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남자의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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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남자의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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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남자의 질투
2023.01.20.
이 남자, 왜 이러는 거야?
강아지도 아니고!
발끝부터 뒷덜미까지 온몸의 털이 거꾸로 솟았다.
손바닥 안쪽 예민한 살갗에 니콜라이의 촉촉하고 뜨거운 살점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두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훅 치밀어 오르는 현기증을 잇새에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니콜라이는 뻔뻔하다 못해 오만했다.
‘뭐든 해봐. 그대로 갚아줄 테니까.’
부추기는 듯 자신만만한 눈빛이 얄미웠다.
하지만 또다시 손바닥 공격을 당한다면 버티지 못하리라.
쌕쌕거리는 호흡을 겨우 내뱉으며 니콜라이에게서 떨어졌다.
더글라스와 오웬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와 니콜라이를 바라봤다.
“잠깐 실례할게요!”
바짝 굳은 미소와 함께 니콜라이를 끌어냈다.
내 반응이 썩 만족스러운지 그가 순순히 따라왔다.
미로처럼 좁은 복도를 지났다.
열기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손바닥을 문질러봤지만 소용없었다.
뜨거운 숨결이 낙인처럼 생생했다.
손바닥에서 시작된 열꽃이 이성을 온통 점령할 기세였다.
버거킨 레스토랑이 자랑하는 또 다른 내실로 니콜라이를 밀어 넣었다.
몇 번의 심호흡 끝에 겨우 입술을 뗄 수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무슨 짓이세요?”
“말하지 않았나? 유혹게임에서 내가 승리할 거라고.”
“패배 선언 직전일 텐데요.”
“직전이었을 뿐이다. 아직 그대가 이긴 건 아니지.”
벽에 등을 기댄 니콜라이가 반항적인 청소년처럼 고개를 비뚜름하게 숙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불끈 솟았다.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고 혼자 여유만만이네. 지금 내가 당신을 살리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삼키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 목숨만큼 니콜라이의 생명도 소중해진 것이.
단두대 꿈을 꿀 때조차 나는 클라우디아가 아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인한 육체와 지고한 신분을 지녔으면서 처연하게 처형을 기다리는 니콜라이를.
모두를 놓아버린 공허한 눈동자를.
잔뜩 벼려진 칼날이 목에 떨어지기 직전까지 황제라 불리던 남자의 말로를 두 눈에 담았다.
그리고 매일 밤 다짐했다.
‘니콜라이를 위해서라도 클라우디아를 막을 거야. 내가 있는 한 누구도 이 남자를 죽이지 못하게 할 거야.’
이 다짐을 니콜라이는 몰랐다.
몰라도 상관없었다.
그가 도도한 절대자로 남아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가끔 부아가 치밀지만.
“그 남자는 누구지?”
“프란츠의 미술 교수로 초빙할 분이에요.”
“낯선 얼굴이던데.”
“숨겨진 인재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탈옥한 인재라는 말이 더 정확하지만, 오웬의 정체는 니콜라이를 설득한 후 밝힐 셈이었다.
“인재를 찾는데 왜 더글라스가 필요한가?”
“더글라스 님이 소개해주셨거든요.”
“더글라스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건가?”
“트집 잡지 마세요. 더글라스 님은 제 친구라고요. 폐하께서 임명한 문학 교수이기도 하고요.”
니콜라이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으므로 서둘러 덧붙였다.
“더글라스 님 편을 드는 건 아니지만요.”
부질없었다.
니콜라이의 초록 눈동자가 흉포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더글라스를 감싸고, 그와 밥을 먹고, 그의 도움을 받으면서 편드는 게 아니라면…….”
니콜라이가 말꼬리를 늘였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사귀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대체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 걸까?
팔짱을 끼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누구 사귈 처지가 아니란 건 폐하가 더 잘 아실 텐데요?”
“모른다.”
“계약서 기억 안 나세요? 다른 이성과 교제하지 말라는 조항을 직접 쓰셨는데요.”
