 내실을 예약했다.

새하얀 식탁보가 깔린 식탁과 반짝거리는 은식기가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삽화가님께서 그 유명한 오웬 블랙이셨다니…….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더글라스가 꾸벅, 머리를 조아렸다.

암갈색 머리칼에 빨간빛을 띤 검은 눈동자를 가진 30대 남자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리 고백 못 해서 미안하오.”

“이해합니다.”

“후작은 속 깊은 사람이니 용서할 줄 알았소. 내 정체가 이렇게 간단히 발각될지는 몰랐지만.”

씁쓸해하는 오웬을 내가 위로했다.


“우리 셋만 아는 사실이니 염려 놓으세요, 백작님.”

백작이라는 호칭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럴까.

아니면 내가 황태자의 교육담당관이기 때문일까.

고깝다는 듯 날 노려보던 오웬이 고개를 픽 돌렸다.


“어찌 알았소? 『제국의 붉은 별』 삽화에는 내 작풍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는데.”

“황금만 있다면 어렵지 않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원작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오웬이 삽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더글라스와 우정을 나누고 있다는 것도 몰랐겠지.

클라우디아가 첫 만남에서 그의 환심을 사게 된 계기도.


“엘리자벳 양. 왜 날 보자고 했소?”

“부탁드릴 게 있어요.”

“거절하겠소. 예브레이 황실의 하수인을 내가 어찌 믿겠소?”

“저는 못 믿어도, 저를 소개한 이분은 믿으시잖아요?”

견고해 보이던 오웬의 눈동자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말투와 어법이 비슷한 사람에겐 대개 호감을 느끼는 법이지.

그래서 내가 연구를 좀 했다니까?


“일단 밥부터 먹을까요?”

손뼉을 짝, 쳤다.

내가 특별 주문한 요리가 차례차례 들어왔다.

종업원들이 가져온 접시를 발견하고 오웬이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그는 노릇노릇하게 구운 송아지 구이를 보고 침을 삼켰고, 김이 펄펄 나는 조개 스튜의 향을 맡느라 코를 벌름거렸다.

분홍색 칠면조를 듬뿍 얹은 고기파이와, 블루베리와 함께 졸인 칠면조에도 동요했다.

하나 같이 대귀족의 연회에나 나올 법한 값비싼 요리였다.

미식가이자, 대식가인 오웬이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음식이기도 했다.


‘클라우디아는 밥으로 오웬을 사로잡았지. 까탈스러운 척하지만 단순한 남자라니까.’

테이블 위에 턱을 괸 내가 빙긋 웃었다.


“마음껏 드세요. 부족하시면 말씀하시고요.”

“공짜 밥이라니 의심쩍구려.”

“백작님께서 안 드신다면 이 음식들은 버릴 수밖에요.”

“사치스럽긴! 감자도 양껏 못 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툴툴대면서도 오웬은 포크와 나이프를 쥐었다.

더글라스가 사슴 통 다리가 담긴 접시를 오웬 앞으로 밀어줬다.


“저를 봐서라도 드십시오. 버거킨의 요리는 제국 제일입니다.”

“후작의 체면을 봐서 먹는 거요. 흠흠.”

인사치레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오웬이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크게 벌어진 입과 쉴 새 없이 들어가는 음식.

오웬은 틈틈이 감탄과 분석을 잊지 않았다.


“송아지 구이에 라즈베리 식초를 썼군? 이건 북부 해안의 비단조개 육수 같은데? 꿀도 신선하고, 표면의 바삭함도 아주 훌륭해.”

화가가 아니라 먹방 크리에이터로 나섰어도 크게 성공했을 남자였다.

순식간에 비워지는 접시를 보고 나는 종업원을 불렀다.

중간에 음식이 떨어지면 흥이 깨지는 법이니까.


“계산서에 어마어마한 금액이 적힐 것 같습니다.”

더글라스가 염려를 담아 속삭였다.

이 식사를 위해 내가 쓴 금액을 알면 더글라스는 기절초풍할 거였다.


“백작님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요.”

“저분과 친해지려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엘리자벳.”

“황태자 전하에게 최고의 미술 교수를 붙여드리고 싶거든요.”

프란츠 핑계를 대며 스테이크 조각에 버섯 소스를 듬뿍 묻혔다.

오물오물 고기를 씹는 날 향해 더글라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쉽게 뜻을 꺾을 분이 아닙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황실에 맺힌 게 많으실 겁니다. 만에 하나 교수가 된다 해도 큰 문제가 생길 거고요.”

“그럴 수도 있죠. 아닐 수도 있고요.”

“엘리자벳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에요.”

클라우디아의 세력이 커지는 걸 늦추면서, 내 입지도 강해질 테니 두루두루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작님을 소개해준 것만으로 감사할 뿐이에요. 나머지는 제가 해결할게요.”