“어쨌든 몰라. 알아도 모른다. 그러니까 더글라스인지 개뼈다귀인지 가까이 좀 지내지 말라고.”
유치한 고집에 헛웃음이 밀려왔다.
‘아까는 강아지 같더니, 지금은 어린애 같네. 프란츠는 귀엽기라도 하지.’
한숨과 함께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계약을 어기는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틈만 나면 내 눈을 피해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면서 안심하라고?”
“폐하야말로 언제까지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실 건가요?”
“난 물건을 사러 나왔을 뿐이다.”
“제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는데요?”
“모를 수가 있을까? 남자 둘을 끌고 요란하게 행차하시는데.”
너무 뻔뻔해서 의심스러운 말이었다.
미행을 붙인 건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알아야겠다고 선언했잖아?
하지만 니콜라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청순한 미모를 자랑하는 더글라스.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나.
예술가 특유의 매력을 풍기는 오웬.
우리 일행은 좌중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명령만 내리시면 알아서들 대령할 텐데. 뭘 몸소 사러 나오셨어요?”
“별거 아니다.”
“왜 상인을 부르지 않으셨죠?”
“만져보고 따져봐야 한다.”
“별거 아니라면서요?”
니콜라이가 시선을 옆으로 픽 돌렸다.
미묘하게 찌그러진 입매라던지, 조금 상기된 뺨 때문에 난처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뭔데 그래요?”
“기다려. 보기 싫어도 곧 보게 될 테니.”
“주문 제작 상품인가 봐요?”
“그럴 수밖에.”
니콜라이가 대충 얼버무렸다.
“알았으니까, 쇼핑 끝나면 얼른 돌아가세요.”
“그대는?”
“볼일이 남았어요. 아직 밥도 안 먹었고요.”
“나도 안 먹었다.”
“……네?”
“함께 들도록 하지.”
“더글라스 님과 식사를 함께 하시겠다고요?”
“그대를 위해 이 한 몸 희생하는 것이니 황공히 여기도록.”
그런 희생은 사양하겠다고 말하려는데, 니콜라이가 한 걸음 앞장섰다.
***
속이 더부룩하고 메슥거렸다.
고집 센 불청객 때문에 밥이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다행히 오웬은 니콜라이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빈 접시를 산처럼 쌓아놓고 요리에 몰두했으니 그럴 만했다.
어색한 식사가 끝나고 니콜라이가 명령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쇼핑 잘하세요. 바가지 쓰지 마시고요.”
“이 자리에서 꼼짝하지 마.”
“가라고 해도 안 가요. 염려 말고 다녀오세요!”
후드로 얼굴을 가린 니콜라이가 미심쩍은 눈으로 몇 번이나 돌아봤다.
‘저렇게 불안하면 같이 가면 될 것을. 뭘 사는지 몰라도 대단한 비밀인가 보네.’
“저도 수잔이 부탁한 실험 도구를 사러 다녀오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더글라스가 말했다.
미소로 답했다.
“수잔의 후원자인 제 앞으로 달아놓으세요.”
“저도 수잔의 연구를 돕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주시지요, 후원자님.”
“더글라스 님처럼 좋은 오빠가 있어서 수잔은 좋겠네요.”
“엘리자벳을 부탁합니다, 백작님.”
더글라스가 오웬을 향해 꾸벅 고개 숙였다.
오웬과 카페테리아에 자리를 잡았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간지럽혔다.
오웬이 물었다.
“기계처럼 밥 먹던 그 청년은 누구요? 살다 살다 그런 사람은 처음 봤소. 보는 내가 다 식욕이 떨어지더군.”
“다행이네요. 백작님의 식욕이 도졌으면 파산할 뻔했는데.”
“흠흠. 덕분에 포식했소. 고맙소.”
“맛있게 드셔주셔서 감사해요.”
“몇 년 만에 맛보는 진미였는지 모르오. 목숨 걸고 돌아온 보람이 있구려.”
오웬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배를 두드렸다.
원작 정보를 모처럼 잘 이용한 것 같아서 짜릿했다.
“황태자 전하의 미술 교수가 되시면 그런 음식을 매일 드실 수 있어요.”
“이 비싼 레스토랑에 매일 데려와 주겠다고?”
“여기까지 올 필요 없어요. 오늘 드신 요리는 전부 황궁 조리사들 작품이니까요.”
“어떻게 황궁 조리사들이 버거킨에 있단 말이오?”
오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실 사용인이 만들었다는데 불쾌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이 레스토랑 전체를 빌렸거든요.”
“뭐, 뭐요?”
“황궁 조리사들은 오늘 하루 휴가를 내고 파견 나왔어요. 물론 그 값도 제가 지불했죠.”
“그게 가능하오?”
“버거킨 요리사들이 황궁 조리사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으니까요. 내무대신의 특별허락 하에요.”
황궁 살림을 도맡는 카레스는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어마어마한 돈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이제 오웬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오? 내가 뭐라고?”
“백작님 같은 인재가 사라지면 제국 예술 역사에 큰 손해니까요.”
오웬의 적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맛난 요리만큼이나 좋아하는 게 칭찬이었다.
‘탄광에 처박혔다가, 숨어 살았으니 칭찬에 목말랐겠지. 삽화가로 잘 나간대도 불만스러웠을 거야. 진짜 실력을 드러낼 수 없으니까.’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엘리자벳 양도 내 그림에 반했나 보군.”
오웬이 씁쓸하게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황실에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소.”
“백작님께서 쫓겨난 게 벌써 10년 전이에요. 세상도 황실도 많이 바뀌었어요.”
“그렇다고 해도 예브레이 황족을 위해 일할 수는 없소.”
“…….”
“미안하오.”
오웬이 몸을 돌렸다.
그의 등 뒤에서 한마디 했다.
“폐황후의 뜻대로 사시겠다면 말리지 않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요?”
“백작님을 탄광으로 쫓아낸 건 페넬로페였죠. 초상화를 거절하신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을 테고요.”
“그 여자는 제 명을 거스른 날 죽이려 했지.”
“페넬로페가 원한 건 백작님의 목숨이 아니었어요.”
“엘리자벳 양이 북부 탄광에 대해 몰라서 하는 소리요! 그곳은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옥이라고!”
“단두대가 있는데 왜 지옥으로 보냈을까요?”
“그, 그건 내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
“아뇨. 페넬로페는 오웬이란 천재 화가의 미래를 비참하게 만들길 바랐던 거예요. 평생 처참한 운명에 몸부림치기를요.”
오웬이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렸다.
안타까움을 숨기고 매정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백작님이 복수하는 길은 완벽히 재기하는 것뿐이에요. 황태자 전하와 제가 도울 수 있어요.”
“황태자라면 그 악귀 같은 여자의 손자 아니요?”
“피 한 방울도 통하지 않았어요. 누구보다 페넬로페를 증오하고 계시고요.”
“하지만…….”
“페넬로페는 적국의 왕비가 되었어요. 예브레이 황실과도 원수가 되었지요. 왜 백작님은 애꿎은 황실만 원망하시나요?”
오웬은 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분노가 방향을 잃었음을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자존심을 쉽게 꺾지 못했겠지.
두려움도 떨쳐버리기 힘들 것이었다.
탈옥했다는 것만으로 처형의 명분은 충분하니까.
“미술 교수 자리는 거절하셔도 돼요. 하지만 저는 백작님께서 다시 그림을 그리시길 바라요.”
“엠스터 상단의 상속녀가 이렇게 착해빠졌을 줄은 몰랐군.”
“칭찬은 감사하지만, 철저한 계산속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백작님을 이용해 큰돈을 벌 생각이거든요.”
“일개 삽화가가 무슨 수로?”
오웬은 미심쩍다는 눈치였다.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표정 짓지 못하게 해주겠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