“엘리자벳은 정말 신비로운 분입니다.”

“제가요?”

“남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을 턱턱 이뤄내시니까요.”

더글라스가 경탄을 듬뿍 담아 날 바라봤다.

진심 어린 칭찬에 뱃속이 근질근질하고 쑥스러웠다.


“아직 백작님 허락을 얻지 못한걸요?”

“엘리자벳이 결심했으니, 결국 이룰 겁니다.”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은데요? 저는 소설 속 여주인공이 아니에요.”

“엘리자벳은 어떤 여주인공보다 특별합니다. 엘리자벳을 모델로 소설을 썼다는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로요.”

더글라스는 엘리자벳이 변화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응원해 준 사람도 더글라스였다.

누구보다 나를 이해해주는 남자.

변함없이 내 곁을 지켜주는 남자.

클라우디아가 더글라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이 아니었다.

더글라스와 함께 있으면 따끈하게 데워진 아랫목에 누운 듯 편안하고 나른했다.

내 안에 니콜라이라는 거대한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면 나는 더글라스의 햇살 같은 미소를 끝내 거절하지 못했을 터였다.


 


‘정신 차려, 엘리자벳! 원작 남주에게 두근거릴 때가 아니야. 오웬부터 해결해야지.’

나는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오웬을 바라봤다.

단순히 클라우디아를 견제하기 위해 오웬을 얻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오웬은 호박이 주렁주렁 달린 넝쿨이나 마찬가지였다.

몇 가지만 정리해보면 이렇다.

1. 오웬을 사면 복권함으로써 니콜라이의 너그러움을 널리 알릴 수 있다.

2. 억울하게 묻혀 지내던 인재들을 끌어모을 수 있다.

3. 그들의 세력을 지원해 4대 명문가가 독점 중인 권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

4. 프란츠와 오웬을 중심으로 문화예술을 부흥시킬 수 있다.

마성을 사용해서 빠른 결과를 낼 수도 있지만, 요즘 들어 유혹하는 게 자꾸 망설여졌다.


‘유혹당한 사람은 진짜 내 사람이 아니야. 유효기간이 끝나면 다시 돌변하기도 하고. 마성이 아닌, 진심으로 사람을 얻고 싶어.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내가 너무 순진한 걸까?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도 모자랄 판에 점잔빼는 걸까?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꼭두각시가 아니라, 더글라스나 수잔 같은 ‘진짜 내 사람’이었다.

목적 때문에 접근했대도.

서로의 이익을 위해 거래한대도.

언젠가 진심이 통하리라 믿었다.

내 겉모습과 재력에 혹한 뜨내기는 필요 없었다.

마성에 홀려 이성을 잃은 사람도 원치 않았다.

그런 사람들을 그러모아 봤자 절대 클라우디아를 이길 수 없을 터였다.


‘진심이 안 통하면 마성으로 쓰러뜨릴 수밖에 없지만.’

내 음흉한 눈빛을 눈치챘는지 오웬이 음식을 가득 베어 문 채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때 문밖에서 소란이 들렸다.

허락 없이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했던 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무슨 일인가요?”

“죄, 죄송합니다! 어떤 신사분이 무턱대고 쳐들어오셔서……!”

지배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그 뒤로 익숙한 남자가 보였다.

비명을 삼키며 두 손으로 선홍빛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니콜라이가 여기 왜 나타나?!’

 

***

니콜라이를 발견한 더글라스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오웬은 식사를 방해한 미남자를 못마땅한 눈으로 훑어봤다.

다행히 오늘 니콜라이는 부유한 청년 기사처럼 차려입었다.

검은 재킷과 가죽 부츠는 수수했고, 허리에 찬 검도 단조로운 디자인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깜짝 놀랄 만큼 마감이 훌륭하고, 질 좋은 물건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말이다.


“오늘도 낯선 사내와 함께 있군.”

날 내려다보는 니콜라이의 청록색 눈은 겨울 바다만큼 냉랭했다.


“전 약혼자도 빠지지 않았고.”

니콜라이의 시선이 더글라스를 향했다.

활활 타오르는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더글라스는 태연하게 인사했다.

잠자코 있던 오웬이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이분은 누구시오?”

“…….”

“보아하니 고귀한 분 같은데 소개해주지 않을 것이오?”

니콜라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말하는 중인데 허락도 없이 끼어들어?’라는 눈빛이었다.

니콜라이가 뭐라 대꾸하기 전에 내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불만 가득한 눈으로 쏘아봤다.


“잠깐 둘이 이야기 좀 나누실까요?”

다 된 오웬에 니콜라이 빠뜨리는 짓만은 막고 싶었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

니콜라이란 남자가 얼마나 제멋대로인지.


“!”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니콜라이가 내 손바닥을 핥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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